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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반 컵 20화

과거사 2

by anego emi

박상영 작가의 소설 속에는 주인공 남혁을 지독하게 괴롭히던 여자 사수가 나옵니다. 저는 그녀를 묘사하는 대목에서 까맣게 잊고 살던 누군가의 이름이 반짝하고 떠올랐습니다. 김효선 과장… 늦가을 어느 날, 사장은 전체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최근 실적이 부실한 회사를 위해 유능한 인재를 영입했다고 했죠. 날카롭고 매서운 두 눈이 레이저를 쏘며 두 팀장들을 향했습니다. 모 여성 속옷 회사에서 마케팅과 홍보를 담당했다는 그녀는, 우리 회사에서 처음 만드는 기획 팀의 수장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생각했답니다. '팀원도 없는데 혼자서 기획 부서를? 여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부서도 다르니까 뭐….'


그녀는 출근과 동시에 신규 클라이언트 개발을 위한 기획서 준비에 열을 올렸습니다. 그녀는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앉아 빨간색 매니큐어를 바른 하얀 손가락 사이에 젓가락 같은 아트 팬을 끼우고, 책상 위의 빈 A4 용지를 뚫어져라 처다 보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쓱쓱 몇 줄 끄적이더니, 그것을 들고 사장실로 가 한참을 떠들어 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사장은 우렁찬 목소리로 사장실로 저를 불러, 그녀의 기획서 쓰는 작업을 도와야 한다고 했죠. 사장의 말에 이어 그녀가 웃음끼 없는 건조한 얼굴로 무표정한 저를 빤히 올려다보며 말했습니다. “ 신입이라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카피도 기획이야… 나를 사수라고 생각하면 더 좋고 ”


그다음 날부터 그녀는 저에게 각종 자료들을 백업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자료들이라고 해봐야 유사한 업종의 광고물과 브로슈어 등인데, 이런 걸 제가 어디서 구해야 하는지 막막했습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었거든요. 저는 선배들이 알려준 대로 명동 바닥의 매장을 돌며 손님으로 위장한 채 브로슈어들을 모으고, 심지어 일면식도 없는 학교 선배들이 근무하는 광고회사로 무작정 찾아가 자료를 구걸했습니다. 막 12월 초로 접어들 무렵이었기에 하루 종일 추위와 배고픔을 참아내며 외근 아닌 외근을 하고, 시간에 쫓기듯 사무실로 돌아와 자료 정리를 하고, 카피를 목놓아 기다리는 디자이너 선배들을 위해 쉴틈도 없이 카피를 써내야 했습니다.


그녀는 제가 자료를 정리해서 넘길 때까지 줄곧 패션 잡지를 뒤적이다가, 사장의 호출을 받고 사장실로 들어가 한참을 쑥덕거리다가 나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녁 7시가 되면 광고주와의 저녁 약속을 핑계 삼거나 남편이 픽업을 왔다며 서둘러 퇴근을 했죠. 그녀는 가방을 챙겨나가면서 저를 힐뜻 보며 말했습니다. “ 자료 정리한 거 책상에 올려두고… 관련 자료 좀 더 모아 봐… 솔직히 쓸만한 게 없다 ” 그 순간, 저는 헉하는 소리와 함께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자신의 일을 저렇게 당당히 떠 맡길 수 있을까, 심지어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조차도 없었거든요. 그런 나를 빤히 보던 영선 언니는 제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죠. “ 오늘은 일단 자료 정리만 대충 해. 나가서 맥주라도 한잔 하자. 내가 쏠게.”


