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난 10년간 꿈속에서 신발을 자주 잊어버렸습니다. 신발을 찾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있는 운동장이나 체육관을 빙빙 돌기도 하고, 맨발로 언덕길을 오르기도 하고, 이 방 저 방을 헤집고 다니며 신발을 찾습니다. 다리가 점점 무거워지고 숨이 차고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그러다 주변이 빙글빙글 돌면서 형체를 알 수 없게 왜곡되면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눈을 뜹니다. ‘ 또 신발이야 ’ 저도 모르게 혼잣말이 새어 나옵니다.
네이버에 검색을 해봅니다. ‘ 신발을 잃어버리는 꿈 ’ …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을 때 그 불안감으로 인해 무의식에 보내는 사인. 즉 거처의 불확실성에서 비롯된 것이군요. 제가 살고 있는 이 집은 이사 온 지 3년이 넘었지만 살기에 불편함이 없고, 그렇다면 이틀에 한 번꼴로 나가는 후배의 사무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월급을 받지 않지만 저는 그들의 일을 돕고, 월세를 내지 않지만 저는 그들과 한 식구처럼 지냅니다. 안 내고 안 받는 나름의 공평한 계산법을 떠올린다 해도, 선배라는 입장에서는 제가 무상으로 제공하는 노동력보다 그들에게 받는 공간과 함께 먹는 점심이 더 고맙고 미안한 법이죠.
처음부터 공짜로 이곳에 제가 쓸 책상 하나는 염치없이 놓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몇 푼 안 되는 월세를 내미는 것보다, 저의 인맥을 동원해 일감을 따오고, 그로 인해 더 큰 이익을 안겨주자 마음을 먹었죠. 대표인 후배는 당연히 그런 편이 자신에게도 좋고, 저와 같은 베테랑 기획자가 있고 없고는 회사로서도 큰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회사가 잘 돌아갈 때는 도란도란 같이 회의를 하고, 늦은 저녁을 함께 먹는 것만으로, 서로 주고받고의 셈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나, 회사가 일이 가뭄에 콩 나듯이 뜸해지고 침묵이 흐르는 날이 이어지면, 그것이 마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제 탓 인양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헛헛한 마음에 조금 일찍 회사를 나와 걷기로 합니다. 더위가 말끔히 물러간 완연한 가을 날씨 덕분인지 초저녁의 건대 입구역은 젊음으로 넘쳐납니다. 보도를 묵묵히 따라 걷다가 길게 줄이 늘어선 타로 천막 앞에 멈춰 섭니다. 건대 입구역에 줄 서는 용한 타로 집이 있어 가볼 참이라던 후배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책 한 권 내고 자신감이 꺾인 제가 작가로 먹고살 수는 있는 건지, 밤마다 신발을 찾아 헤매는 꿈을 꾸면서 후배의 회사에 신세를 져도 되는 것인지... 몇 장의 카드가 그 답을 말해주길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죠.
한참을 기다려 저는 두근 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미모의 타로 마스터 앞에 앉았습니다. 그녀는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매섭게 쏘아보며 말했죠. “ 궁금한 게 뭔가요? ” 저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 작가로 먹고살 수 있을까요? 몇 년 전에 책을 내긴 했는데…” 그녀는 빨간 천이 덮인 테이블 위에 펼쳐진 카드를 빤히 내려다보다 가 단호하고 침착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 글쎄요. 지금으로서는 작가로만 살기는 쉽지 않다고 나오네요. 재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재능이 다 금방 돈이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저는 한숨을 내쉬며 두 번째 질문을 던졌습니다. “ 지금 후배네 회사에 신세를 지고 있는데 마음이 편하지가 않아요. 함께 있어도 될까요? ” 저는 그녀의 지시대로 후배들의 이름을 소리 없이 속삭이며 카드를 한 장 한 장 신중하게 뽑았습니다. 그녀는 카드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저에게 말했죠. “ 함께 있어도 괜찮아요. 서로가 서로를 걱정하고 잘 되길 바라네요. 좋은 기운이에요.” 저도 모르게 안도의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녀는 돈을 지불하고 쭈빗쭈빗 일어서는 저에게 말했습니다. “원하는 걸 하면서 살려면 원하지 않는 삶을 살 용기도 필요하죠.”
저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들으면 저의 신발 꿈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신발을 잃어버려 헤매는 꿈을 자주 꾸는 이유는 함께 있는 후배들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미안함 때문이 아니라, 작가로 살고 싶으나 글 쓰는 삶을 온전히 제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과 단절되고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는 삶. 한 권의 책이 나오기 전까지 내가 무엇을 하고 사는지 떳떳이 말할 수 없는 삶. 야박한 인세 덕분에 후배들에게 마음껏 술과 밥을 사줄 수 없는 삶. 치기 어렸던 젊은 날 그렇게 되지는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던 사람으로 살게 되는 삶. 원하는 작가로의 삶을 살기 위해 원하지 않은 삶을 살아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었죠.
‘이 어령의 말’이라는 책 속에는 신발을 신는 행위의 상징은 ' 내가 인간으로서 내가 누구냐 에 대한 최초의 해답인 동시에 나 아닌 모든 것과 어울리는 접촉점'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갈 곳을 잃음과 동시에 저의 정체성을 잃은 것입니다. 지금 제가 하고 있고 하고자 하는 일을 부정하니 당연한 일입니다. 이 어령 선생님 자신도 신발을 잃어버리는 꿈을 자주 꾸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잃어버린 신발 보다 맨발로 걸어가는 것이 분했다고 덧붙이셨죠. 선생님의 신발은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욕심이었고 저의 신발은 글쓰기를 향한 거부와 두려움에 불과합니다. 제가 이것들을 떨쳐내고 정체성을 되찾는 방법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더 열심히 글을 쓰는 방법밖에는 없겠지요. 잘 쓴 글이든 못 쓴 글이든 제가 쓴 글이라는 걸 인정하며, 자신 없고 초라하더라도 세상 밖으로 자꾸 꺼내어 놓은 일. 그로 인한 부끄러움과 초라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일. 그런 일을 반복하면서 사는 삶. 그것을 인정할 때 원하는 작가로서의 삶이 제 것이 되겠지요. 남은 반 컵에 오늘도 뭐든 쓰는 삶이라는 숙제를 채워 넣습니다. <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