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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랑 Feb 14. 2023

#34_녹내장

녹내장에 걸렸다. 아니 그렇다고 한다.

꽤나 심하다고 한다.

암처럼 1기에서 4기가 나뉘어 있는 것도 처음 알았다.


별다른 증상이 있어서 간 것도 아니었다. 안과를 간 지 오래되었고 문득 시력검사를 한 번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꼼꼼하지만 야단스럽지 않은, 내가 믿고 가는 몇 안 되는 병원에 갔다. 통상적인 그렇고 그런 검사들, 빨간 불빛과 연두색 불빛을 여러 번 본 다음 의사 선생님이 나를 불렀고 검사를 좀 더 해보자고 했다. 지금껏 어떤 치료를 해야 한다느니 어디가 안 좋을 수 있다느니 쓸데없는 소리를 절대로 하지 않던 선생님이 표정까지 어두워지는 것을 보니 오랜만에 겁이 났다. 30분인지 1시간인지 또다시 여러 색깔의 불빛과 갖가지 빛의 무리들을 본 후 다시 의사 선생님 앞에 앉았다. 처음 보는 내 눈 사진을 보며 이 부분이 이렇고, 저 부분은 어떻고 설명을 들었다. 왼쪽 눈에 녹내장이, 의심할 바 없이 진행이 되어 있단다. '큰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해 봐야 한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이 그 자리에서 직접 '큰 병원'으로 전화를 걸고 증상을 설명하고 교수님을 직접 정하고 진료예약을 잡아주었다. 


'큰 병원'에 갔다. 익숙하다. 아토피 때문인지 어렸을 때부터 눈을 많이 비볐고, 거기에 시력도 급속도로 나빠져서 각종 검사와 치료에 수술까지 했던 병원이다. 여전히 낮은 높이의 계단과 반 층씩 올라가는 독특한 구조를 가진 병원은 익숙했지만 작아 보였다. 진료한 교수님은 좋은 분이었다.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설명을 들은 후, 바로 정밀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해주셨다. 당일 바로 검사하는 것이 예외적인 듯한 분위기였지만, 교수님과 진료의뢰를 해주신 선생님과 어떤 친분이 있는 듯했다. 


정밀검사는 힘들었다. 수많은 방법으로 몸에서 액체를 뽑아봤고 다양한 부위를 찌르고 긋는 경험이 있어 언제나 검사는 익숙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불빛과 갖가지 검사용액과 처음 보는 십 수 가지 장비들에 끌려다니니 눈알이 빠질 듯했고 두통에 어지러웠다. 녹내장이 있던지 암에 걸리던지 그저 잠이나 자고 싶었다.


멍한 상태로 대기실에 퍼져 있다가 이름이 불리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교수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왼쪽 눈에 녹내장이 상당히 많이 진행이 되어 있는 상태라고, 3기에 해당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녹내장의 원인인 안압을 높이는 것에 스테로이드가 직접적이라는 설명을 떠올리고 교수님께 나의 아토피를 끄집어냈다. 꽤나 설득력 있는 추론이라고 하셨다. 그래도 다른 원인을 배제할 수 없으니 약을 써 보자고, 얼마 후 다시 보기로 했다. 


어렸을 때부터 시력검사를 할 때 항상 왼쪽의 시야가 좋지 않았다. 나쁜 시력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살아왔다. 고등학교 때나 성인이 되어서도 오른쪽 눈을 가리면 왼쪽 눈은 언제나 시큼한 느낌과 함께 답답했다. 유치원, 초등학교 시절 다녔던 병원들에서 받은 스테로이드 연고가 기억난다. 세브란스 병원 약제실에서 D라고 쓰인, 어른 손바닥만 한 너비와 초코파이 두께보다 두꺼운 통에 가득 담긴 연고를 세 개씩, 네 개씩 받아 왔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TV 속 연예인들, 가까운 친구들 중에도 피부가 좋은 이들을 보면 이유 없이 짜증과 화가 치민다. 분노가 이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꿈을 꾸었다. 이 날이 조만간 올까, 아침에 눈을 떠도 그대로일까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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