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개똥밭 Oct 14. 2020

15화. 폴링다운 그리고 언힌지드

양극화는 심화되고 분노는 임계점에 이르다.

며칠 전, 딸을 목적지에 데려다주고 인근에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 계획에 없던 영화를 보게 되었다. 영화는 얼마 전 예고편으로 접했던 '러셀 크로우'의 'Unhinged'.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는 러셀 크로우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는 것과 영화의 주요 내용이 '보복운전'이라는 정도였다. 사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보복운전'을 주제로 한 영화가 교통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 나왔는 것이 - 뒷 트렁크에 야구방망이는 필수라는 러시아도 아니고 - 좀 의외였고 '보복운전'이라는 어찌 보면 단순한 사건을 주제로 어떻게 스토리를 전개할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일단 이 글은 영화를 평하려 쓰는 것이 아닌 만큼 영화의 완성도나 배우 연기력, 연출력 등은 논하지 않겠다.

극 초반 그의 감정에 공감하는 내가 무서웠다.

 난 이 영화가 도입부에 떡밥으로 던진 미국의 부정적인 사회 상황에 매우 관심이 쏠렸다. 영화는 도입부에 미국에서 심화되고 있는 부의 양극화로 인한 중산층의 몰락과 빈곤층 양산, 그로 인해 소외된 사람들 사이에 만연된 스트레스와 분노를 각종 통계 숫자가 인용된 지면 기사와 사건, 사고 뉴스 영상을 현란하고 자극적인 편집으로 보여주며 이로 촉발된 '보복운전, 난폭운전' 사건이 미국에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도입부 말미 영화 속 뉴스의 앵커의 대단히 자극적인 멘트는 이 영화 속 사건의 동기와 앞으로 영화 내용의 전개가 어떠할지 암시했다.


 "우리 사회에 파멸의 경고등이 켜졌다."


지금 봐도 선동적이다. 아니 어쩌면 무한 경쟁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한 이 선동은 계속될 것 같다.

영화를 다 보고 나왔을 때 난 1997년 개봉되었던 'Falling Down'이 떠 올랐다. 마이클 더글라스 주연의 'Falling Down'은 당시 작품성과 흥행 모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인 비하'로 약간의 해프닝이 있었다. ) 그런데 이 영화와 'Unhinged'의 극 설정이 서로 대단히 유사했다.


두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잘 다니던 직장에서 정리 해고되었다. 중년 남성이 수십 년 다니던 직장에서 잘리면 그는 산송장이 된다. 그가 쌓았던 모든 커리어(경력)는 순식간에 롤플레잉 게임처럼 최초 레벨로 리셋되고 그동안 자신의 직급에서 받았던 '존중과 존경'은 아침 이슬처럼 부질없이 사라진다. 결국은 다른 업종에서 낯선 업무를 사회 초년생 취급받으며 해야 한다.

'언힌지드'에서 러셀 크로우가 맡았던 '낯선 남자'(아! 그러고 보니 이 배역은 이름조차 없었다.)는 극 중 격렬하게 분노를 표출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난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이 사회는 날 유령 취급했어!!"

폴링다운의 'D-Fens'(아하~ 폴링다운의 주인공도 이름이 없다. D-Fens는 그의 차 뒤 번호판에 쓰인 차량 등록명이다.)는 영화 종국에 이렇게 이야기한다.

"(난) 어쩌다 이렇게 됐지? 난 뭐든 시키는 대로 했소."


그러니 어떠하겠는가? 위계의 피라미드에서 그래도 비교적 상단에 있던 자신의 지위가 피라미드 맨 아래로 떨어진 상황에 멘탈이 붕괴되던 중 아내는 그동안의 노력은 몰라주고 당장의 생계 위협에 남편을 위협한다. 그러니 다음 단계는 '이혼'이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은 둘 다 이혼당한 상태였다. 이혼은 부모의 죽음만큼 큰 스트레스라고 한다. 실직에 이혼... 이 정도면 어느 누구든 간에 그 사람이 인고의 세월 동안 쌓아온 모든 것을 상실했다고 보면 된다. 아마 차라리 불치병이라도 걸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진짜다.


