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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반 컵 14화

독주 클럽

by anego emi


읽고 싶은 책을 무조건 사서 쌓아두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 책들은 또 두 가지로 분류되지요. 당장 읽어야 하는 책과 언젠가 느긋하게 읽을 책들. 그러나 화수분처럼 생겨나는 일 속에 파묻혀 살던 그 시절의 저에게는, 당장 읽어야 하는 책도 끝내기가 버거웠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게 냉정했던 저는, 저의 무지와 빈틈을 채우기 위해 반드시 업무에 필요한 책들을 짬을 내어 읽으려 애를 썼습니다. 그런 저에게 잠시 느긋하게 일과 떨어질 수 있는 시간이 공식적으로 생깁니다. 바로, 해외 출장길의 비행기 안입니다. 이곳에서는 제가 뒹굴던 세계와 완전히 고립되고, 혼자라는 느긋한 자유 시간 속에서 저는 ‘언젠가 느긋하게 읽을 책’을 펼쳐듭니다.


출장 날짜가 잡히고 전자 티겟이 저의 메일로 발송이 되면, 저는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마치 첫 데이트 날 입고 갈 옷을 고르는 것처럼 책을 고르죠. 제가 픽업한 그 책은 무조건 재미있거나 감동적이어서, 잠시나마 지리멸렬한 저의 일상 탈출을 위한 등불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비행기가 이륙하면 나눠준 쿠션을 허리춤에 받치고 개인 식탁을 펼치고 그 위에 책을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적당히 들을 만한 음악을 고르고 이어폰을 낍니다.


무조건 첫 페이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끈기가 부족한 저에게 첫 페이지는 자동차의 엑셀레이터를 밟는 것과 같으니까요. 다행스럽게도... 첫 장을 넘기기가 아까울 만큼 그 내용이 흥미진진하면 저의 책 읽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때 천사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손님 음료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 저는 그 목소리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즉각 준비해 둔 답을 합니다. “ 화이트 와인 주세요. 이왕이면 가득 ~” 눈가에 웃음을 머금은 그 천사는 플라스틱 컵에 가득 미색의 투명한 액체를 따라주고 저에게 속삭이듯 말하죠. “ 부족하면 더 드릴게요. 말씀 주세요” 이보다 더 좋은 수 없는 화답을 얻어낸 저는 읽던 책으로 눈을 돌리고 천천히 책 속의 활자를 안주삼아 와인을 마십니다. 이렇게 저의 독주 클럽은 시작됩니다.


도쿄 유학시절 신주쿠에 북바(Book BAR )라는 곳이 있었습니다. 간단한 안주거리와 식사를 할 수 있고 서가에 배치된 책과 잡지를 읽을 수 있는 곳이었죠. 지금이야 서울에도 이런 곳이 제법 생기고 인스타그램에서 핫플로 회자되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굉장히 신선했답니다. 도교 한복판에서 드디어 책과 술이 스타일리시하게 조우한 느낌이랄까요? 비록 유학생 형편에 적지 않은 입장료와 음식값이 부담이 되어 자주 가지는 못했지만, 혼자 술을 마시고 책을 읽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간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책과 술… 한국으로 돌아가면 '독주'를 할 수 있는 저만의 공간을 만드리라고. 대단한 준비는 필요치 않습니다. 편안한 1인용 소파 그리고 집중력을 돕는 은은한 조명, 마지막으로 제가 고른 책과 어울리는 술입니다.


연애 소설을 읽을 때는 레드와인이 어울리고, 유머가 넘치는 소설이나 만화책을 읽을 때는 맥주가 당기지요 짧은 호흡의 에세이나 단편 소설집을 읽을 때는 화이트 와인이 책 읽는 맛을 더하고, 눈이 펑펑 오는 날에 읽는 야스나리의 '설국' 같은 고전에는 뜨거운 청주가 어울립니다. 천천히 읽으며 사유하게 되는 철학책은 위스키 언더락스로 긴장을 풀고, 호기심이 간질간질한 추리 소설에는 하이볼로 쉼 호흡을 가다듬습니다. 그러나 독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술은 아주 적당히만 마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의 몰입도를 높이기에 가장 적당한 정도는 한 잔에서 두 잔이 좋지요. 혹 구미가 당기신다면 첫 독주 클럽은 가을비가 오는 날로 추천드립니다. 비가 추적추적 마음을 적시며 감성을 자극하며 내리는 그 순간, 차가운 화이트 한잔을 따르고 어떤 책이든 골라 읽어도 무난할 것입니다. 물론, 음악과 조명은 옵션이지요. 이렇게 자신만의 소확행으로 오늘 또 반컵을 채워보면 어떨까요 <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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