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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 Dec 30. 2021

책에는 곰팡이가 핀다

「효원」 133호

언젠가 종이책은


‘새 술은 새 부대에…’ 새로 담은 술은 새로운 술 주머니에 담아야 한다는 말로, 새 출발을 다짐할 때면 으레 함께 떠올리게 되는 관용구다. 미합중국이 건국되었던 시기, 위의 구호 아래에서 백악관이 지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는 나, 그리고 우리 집에서는 이 말이 조금 다르게 통용되었었다. 어떻게?


‘낡은 책이 새 책장에…‘ 나는 이제까지 꽤 많은 이사를 경험했다. 개중에는 오랜 계획 하에 이뤄진 것도 있었고, 급하게 쫓기는 모양새로 옮겨간 경험도 있다. 보다 넓은 집을 채우기 위해 새 가구들을 사기도 했고, 집이 갑작스럽게 좁아지면서 짐들을 처분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격동을 여러 번 거치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씩씩하게 지켜온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책이다. 책만큼은 사수하고자 하셨던 부모님의 어떠한 의지 때문이었을까, 열 살 터울의 누나가 어릴 적 읽었다던 책들까지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한정판이라서, 버리기에는 아까워서, 혹은 ‘한번쯤은 다시 읽지 않을까’하는 기약 없는 바람을 풍기면서. 그만큼 우리 가족이 책에 각별한 애정을 품고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애정도 생명 보존의 법칙 앞에서는 그 빛을 잃는 법이던가. 내 침대에 붙어있는 책장이 한밤중에 내지른 ‘우지끈‘ 소리는 우리로 하여금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제는 보내줘야 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달까. 책을 처분하기로 마음을 먹자 나머지는 일사천리였다. 중고 책을 매입하는 점포를 찾고, 이제까지 묵혀두었던 수백 권의 책을 한데 모아 정리했다. 가운데가 푹 내려앉은 책장의 모습에 우리의 힘든 결정을 수긍하면서, 중고 책을 판 돈으로 맛있는 거나 사 먹자며 차를 출발시켰다.


그런데 이게 웬일, 기껏 호주머니에 들어온 돈은 기대했던 가격의 반도 되지 않았다. 가져갔던 책들 대부분이 매입을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책 곰팡이가 핀 서적은 거래가 불가능하다는 이유였다. 그제야 우리가 가져갔던 책들이 많이 누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때는 아껴 읽었던 건데…. 더 이상 ‘책’으로써의 시장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책들을 보니 문득 침울한 기분이 들었다. 힘들여 가져왔던 책들을 다시 상자에 담아 나오는 그때의 허탈함이란. 본래 우리가 먹고자 했던 맛있는 것의 스케일이 뷔페에서 핫도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러다 서점 한 모퉁이에 마련된 전자책 판매대를 발견하게 되었다. 컴팩트한 사이즈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말기의 저장용량. 비교적 값싼 권당 가격, 예쁜 디자인까지. 무엇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 보였다. 전자책은 곰팡이가 필 이유도 없겠지. 책장에 오래 앉아있었다고 누렇게 변색되지도 않을 테고. 떠올려보니 요즘은 대중교통만 타도 전자책을 읽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종이책 시장이 어렵다는 말도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 같다. 그렇다면 잠깐. 종이책을 읽을 수 없게 될 날, 그런 날이 언젠가는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것일까?


지금 전자책은


문득 스치는 추억이 있다. 가족끼리 어디론가 향할 때면 매번 차의 맨 뒷좌석을 차지했던 기억. 벌러덩 누워서는 타이어 아래로 스쳐 지나가는 방지턱과 돌길의 흔들림을 느꼈던 기분. 그리고 그때 내 손에 들려있었던 전자사전의 무게감까지. 그 작은 화면으로 나는 책을, 정확히는 해적판 텍스트 파일을 읽고 있었다.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오늘날처럼 엄격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에 그랬나,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보면 판타지 소설을 직접 메모장에 타이핑한 ‘텍본’을 쉽사리 구할 수 있었다. 손바닥만 한 기계에 수십 권의 텍본을 넣고 다니자면 그것만큼 든든한 게 없었다. 읽던 것을 끝내도 곧바로 다음 권을 화면에 불러올 수 있었다. 공간과 부피에 구애받지 않는 독서, 지금의 전자책 시장을 있게 한 시작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전자책은 이제까지 어떤 길을 걸어왔나. 그 태동의 역사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자책의 생애를 들여다보자.