저는 회사 근처 맥주 집에서 살얼름이 살짝 언 맥주잔에 넘치도록 따른 생맥주를 크게 한 모금 넘기고 '탁' 소리가 나도록 맥주잔을 거칠게 내려놓았습니다. 그날 언니에게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그녀는 이 바닥에서 악명 높기로 유명했죠. 팀원들을 쪼아 실적을 내고 그 공을 당당하게 가로채고, 윗사람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그녀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고속 승진을 했고, 우리 사장에게 하청을 주던 그녀는 관련 부서의 홍보물을 모두 몰아주는 조건으로 리베이트를 받아왔고, 그것이 들통이나 우리 회사로 갑자기 오게 된 것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문제삼은 부서장이 다른 부서로 이동하면 다시 복귀한다는 소문도 자자하다고 했죠. 그러니 그녀 입장에서 그동안 여왕개미인 그녀의 일을 대신할 일개미가 필요했고 그 일개미가 제가 된 셈입니다. 저는 그다음 날도 찍소리도 못하고 발을 동동 그르며 배고픔과 추위를 참아내며 자료를 구해다 그녀에게 날랐고, 그녀가 종이 위에 휘갈겨 놓은 짧은 단문과 단어 따위에 살을 붙여서 기획서 초안을 완성했습니다. 솔직히, 제가 쓴 것이 아니라 자료를 구걸하다가 알게 된 모 유명 광고회사의 기획팀 선배가 저를 측은하게 여겨 대부분 써 준 것이었습니다 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에게는 일도 아니었으며 불쌍한 어린양에게 같은 학교 선배로써 통 크게 은혜를 베픈 것이지요.


기획서 덕분인지 사장의 로비 덕분이지 알 수는 없지만 제법 큰 예산의 프로젝트를 우리 회사가 맡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사장실에서 박장대소에 가까운 웃음꽃이 피어났고, 그녀는 더 꼿꼿하고 더 당당하게 이것저것 자신의 일을 저에게 떠넘겼습니다. 아울러, 자주 제작팀을 패싱하고 최종 시안을 사장과 둘이서 결정했고, 팀장들이 항의를 하면 콧웃음을 치며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발뺌을 하며 모두 사장의 뜻이라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광고주에게 컴플레인이 들어오면 디자인과 카피 탓을 했습니다.


어느 날 저를 제외한 제작팀 모두가 출근을 하지 않았습니다. 사장에게 그녀의 독선적인 횡포를 개선해 달라고 보이콧을 한 것이지요. 선배들은 저에게는 일부러 침묵한 듯했습니다. 답답하고 참담한 마음을 억누르며 책상 앞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저에게,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전해 듣고 부랴부랴 출근을 한 사모가 말했습니다. “ 어이고… 김 과장 말로는 실력도 별로 라도 하던데 떼로 모여 회사를 안 나오면 뭐 일이 안될까 봐? 김 과장이 벌써 실력 좋은 애들로 구해 놓았다더니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피가 거꾸로 쏟는 듯했습니다.


결국, 두 팀장중 한 사람만 회사에 남기로 결정을 했고, 나머지는 모두 퇴사를 했습니다. 며칠 후 저는 사장실로 가서 사직서를 내밀었습니다. 사장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저에게 물었죠. “ 아니, 김 카피는 왜 그만두려는 건데? 경력도 없는 걸 뽑아서 이만큼 키워놨는데… 참 네, 뭐가 불만이야? ” 저는 크게 숨을 한번 내쉬고 떨리지만 날이 선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 이렇게 부당하고 사이코 같은 회사에서는 더 이상 저의 능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잘 먹고 잘 사십시오 ” 밑도 끝도 없는 당돌한 제 말에 충격을 받은 건지 반쯤 입을 벌린 채 눈만 깜빡이는 사장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사장실을 나와 챙겨놓은 짐과 가방을 들고 미련 없이 회사를 나왔습니다. 속이 시원하다 못해 통쾌했습니다. 20대의 치가 어린 후배가 선배들을 대신해 복수를 해 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곳에서 근무했던 8개월은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겪는 사회생활의 독하고 역한 맛이었습니다. 그 덕분인지 회사를 옮겨가며 저는 점점 독해졌고, 저도 모르게 그때 들러붙은 생존본능과 절박함은, 동기들과 후배들의 질투와 원성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가끔 저를 누군가의 오른팔 운운하며 치켜세울 때면 그녀 생각이 났습니다. 저 또한 어쩌면 또 다른 누군가의 눈에서는 그때의 그녀와 같이 비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거든요. 소설의 말미에 주인공 남혁이 그때를 회고하면 써놓은 문장처럼 말이죠.‘ 어떤 종류의 이해는 실패하고 나서야 비로소, 삶의 자세로 남기도 한다. 내게는 그 시절이 그랬다. ’ 제게도 그 시절이 그랬습니다. 아무도 그 속을 몰랐지만 그 속을 알고 나니 제 모습이 보였거든요. (아네고 에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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