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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현 Jun 03. 2021

엄마한테 나는 항상 아기지?

강한 엄마를 만들기 위해 아기는 나약하게 태어난다

“엄마 나 요기 다쳤어” 손가락을 하나 들고 미간을 찌푸린 아이가 총총 거리며 뛰어온다. 난 어디 보자 하면서 고사리 같은 손을 요리조리 들여다본다. 손톱 사이에 꼬질꼬질 낀 색연필 조각만 보일 뿐 멀쩡하다. 역시 엄살이다. 작은 손가락과 심각한 아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모른 척할 수는 없겠다 싶어서 “호~~” 불어주고 뽀뽀를 해줬다. 캐릭터 밴드도 하나 꺼내 붙여줬다. “아무래도 엄마가 안아줘야겠어 나 걸을 수가 없겠어” 원인을 알 수 없는 손가락 병이 다리까지 옮았나 보다. 아이를 아기처럼 번쩍 안고 둥가 둥가 해줬더니 씩 웃으며 웅애 웅애 하며 아기 짓을 한다.


나; “우리 아가가 한 살인가 두 살인가?”
딸; (갑자기 민망해져서) “나 네 살인데... 헤헤”
나; “그럼 언니 아니야? 응애응애 하는 아가인 거 같은데”
딸; “언니 맞아.... 음 언니가 맞긴 하는데... 엄마한테 나는 항상 아가잖아”


나이에 한창 민감한 아이에게 장난으로 던진 말에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그래 넌 나한테 항상 아가야.  4살이 아니라 40살이 되어도 그렇겠지. 서른다섯인 내가 엄마 앞에선 아기가 되는 것처럼.



해외에서 떨어져 살다가 다음 달이면 오랜만에 엄마를 만난다. 며칠 전부터 엄마 나 간장게장 먹고 싶다며 징징거리고, 밤에 뜬금없이 전화해서 엄마 한국 가면 나랑 순댓국 먹으러 가자.라고 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혼자 있으면 아침에 벌떡 일어나 아이들 아침밥을 챙기고 집안일을 시작하는 내가 왜 집에만 가면 못 일어나겠다고 이불을 몸에 감고 뒹굴뒹굴하는 건지. 남들한테는 세상 친절하게 굴면서 엄마한테는 말도 안 되는 짜증을 부리는 건지. 왜 엄마 앞에선 약해지는지. 엄마는 항상 강하다는 생각 때문에 기대고 싶고 의지하고 싶고 어리광부리고 싶어지는 것 같다. 


그러던 엄마가 1년 전,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엄마의 항암 과정을 지켜보면서 엄마의 고통을 나눠 갖기를 간절히 바랬다. 수술을 하고 일주일간 입원을 했는데 내가 보호자로 들어갔다. 나는 입원 내내 엄마를 기쁘게 하기 위해 쉼 없이 재잘거렸다. 엄마의 입을 닦아주고 이불을 덮어주면서 엄마의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엄마의 입원, 수술 기간 동안 나는 울지 않았다. 강하게 변한 내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점점 엄마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사실은 강한 것이 아니라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거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인간은 가장 진화된 동물이지만 나약하게 알몸으로 태어나서 몇 년간은 다른 사람의 보살핌이 필요하다. 태어나고 며칠 뒤면 서고 걷고 하는 다른 포유류와 다르게 말이다. ‘신이 개인을 자세히 돌볼 수 없어서 엄마라는 존재를 만들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반대로 ‘엄마라는 존재를 만들기 위해 약한 아기를 만든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어른이 된 딸은 그제서야 나를 키워준 강한 엄마가 사실은 나와 같은 약한 존재였음을 깨닫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죽고 엄마도 죽는다. 엄마의 투병 이후, 그 전엔 상상 조차 할 수 없던 엄마의 죽음을 가슴 속에 품고 살지만 아직 그것을 꺼내서 생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엄마 앞에서 어리광을 부리고 아기짓을 한다. 강한 엄마가 약한 존재가 되면 내가 상상 조차 하기 싫은 엄마의 죽음에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어서다.  그리고 아기가 되어 어리광을 부리고 심지어 등짝 스매싱 몇 번 맞고 난 후에는 다시 어른으로 살아갈 힘이 생긴다. 내 딸들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 속에서 나도 아이들이 한껏 어리광 부릴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주고 싶다. 모녀관계는 왜 이렇게 그 존재만으로도 마음이 시린 걸까. 엄마가 갑자기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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