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날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여 밥을 먹을 때면, 엄마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 쌀을 먹지 않는 오빠를 밥상에 앉히려 애를 쓰지만, 돌아오는 것은 손사래를 치며 자신이 방으로 들어가는 무감한 뒷모습뿐입니다. 제가 오빠를 향한 무어라 짜증 섞인 말을 하려고 하면 엄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검지 손가락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저를 침묵하게 합니다. 자신은 자식들이 싸우는 것이 제일 싫다면서 말이죠.
엄마는 오빠 때문에 속상해서 울고 그 화를 참지 못해 저에게 수시로 전화를 해서 절규하듯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서, 엄마의 그 마음에 공감한 제가 그를 향한 욕설을 조금이라도 퍼부으면, 엄마는 그러지 말라고 그러면 자신이 더 괴롭다고 사정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려오다가 엄마의 그런 태도를 이해할 수 없기에, 도리어 엄마에게 화를 내게 됩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엄마를 슬프게 하는 사람은 제가 되는 셈이죠. 이런 상황이 너무 싫었습니다. 이 서운함이 서린 죄책감을 안고 남은 하루를 보내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죠. 저는 이토록 엄마를 공감하기에 그래서 엄마를 아프게 한 대가를 그에게 조금이라도 돌려주려고 하는데, 그걸 엄마가 괴로워하니 저는 무엇을 어찌해야 몰랐던 것이죠.
저는 엄마의 아픔을 가슴 시리도록 공감했지만, 엄마의 아픔을 연민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최근 들어 깨닫게 되었습니다. 공감은 제가 엄마에게 그랬듯이 필터 없이 온전히 타인의 고통을 강렬하게 느끼는 것이고, 연민은 타인의 감정 상태를 눈치채고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나아지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공감과 연민을 같은 감정이라고 착각해 왔던 것이죠. 저는 오빠로 인한 엄마의 고통을 가슴 저리게 느낄 수 있었지만, 엄마가 그것으로 인해 어떤 감정 상태인지, 그 상태가 나이지도록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제가 얼마나 그 고통을 공감하는지를 고통을 준 오빠를 증오함으로써 보여주려고 했던 것이죠. 다 각자의 입장차이가 있을 터, 오빠가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조차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이런 경우에 저의 공감 능력은... 저는 물론이고 엄마에게 독약이 된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세상을 연민한다는 것은 세상의 불행에 공감해서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방법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것을요.
저는 결심을 합니다. 늙고 약한 엄마를 연민하기로요. 오빠를 이해해 보기로요. 그리고 심지어 사랑해 보기로요. 제가 존경하는 심리치료사인 스터츠 박사님의 마음 훈련법을 따라 해 보면서 말이죠. 눈을 감고 사랑으로 이뤄진 우주에 둘러싸여 있다고 상상을 해봅니다. 사랑의 힘으로 가득 채워진 그 세상에서 우주의 모든 사람을 흡수하는 기분을 느껴보는 겁니다. 온 우주의 사랑이 서서히 제 가슴속을 가득 메우고, 그 순간 저는 온 우주를 통틀어서 가장 막강한 사랑의 리더가 됩니다. 그다음에 제가 할 일은 엄마를 울게 하고 화를 돋우는 상대, 미워하고 경멸하는 오빠를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랑을 그에게 보내는 것… 하나도 남김없이 주는 것을 느껴 보는 것, 저의 사랑이 그의 몸에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어린 시절 오빠가 제게 주었을 한 뿌리의 파를 생각하며 잠시 하나의 마음이 됩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겠죠. “ 이 자식과 하나 될 수 있다면 누구하고 든 하나가 될 수 있겠구나 ” 하고 말이죠.
박사님은 조언합니다. 이런 훈련법은 미운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미로에 빠지 자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요. 제가 오빠에게 닫아두었던 마음의 문을 열고 한 발이라도 나아가게 하는 것이라고요. 그것이 바로 엄마를 연민하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것을요. 저는 오늘 저의 반컵에 엄마를 연민하는 마음을 담습니다. 앞으로 오빠를 이해해 보려는 마음도 함께 담습니다. 엄마를 연민하는 마음이 오빠의 마음을 이해하는 마음이 된다면, 남은 생 누구하고 든 하나가 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으면서요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