역시 명배우들이다. 마이클 더글라스와 러셀 크로우의 표정을 보라! 추락하고 혼란에 빠진 그들의 표정이 압권이다.

그래서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심리학의 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회에서 밀려나 모든 구성원으로부터 완전히 무시를 당하는 것보다 더 잔인한 벌은 생각해낼 수 없을 것이다. (중략) 모든 사람이 죽은 사람 취급을 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물건을 상대하듯 한다면, 오래지 않아 울화와 무력한 절망감을 견디지 못해 차라리 잔인한 고문을 당하는 쪽이 낫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이 글은 직전의 글 '늑대는 홀로 살 수 없다'와 일맥을 같이 한다. 우리는 홀로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임에도 호랑이처럼 세상의 모든 '놈'들과 경쟁하며 홀로 살아라 하니 사람들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권력과 부를 소유한 자들은 자신들만의 '리그'를 만들고 우리 같은 평범한 시민들을 '자본주의 효율'이라는 명분으로 무한 경쟁 속에 집어넣고 소모시키며 자신들의 리그에 끼어들지 못하게 한다. 그것도 모르는 우리들은 미끼로 남긴 몇 개 의 사다리에 서로 오르기 위해 위에 있는 자의 바짓단을 잡아당기고 밑에 있는 자의 머리 걷어차고 손등을 밟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 자연에서 우리 인간만큼의 대규모의 사회를 구축한 생명체인 개미들은 자연이 입력한 본능에 따라 움직이겠지만 자연은 이 따위 저열한 짓거리를 하도록 프로그래밍하지는 않았다. 왜? 자연은 인간과 개미같이 대규모의 집단을 구축한 생명체가 멸망하지 않고 존속하려면 '배려와 협력'이 필수 임을 수십억 년의 시행착오 속에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미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그 자연의 조언을 오만방자하게 거부하고 멍청한 행동을 하고 있다.


'언힌지드'를 봤던 날, 이 날은 우리 딸의 대입 수시 실기 시험이 있던 날이었다. 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내 딸은 하루에 수십 시간을 투자하고 일 년을 꼬박 준비하여 그날 하루 자신의 모든 걸 걸었다. 그리고 그날 다른 젊은이들도 내 딸과 같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날 나와 같은 부모 수백 명은 애지중지하는 자식을 차에 태워 수십대 일의 경쟁에서 살아남길 바라며 기도하며 6,7시간을 주변에서 대기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좌절을 맛볼 것이고 몇몇은 살아 남아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할 것이다. 그리고 통과한 이들 중 몇몇은 두 번째 관문인 취업에 실패할 것이며 몇몇은 살아 남아 통과할 것이다. 그리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몇몇이 적자생존 게임의 최종 승리자로 뿌듯해할 즈음, 어느 날 수십 년 쌓아 올린 자신의 성과가 최초 상태로 '리셋'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중 극소수 몇몇은 '폴링다운'이나 '언힌지드'가 될지도 모른다. 




1997년 '폴링다운'이 개봉되고 23년이 흐른 2020년의 '언힌지드'에 표현된 미국 사회는 23년 전 '폴링다운'때와 딱히 달라진 게 없었다. 아니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된듯한 분위기다. 폴링다운의 D-Fens는 자신의 분노를 나름의 기준으로 선택한 '악당'에게 표출했지만 언힌지드의 '낯선사람'은 자신과 같이 세파에 시달리는 평범한 사람에게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2019년,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가 개봉하자 미국 당국이 긴장했다는 기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본다. 이게 무슨 소리인지 궁금하면 '조커'에 관한 기사를 검색해 보길 바란다. 


그리고 이제 우리를 돌이켜 보자... 우리 '대한민국'은 과연 미국보다 건강한 사회일까? 이제라도 우리는 '경쟁과 발전'보다는 '배려와 협력'을 교육하고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더 늦기 전에 말이다.

이전 07화 14화. 늑대는 홀로 살수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