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구질구질한 과거사가 있습니다. 그 임팩트가 너무 강력해서 술김에라도 함부로 꺼내놓기 껄끄러운 운 과거사. 박상영 작가의 연작 소설 믿음에 대하여 ‘요즘 애들’ 편을 읽으며, 구질구질한 저의 과거사가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시절의 ‘요즘 애들’이었던 저의 과거사가, 이 시대의 ‘요즘 애들’에게도 똑같이 반복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강산을 세 번 돌리고 서너 번의 사계절을 더 되돌려야 하는 그때, 저는 졸업을 앞둔 대학 4년생이었습니다. 대학에서 독문학을 전공한 저는, 부전공으로 교직을 이수했죠. 그 당시 우리 과를 졸업한 선배들의 대부분이 교편을 잡거나 대학원에 진학을 했기에, 우리 과에서 교직 이수는 취업이 안될 경우를 대비한 보험인 셈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한 달간의 교생 실습 끝으로 제 인생에서 선생님이라는 선택지를 완전히 지워버렸습니다. 무슨 이유였는지, 그 당시 학교에서만 통하는 터무니없는 선생님의 권위와 그 권위의 서열이 한눈에 들어오던 교무실의 분위기에 강한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새로운 인생의 선택지를 고르는 일에 좀 더 신중해야 한다고. 지금까지와는 달라야 한다고 말이죠.
그 후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으나 입사 시험을 보고 면접을 보면서도 저는 제가 이곳에서 무엇을 하게 될지 무엇을 하고 싶은 지가 막막했습니다. 한마디로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었거든요. 일단 조금이라도 제가 관심이 가는 분야부터 도전해 보자 결심을 했습니다. 막연하지만 저는 광고가 좋았습니다. 작년에 들었던 신문방송학과의 전공수업인 광고학 원론에서, 타과생임에도 불구하고 전공자들을 제치고 당당하게 A+받은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취업 원서 쓰는 것을 멈추고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광고 관련서적을 빌려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광고라는 결과물이 제작되고 대중에게 노출되는 일련의 과정들이 제법 흥미로웠고 대단해보습니다. 벽돌 같은 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저도 모르게 흥분이 되고 가슴이 뛰었습니다. 이거라면 해 볼만하다. 아니해보고 싶다 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날마다 취업 지원센터를 들락 거리며 구인 게시판을 부지런히 찾아보기 시작했고, 어느 날 조그만 광고 디자인 사무실의 구인공고를 발견했습니다. - 경력 및 신입 카피라이터 구함. 신문방송학과 국문과 우대. 남녀 성별 불문, 성실하고 적극적이며 밝은 성격 선호 - 며칠 후 저는 이력서와 그간 쓴 카피 습작 노트를 가지고 디자인 사무실로 무작정 찾아가, 담당자에게 저의 가능성과 열정에 대해 어필했습니다. 무슨 객기였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광고 관련 용어와 아이디어들이 막힘없이 줄줄 나왔죠. 잔뜩 굳어있던 담당자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퍼지기 시작한 순간 저는 합격을 예감했습니다. 경력자를 원했던 깐깐한 사장을 설득해 저를 뽑은 그는 첫날 저에게 손수 커피를 타 주며 말했습니다. “ 내가 우겨서 뽑았다. 넌 잘할 거야. 걱정 마” 그날 자취방에서 처음으로 혼자 마신 캔 맥주가 달고 달았습니다.
동대입구역. 아담하고 특색 있는 가게들이 징검다리처럼 띄엄띄엄 이어져있는 언덕길을 올라가다가, 미로처럼 숨겨진 좁다란 골목길로 접어들면 손바닥만 한 나뭇잎이 크리스마스트리 장식처럼 주렁주렁 걸린 4층 짜리 빨간 벽돌 건물이 보입니다. 그 건물 2층에 있는 ‘다다 광고 디자인 회사’가 저의 첫 직장입니다. 홍대 미대 출신답게 사장이 다다이즘을 몹시 사랑하셔서 그렇게 지었다고 했죠. 그 당시 다다이즘이란 걸 처음 들었던 저는, 대충 뭐 음악이나 문학에서 시대별로 무슨 무슨 파로 나누는 것처럼, 그런 디자인의 한 주류일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입구 쪽에 제법 널찍한 사장실이 있고, 여느 회사처럼 낮은 파티션으로 구분된 책상 몇 개와 동그란 회의탁자가 사무실 한가운데 놓여 있고, 햇빛을 등지고 놓인 2단의 길쭉한 서가에는 디자인 관련 책들이 듬성듬성 꽂혀 있었죠.
그 당시 개인 회사가 대부분 그랬듯이 돈 관리는 사장의 사모가 했습니다. 모 중소기업의 경리과 출신인 그녀는 눈매가 매우 날카로웠고 앙다문 입술이 차가운 인상을 더했죠. 어찌어찌하다 그녀 옆에 책상을 놓고 나란히 앉게 된 저는, 그녀가 생각보다 수다스럽고 혼잣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아하… 그러시구나… 역시 … 그렇죠… 와 같은 그녀에게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장단을 맞춰주었는데, 그것이 그녀의 눈에는 사회 초년생다운 풋풋함과 귀여움으로 보였는 듯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사사건건 따지듯 묻던 그녀였지만, 웬일인지 저에게는 이웃집 언니처럼 살갑게 굴었습니다. 몰래 선물로 들어온 간식들을 나눠주기도 하고, 인턴 월급이 너무 작다며 세금을 떼지 않고 주겠다고 먼저 말하기도 했으니까요.
