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루시현 Nov 10. 2020

새벽 두 시, 훌쩍거리던 그 엄마의 사정

차마 버리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

빈 틈 없이 옷이 가득 들어찬 서랍장이 무너졌다. 작아진 아이들 옷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던 공간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내려앉아버린 거다. 아이들을 재우기 위해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그 캐캐 묵은 옷들을 드디어 비로소 버리겠노라 다짐했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밤 10시. 5리터짜리 쓰레기봉투와 상자를 나란히 펼쳐 놓고, 구석구석 잘도 구겨 넣어 놓았던 옷들을 모두 바닥으로 끄집어냈다. 버릴 것은 쓰레기봉투로, 누군가에게 물려 줄 것은 상자에 나눠 빠르게 처리해버릴 생각이었다. 비장한 마음으로 팔을 걷어붙였다. 천천히 해도 두 시간이면 끝나겠지. 빨리 해치우고 와인 마시면서 넥플릭스 볼 생각이었다.


만 34년을 함께 산 나 자신을, 나는 아직도 한참 모르나 보다. 2시간은커녕, 시계는 4시간이 훌쩍 지난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 옆엔 코 푼 휴지까지 뒹굴거리는 상황. 기어 다닐 때 입던 우주복부터 깜찍한 원피스, 심지어 배냇저고리까지 뭐 하나 버릴 수도 누굴 줄 수도 없는 갈 곳 잃은 옷들을 애매하게 쌓아놓다가 추억에 잠겨 훌쩍이고 있었던 거다. 내가 이렇게 감성적인 사람이었던가.


색 바랜 옷은 옷 저마다 사연이 있었다처음 뒤집기를 했을 때 입었던 우주복, 걸음마를 떼고 외출의 재미를 느낄 무렵 자주 입던 원피스, 친구가 조리원으로 찾아와 선물해준 내복, 미국 사이트에 후기까지 꼼꼼히 살펴보며 며칠 밤을 고민하다가 ‘직구’한 외투 등등. 어두운 옷장 속에 처박혀 있던 옷들이 빛을 봤을 때 내가 잊고 있던 ‘그 시절’의 나까지 빛을 보고 나와 감성에 푹 젖었다 게다가 새벽 2시였으니.



버려야 하지만 버리지 못하는 것을 미련이라고 하던가..

미련 (未練)[미ː련]
깨끗이 잊지 못하고 끌리는 데가 남아 있는 마음

사실 연년생 자매가 어릴 때에는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 버거워 감성에 젖을 시간도 에너지도 없었다. 그래서 고백하건대, 둘째의 첫 뒤집기도 첫걸음마도 사실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힘든 줄도 모르고 연년생을 혼자 힘으로 키우기 위해 낑낑댔던 것 같다. 하루종일 먹이고 재우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다시 재우고 나서 한끼도 먹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던 날도 자주 있었다. 일찍 엄마가 된 바람에 조언을 구할 친구도 없었고 한창 일할 직책이었던 남편은 매일 야근의 연속이었다. 평생 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학교를 다니고 취직을 하고, 친구들과 주말을 보내던 내가 갑자기 엄마가 됐다. 갑자기 나타난 작고 약한 아가는 자주 울었고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것은 내 몫이었다. 작은 아이와 더 작은 아이가 나란히 누워 나만 바라보았다. 안았다가 눕혔다가 먹였다가 다시 안았다를 반복했다. 아이들이 둘다 잠든 시간에는 내일 먹일 이유식을 만들고 난장판이 된 집안을 정리했다. 갑작스럽게 닥친 엄마의 역할을 나 홀로 해내야 했다. 해가 잘 들지 않은 낡은 나 홀로 아파트 3층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아이들 둘을 데리고 말 그대로 육아 전쟁을 치르던 시절이었다.  


지나고 나니까 그 당시 동동거리며 엄마 역할을 해낸 나 자신이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아직도 아이들과 한시간 외출하기 위해 준비도 한시간 걸리고, 아이들의 행동이 명확하게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지만 몇년 동안의 경험을 통해 어느정도 엄마의 역할에 익숙해졌다. 울어도 당황하지 않고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준비물도 챙길 줄 아는 여유가 생겼다. 무슨 일이 생겨도 침착하게 일을 해결할 수 있고 아이들의 짜증을 참고 기다려줄 수 있는 인내심도 생겼다. 그 사이에 남편도 일이 자리를 잡아서 육아에 능숙하게 참여한다. 육아와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가정적인 남편 덕분에 나는 하고 싶은 공부도 하고 주말이면 나도 친구들과 시간을 보낸다. 그만 뒀던 일도 조금씩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물질적 정신적으로 더욱 여유로워지고 능숙해진 지금, 아기 옷을 꺼내보다가 고군분투하던 과거의 초보 엄마 시절을 마주하니 당시에 흘리지 못했던 눈물과 감정이 쏟아져 내린 듯하다. 한바탕 감정을 쏟아낸 후에야 나는 옷들을 계획대로 싹 처분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한결 후련해진 마음으로 잠들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뿌듯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 나 이렇게 조금씩 성장하고 있구나. 

이전 10화 엄마한테 나는 항상 아기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