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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인표 Oct 07. 2024

너는 모른다,


"너 캐나다 가면 영국식 영어 배워 오겠다."

"아 그래? 너무 좋은데?"

미국에서 어학연수를 마치고 온 친구가 말했다.


1년 후, 난 그냥 서울 말투를 쓰는 한국식 영어를 배우고 왔다. 한국인은 대부분 비슷한 억양으로 영어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리고 확실한 건 캐나다는 브리티시 영어를 쓰지 않는다.


요즘 나의 최애가 영국인이라 그의 말을 알아듣고 싶어 러닝을 할 때 오디오를 무한 반복하고 있다. 매일 10km를 뛰면서 한 시간 내내 듣는데도 안 들리는 단어가 많다. 그리고 듣는 내내 친구가 말했던 '영국식 영어', '캐나다' 두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사실 친구 말이 생각 나는 건지, 캐나다가 생각 나는 건지, 캐나다에 있는 친구가 생각 나는 건지 잘 모르겠다.


_

"사표 냈어."

"캐나다로 와."

집 보증금을 빼서 비행기 티켓을 샀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생각으로 편도만 끊었다.


물론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출국 50분 전에 공항에서 문자를 남겼다.

-한국 가.-


그리고 캐나다에서 쓰던 휴대전화를 공항 쓰레기통에 버렸다. 답장이 왔는지 모르지만, 우린 그 후로 한 번도 연락한 적이 없다.


소울메이트 같은 친구였다.

"저기요. 리빙디자인페어 같이 가실래요? 티켓 있는데."

실습실 앞 복도에서 그 친구가 처음 건넨 말이다. 다급하게 뛰어와 쭈뼛대며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 모습이 왜 웃겼는지 모르지만, 우린 그 장면을 수없이 얘기하고 웃으며 놀려댔다.


4년 먼저 캐나다에서 생활하고 있던 그가 그때 복도에서처럼 먼저 말을 꺼냈다.


"캐나다로 와."

_

친구 주변 사람과 어울려 놀았다. 이민 온 지 5년, 10년 이상 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덕분인지, 때문인지 유학생들과는 다른 생활을 함께했다.


게이 페스티벌, 핼러윈 퍼레이드, 스키장처럼 사람 많고 위험한 곳은 못 가게 했다. 다치면 병원도 갈 수 없을뿐더러 동양인 여성이라 더 위험하다는 이유에서다.


대신 핼러윈엔 꽃다발을 파는 일을 도왔다.

"금잔화 알지? 메리골드. 왜 벽돌로 빻아서 고춧가루라고 소꿉놀이할 때 쓰는 꽃."

"몰라."

"넌 소꿉놀이도 안 해봤어?"

"어. 어렸을 때부터 아빠한테 맞아서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했었잖아."

친구는 지금으로 치면 아동학대를 당한 건데 당시엔 그냥 매 맞는 아이로 치료를 받았다.


"나 그래서 다시는 한국으로 안 돌아가."

"그래."


_

"깻잎이다."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던 날이었다.

"차 세워."

"한국인이니까 알아보지, 아니 저 귀한 게 왜 이런 들판에 있다니."

친구가 잎을 따기 시작했다.

"그냥 뽑아. 우리 아니면 먹을 사람도 없는 나라야. 그들에겐 잡초일 뿐이야."


키가 가슴까지 오는 깻잎 한뿌리를 다듬어 깻잎장아찌를 만들고 시금치 된장찌개를 끓였다.

"스프링롤에 넣어서 도시락 싸줄게. 가지고 가."

어학원에 처음 가던 날처럼 서로 들러붙지 않게 랩으로 싼 스프링롤을 반으로 잘라 도시락을 싸줬다. 그는 한국인 냄새가 안 나는 음식이라며 풀때기와 빵 쪼가리같이 종종 외국영화에서 볼법한 중학생 도시락 같은 걸 챙겨주곤 했다. 친구가 싸준 도시락 뚜껑을 열 때마다 반짝이는 랩을 보면 배실배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놈의 습관, 저놈의 랩.


우린 거의 매일, 호동 오빠의 식당 주방일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모였다. 강호동처럼 생겨서 호동 오빠라 불렀다. 지금도 이름은 모른다. 그는 난민 신청을 하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5년 넘게 살았는데 영어를 한마디도 못한다. 오빠가 지프 중고차를 산 후로는 밤늦게 주유소에 들러 커피를 마시곤 했다. 그날도 주유를 하고 보도블록 위에 다닥다닥 앉아 커피를 마시는데 오빠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오빠, 주유소에서 담배를 피우면 어떡해."

마침 사장이 문을 열고 나오길래 담배를 피워도 되는지 빠르게 물어 양해를 구했다.

다행히 괜찮다고 했는데 우린 거짓말을 했다.

"것봐, 안된다잖아."

"SORRY." 그가 담뱃불을 껐다.

같이 들어놓고 한마디도 못 알아들었다는 사실에 어처구니가 없어 한참을 웃었던 그날, 그 밤의 조명색도 생생하다.


"이 정도로 영어를 못하고, 안 배울 거면 왜 여기서 살아? 한국에서 사고 치고 도망 왔어?"

"아니, 이 나이에 한국 가면 할 게 없으니까. 그런데 난민 신청 거절되면 추방될지도 몰라."


_

당시에 우리나라에는 없던 몰슨 캐네디언 맥주와 팀홀튼 커피가 이미 들어왔을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


핼러윈이 다가오고 날씨가 추워지면 유독 더 생각이 난다. 러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한강 주변이 주황색으로 바뀌면 그날 주유소 앞 공기와 비슷해진다.


요즘 자주 묻곤 한다. 그때의 호동 오빠보다 나이가 더 들었는데 한국에서 할 게 없고, 살 수 없다면 나도 도망치듯 다시 가도 될까.


나와 같은 영어 이름을 쓰는 너는 아직도 캐나다에 있니?


그리고 너는 모른다.

몇 년 전 하이파크 근처 네가 일했던 카페에 들러 한국인 알바생을 수소문했었다는 걸.




사진 출처: Unsplash의 Alexey Mozgo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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