몇 주가 정신없이 그냥 지나갔습니다. 아침에 출근하고 어느 인턴들이 그러하듯 커피를 내리고 빗자루로 바닥을 쓸고 책상을 닦고 테이블을 정리했습니다. 카피라이팅이 생초보인 저를 가리키는 것은 면접관이었던 부장님이었는데, 디자이너임에도 불구하고 카피 방향에 대한 정확한 디렉션을 주려고 애를 썼습니다. 사장의 인맥으로 유지되는 이 회사는, 지금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는 회사 및 제품 소개 브로슈어, 광고 전단, 포스터, POP 디자인 등이 주 업무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카피라도 할 것도 없었습니다. 읽어도 이해 안 되는 기술 관련 용어들이 대부분이었던 브로슈어들과 신문 기사를 읽고 또 읽으며 그 내용을 압축하고 요약을 하는 일이었니까요 4년 내내 작품을 읽고 감상문을 쓰는 일로 학점을 받아온 문과대생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나, 문제는 맞춤법과 띄어쓰기였습니다. 언제나 최종 시안을 손수 컨펌하는 사장은 매번 저를 불러, 사무실이 떠나갈 듯이 큰 소리로 좋은 대학 나와도 이런 걸 틀리냐며 비웃음 썩은 기분 나쁜 말투로 혼을 냈습니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사장실을 나오는 저에게, 부장은 손때 뭍은 모서리가 너덜너덜 한 국어사전을 건네면서 말했죠. 여기 맨 뒷챕터를 보면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관련된 내용이 있으니 참고하라고 했습니다. 그 후부터 저는 원고지를 사다가 한 줄 한 줄 사전을 뒤저가며 카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개인용 피씨도 없고 컴퓨터가 알아서 교정을 해주던 시대가 아니었으니까요
이 회사에는 두 명의 부장급 디자이너와 두 명의 대리급 디자이너가 각각 페어가 되어 한 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유일한 카피라이터인 저는 양 팀의 카피를 전담해야 했으며 각종 자료 찾기를 비롯해서, 외출이 잣은 사장님에게 결려오는 전화를 받고 메모를 남기고, 간간히 사모의 은행 심부름을 갔습니다. 다행히 카피 쓰는 일은 열 페이지가 넘는 브로슈어를 제외하고 그렇게 어렵지 않았고, 초보인 점을 감안해서 기존 카피들을 적절히 활용해서 러프 시안 작업을 해 주었고, 그것을 토대로 요리조리 고쳐 쓰는 일은 생각보다 재밌었습니다. 솔직히 카피 쓰는 일보다 사장님에게 걸려오는 두서없는 전화 메모를 전달하는 일이 더 신경이 쓰였습니다. 성격이 급한 사장은 누가 언제 왜 전화를 했는지가 즉각 파악이 되어야 했으며, 통화 중이더라고 급하고 중요한 전화라고 판단되면 자신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알려야 했습니다. 엄연히 이 일은 사장의 비서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경리 겸 비서 엄무를 하던 고졸 여사원이 있었으나 매번 사장의 불호령과 사모의 잔소리에 석 달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고 했죠. 그래서 당분간 공석으로 비워두기로 했는데 얼떨결에 제가 그 업무까지 떠안은 셈이 된 것이지요. 저에게 살갑게 굴던 사모의 입김이 사장에게 작용한 듯했습니다. ‘ 제법 똘똘해 보이니 이것저것 두루시키자 ‘ 이런 내용이 아니었을까 … 순전히 저의 추측이지만 도요.
입사 후 두 달이 다 되어가자 저는 서서히 업무와 잡무에 두루 익숙해졌고, 선배들과도 제법 가까워졌죠. 지방의 전문대학을 졸업한 두 살 터울의 영선 언니는 언제나 조용하고 매사에 차분했으며, 이른 출근을 해 저와 함께 바닥 청소를 했습니다. 웃는 얼굴보다 인상 쓰는 얼굴이 일상인 사장이 유일하게 모두에게 저녁을 사주며 부드러워지는 날이 있었습니다. 영선 언니의 말에 의하면 사장에게 가장 많은 돈을 남겨주는 POP 제작 작업을 직원들이 대신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매대에 세우거나 흔들거리는 홍보물들을, 차가운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주저앉아 밤새 손으로 붙이고 낚싯줄을 끼우고 완성물을 비닐봉지에 담아 박스에 넣은 일, 당연히 외주 업체에 용역을 주어야 할 그 일을, 저녁 한 끼를 얻어먹고 몇 안 되는 직원들이 다음 날 새벽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날 다 끝내지 못하면 잠깐 들어가서 눈을 붙이고 오후에 출근을 해 본연의 업무를 마무리하고, 또 맵고 짠 김찌찌개와 질긴 제육볶음을 저녁으로 얻어먹고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추가 업무 수당은 없었습니다. 아직 대학생이었던 저는 추가 업무 수당이란 게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지도 못했지만, 나머지 직원들은 알아도 사장에게 요구할 수 없었으며, 월급날 알아서 쳐준다는 사모의 무책임한 말을 매번 들어야 했죠. 뿐만 아니라, 사모는 학력 차별이 심했는데, 고졸인 여사원들이 면접을 보러 올 때마다 못 배운 티가 난다는 말을 했고, 대졸 인 제가 자신의 잔심부름을 하는 것을 은근슬쩍 흐뭇해했습니다. 무슨 일이 그렇게도 많은 지 늘 하루가 너무 짧았고, 지하철 막차 시간까지 야근하는 날이 대부분이었으며, 주말은 가끔 징검다리로 쉬었습니다. 처음으로 얼굴에 붉은 뾰루지가 났고 무엇을 먹든 소화가 잘 되지 않고 자주 출퇴근 길의 지하철 속에서 헛 구역질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네고 에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