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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현 Nov 25. 2021

“엄마는 커서 뭐가 된 거야?”

전업주부의 자존감에 관하여

“엄마는 커서 뭐가 된 거야?”
악의도 의미도 없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눈동자를 반짝이며, 딸이 물었다.

“엄마는…. 엄마가 됐지”

그날 나는 우울했다. 꿈 많고 욕심 많던 나는 결국 지금 그저, 엄마가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지? 만약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후회도 했다가 자책도 하면서 밤이 깊어갔다.


사실 ‘그냥 엄마’로 사는 일은 자주 자존감을 시험에 들게 한다. 아이의 낮잠시간 식사 시간에 따라 내 일정이 바뀌고 사실 내 일정이랄 것도 없이 아이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하루하루가 반복되기 때문이다 핏덩이를 사람으로 만드는 전쟁 속에서 중심을 잡고 나에게 집중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아이를 위한 아이에 의한 아이의 하루를 온전히 보내고 녹초가 되어 잠이 들면 또다시 같은 하루가 반복되는 삶. 그런 내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상사와의 마찰을 토로하는 친구를 보며 ‘나는 어른과의 대화를 언제 해봤더라’ 생각하고 그 친구가 내심 부러웠다. 그리고 이제 싸우는 것 조차 부러워질 지경에 이르렀나 싶어 더 초라해졌다


나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경단녀의 서러움. 영화 ‘82년생 김지영’ 중에서 캡쳐.

하루는 전 직장 입사동기를 만났다. 신입사원 시절 서러움을 공유하던 동료에겐 어엿한 직장인 포스가 흘렀다. “그때 기억나? 우리 정말 재밌었는데” 하는 나에게 그는 “그땐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이라며 지금 본인이 후배들을 지도하느라 얼마나 힘이 드는지, 현재 얼마나 그럴듯한 지위를 갖고 얼마나 어려운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지 푸념이자 본인 자랑을 늘어놓았다. 일을 그만둔 나에게 업계 전문용어는 외계어 같아서 지금의 날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고작 수유 텀이라든지 이유식을 언제 시작해야하는를 두고 세상 심각하던 내가 민망해졌다. 무엇보다 힘든 건 눈빛이었다. 소재가 바닥나고 할 말을 찾다가 결국 “아이들은 잘 크지?” 하는 그 눈빛이 거슬렸다. 눈빛 속에서 안쓰러움 같은걸 느꼈던 것 같다. 동료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눈빛. 그 무게에 쪼그라들던 내 존재는 작아지다가 세상에 먼지보다 쓸모없이 느껴졌다.


나는 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자격지심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대화를 비틀어 생각하고 눈빛을 아니꼽게 생각하는 못난 나. 내가 나를 보는 생각이 뒤틀린 만큼 세상을 보는 시선도 뒤틀려 있었다.


“엄마는 커서 뭐가 될 거야?”
“엄마는 이미 컸어”

“아니 더 크면 뭐가 될 거냐고! 할머니처럼 선생님처럼 크면, 거의 100살 정도가 되면 말이야”

며칠 , 아이와 대화를 나누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올뻔했다. 아무도 묻지 않았던 나의 미래를 당연한  물어봐준 너의 천진함에, 당연히 장래희망이 있을 거라는  확신에  순수함에, 맞다 아직  끝난  아니지 라는 위로를 받은  같다.


“엄마 그러면 엄마는 달리기를 잘하니까 마라톤 선수가 되는 거 어때? 아니면 엄마는 피아노 선수가 될래? 그럼 내가 발레리나가 돼서 춤을 출게. 아니다 내가 공주가 되면 엄마는 여왕 해”


나는 아이와 미래를 맘껏 상상하며 장래희망을 꿈꿨다. 아이와 나란히 누워서 깔깔 웃으며 미래를 떠 올리다 보니 하늘도 날고 변신도 하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자격지심이 낳은 눈빛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거 그만하고 아이의 투명한 눈빛으로 장래희망을 고민하는 삶을 살아봐야겠다. 무엇보다 내 옆에 네가 있으니 난 세상 무서울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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