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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반 컵 15화

맡겨진 스무 살

by anego emi

맡겨진다 는 것. 그것은 제 뜻과 상관없이 낯선 곳으로 보내지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지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무 살이 된 저는, 처음으로 남의 집에 맡겨졌습니다. 남이라고 말하면 좀 매정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존재를 알 뿐 지금까지 어떤 교류도 없었던 누군가의 집으로, 그 누군가가 단지 어머니와 피를 나누었다는 이유로, 저는 낯선 그곳에 맡겨졌습니다. 한 푼이라도 절약하며 허리띠를 졸라매던 그 시절엔, 누군가에게 맡겨지고 누군가를 맡아주는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갑자기 저를 맡기로 한 어머니의 오빠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혈육 간의 정을 나누는 행위이며 그렇게 해야 마음이 편안해지는 법이지요


물론, 저의 의견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단지 퇴근 후에 늦은 저녁 식사를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식탁 앞에 마주 앉아 나누는 이야기를 엿들으면서, 앞으로의 제 운명을 짐작했을 뿐이었죠. “ 우리가 한꺼번에 둘씩이나 어떻게 서울로 대학을 보낼 수 있겠어요? 학비에 책값에 용돈에… 앞으로 줄줄이 돈 나갈 일만 남았는데 … 하숙비라도 아껴야지. 저 아이는 서울 오빠 집에 당분간 맡깁시다 ” 어머니는 당신의 현명한 판단이 백번 올음을 확신하며 아버지에게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 그래도 되겠어? 서울 지리도 모르는데 그 집에서 학교는 멀지는 않고?” 아버지는 입안의 밥을 천천히 씹어 넘기고, 감정이 섞이지 않은 무심한 목소리로 말하자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가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조금 높여 말했습니다. “ 애도 아니고 그런 게 문제가 되나? 오빠가 딸내미 어딜 하숙집 같은 곳에 보내냐고, 당연히 우리 집으로 보내야지 그러더라고요. 너무 고마운 일이지요. 안 그래요? "


그 후 해가 바뀌자 갑자기 동네가 달라지고 집이 달라지고 제 방이 달라지고 매일 먹던 음식이 달라졌습니다. 마치 클레어 키건의 중편 소설 ‘맡겨진 소녀’의 주인공처럼 말이죠. 그녀의 책에서는 그때의 저와 같았던 소녀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해 놓았지요. ‘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 ”

그렇습니다. 한창 놀고 싶고 어디든 자유롭게 날아가고 싶은 스무 살의 저는 곤란한 처지에 놓이고 말았습니다. 평소 말이 없고 무뚝뚝한 우리 아버지와 외삼촌은 낮과 밤처럼 달랐지요. 집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인 외삼촌은 엄하고 참견과 잔소리가 심했지만 때때로 다정한 편이었는데, 문제는 그 다정함은 자신이 정해놓은 엄격한 규율 속에서 잘 적응하는 자에게만 발휘된다는 사실이지요. 자신의 자식들에게도 예외는 없었습니다.


외삼촌이 정해 놓은 우리의 통금 시간은 저녁 7시이며, 7시 반에는 외숙모를 대신해서 집안일과 식사를 준비하는 할머니가 차려주는 저녁 식탁 앞에 외삼촌과 나란히 앉아야 합니다. 그 덕분에 신입생 시절 저의 별명은 ‘6시 신데렐라’였지요. 시험을 앞두고 스터디를 하던, 과동기들과 종강 파티를 하던, 소개팅을 하던, 6시가 땡 하면 저는 벌떡 일어나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야 했으니까요. 만약 그때를 놓치면 지하철에서 제법 먼 거리인 외삼촌 집까지 전력 질주를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금 시간을 넘기면, 표정 없는 얼굴로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외삼촌에게 90도로 고개를 조아리며 ‘죄송합니다. 다시는 늦지 않겠습니다’라고 귀가 인사를 대신해야 했습니다. 어쩌다 객기가 발동되어 동기들과 맥주 몇 잔을 거하게 마시고 알코올의 힘을 빌어 통금 시간을 훌쩍 넘기면, 어김없이 외삼촌은 저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딸 교육을 제대로 시키라고 쐐기를 박았지요. 화를 참지 못하는 어머니는 저에게 속사포처럼 잔소리를 쏟아내며 자신을 창피하게 만드는 일은 제발 하지 말라는 협박에 가까운 당부를 하곤 했지요. 저는 서러운 마음이 들어서 욕실에 들어가 몰래 훌쩍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외숙모는 살갑게 제 등을 도닥여 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미소 속에는 어머니에게는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어떤 감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이 한없이 낯설고 한없이 따뜻해서, 딱히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가 없어서,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 느꼈던 알 수 없던 거리감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아서, 저는 말없이 눈물을 훔치고 외숙모를 향해 애써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소설 속 맡겨진 소녀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가족의 손길과 배려를 저와 같이 낯선 감정으로 느끼게 됩니다. ‘아주머니의 손은 엄마 손 같은데 거기엔 또 다른 것,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것도 있다’ 그 시절 저 또한 그랬으니까요. 늘 두려웠던 부모의 존재. 어머니의 끝없는 간섭과 잔소리. 실수를 용납하지 않던 아버지의 엄격함. 장녀도 장남도 막내도 아닌 나라는 존재. 사랑받고 관심받기 위해 몸부림치던 저의 유년 시절. 그런 것들의 응어리가 맡겨진 1년이라는 시간을 통과하면서 한꺼번에 터졌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어머니와 닮은 외삼촌을 보면서, 어머니와 너무 다른 외숙모를 보면서, 너무 다른 환경 속의 사촌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터져 나온 것입니다.


저는 1년을 그 집에 맡겨진 채로 살았습니다. 그 후에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핑계로 저는 외가에 신세 지는 것을 거림 찍하게 생각했던 아버지를 설득해 독립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말이면 종종 빨랫감을 들고 그 집으로 가 세탁기를 돌리고 사촌들과 저녁을 먹고 그다음 날 오후를 넘기고, 작고 초라한 자치방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 조그마한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제 카드로 어머니가 사준 가전제품이 구비되자, 저는 명절을 제외하고 그 집을 더 이상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가끔 대학원을 준비하던 동갑내기 여사촌을 만나 밥과 술을 사주고, 그녀의 입을 통해 외삼촌과 외숙모의 안부를 전해 들었지요. 철이 없었던 저는 첫 월급이란 걸 타면서도 그분들에게 조그만 감사의 선물이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고, 감사의 마음을 표현할 적절한 시기를 놓쳐버린 저는, 바쁜 일을 핑계로 그분들을 향한 무관심을 합리화했습니다.


책 속의 주인공의 감정을 따라가며 저는 까맣게 잊고 지냈던 저의 맡겨진 1년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책을 덮으며 몇 년 전 하늘나라도 떠난 외삼촌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말을 할 때마다 양미간에 굳게 페이던 팔자 주름과 온 집안에 울리던 우렁찬 목소리. 무표정한 얼굴로 소파에 앉아 저를 맞이하던 둥그런 어깨. 제 밥 위에 고기반찬을 올려주던 커다란 손. 어머니와 저를 힘껏 껴안던 길고 굵은 팔뚝. 어쩌면 그 맡겨진 1년 동안 외삼촌은 사랑과 관심을 아낌없이 주려고 애를 쓴 것은 아닐는지요.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제가 알아주기를 누구보다 바라면서요... <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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