오늘날 전자책이라는 단어는 ‘디지털 형태의 출판물’이라는 뜻을 가진다. 디지털 기기의 화면에 띄워질 수 있는 간행물들과 서적들이 이에 해당한다. 때문에 전자책의 범주는 매우 넓다. 하지만 전자책의 이미지가 처음부터 이렇게 확립되었던 것은 아니다. 전자책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만들어진 때, 즉 전자책에 대한 개념이 막 생겨났을 때에는 그 범위를 ‘종이책을 다시 디지털로 가공한 것’으로 한정했었다. 그러니까 당시의 전자책은 종이책의 주체 아래 존재하는, 이른바 종이책을 보조하는 파생형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자책 자신의 독자적인 존재감을 키워나가고 있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양상이다. 왜 그럴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자책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탄생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전자책에 대한 공상은 1940년대부터 있었다. 당시의 소설이나 영화에서 묘사했던 전자책의 이미지는 굉장히 다루기 어렵고 복잡한 구조의 기기를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공상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환상을 털어놓는 정도에서 멈췄을 뿐, 전자책의 개념을 논의해보는 단계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러다 1971년, 미국에서 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인쇄술을 대중화 시키면서 세상을 근대로 이끈 남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의 이름을 딴 ‘프로젝트 구텐베르크’다. 이 프로젝트의 목적은 이제까지 인류가 적어올린 문서자료를 전자화하여 보관하는 것이다. 즉 인쇄 활자를 e-text로 변환한 뒤 데이터베이스 내부에 저장하고자 하는 목적 아래 설립된 프로젝트라는 말이다. 이 프로젝트는 지금까지도 많은 자원봉사자들의 참여를 끌어내고 있고, 그에 따라서 방대한 양의 서적을 디지털화 시키는데 성공하는 등, 굵직한 성과를 냈다고 평가 받는다.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전자책 프로그램이 이토록 빛나는 결과물을 빚어냈다. 근래까지의 전자책이 종이책 속 활자를 디지털화 하는 것에서 멈췄던 이유는, 그 시작점의 그림자가 너무 진했던 탓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오늘에 와서는, 전자책 시장을 덮고 있던 그림자가 많이 옅어진 듯 하다. 전자책은 더 이상 종이책의 부산물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전자책이 ‘종이책을 보조’하는 최초의 목적에서 벗어나, ‘디지털 기기를 통해 읽을 수 있는 서적’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종이책의 활자를 디지털화 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던 프로젝트 구텐베르크에 반해, 요즘은 오직 전자책으로만 출판되는 서적들도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다. ‘밀리의 서재’로 대표되는 구독형 전자책 시장도 성황리에 규모를 키워나가고 있다. 타인의 목소리를 빌려 책을 읽는 오디오북과 같은 새로운 독서 방식도 생겨났다.


종이책을 거치지 않는 전자책, 구독형 전자책 시장, 오디오북…. 위의 예시들은 모두 전자책 시스템의 기반 아래에서 싹을 틔운 것들이다. 그들은 종이책과 다른 독자적인 체계를 갖추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말은, 바꿔 말하자면 종이책이 더 이상 지배적인 독서 매체가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때에 맞춰, 종이책 종말론을 부르짖는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종이책 종말론


2010년, MIT 미디어 연구소의 소장 니콜라스 네그로폰테(Nicholas Negroponte)가 말했다. “2015년을 마지노선으로, 종이책 시장은 종말을 맞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많은 이들이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종이책은 예전의 지배적인 위치를 되찾을 수 없을 것이며, 전자책에 밀려 곧 사라질 수순만 남았다고 말이다. 그들의 수군거림에는 어떤 근거가 있었을까.

우선 EPS 곡선에 입각한 논리다. 여기서 EPS 곡선이란, 새로이 등장한 대중 매체의 보급률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시각화한 그래프이다. E와 P, 그리고 S는 각각 Elitist stage(엘리트 단계), Popular stage(대중화 단계), Specialized stage(전문화 단계)를 말한다. 그러니까 모든 미디어는 사회적으로 소수에 해당하는 엘리트 계층을 대상으로 태동했다가, 불특정 계층 모두를 고객으로 삼는 대중화 단계로, 결국에는 보급률의 하락을 극복하기 위한 세분화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라디오를 예시로 들어보자. 사회의 소수 특권층에게 정계 소식을 빠르게 전달해주는 기계에 불과했던 라디오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한 때 지배적인 대중 매체로 자리 잡았다. 모든 집에는 라디오가 있었고, 모든 이야기가 라디오를 통해 퍼졌다. 하지만 강력한 경쟁 미디어인 TV를 만나고, 라디오는 쇠퇴하며 고객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청취자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콘텐츠를 다각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각 청취군의 흥미에 맞춰 프로그램 카테고리가 정돈된 결과, 운전자를 겨냥한 차량용 라디오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앞서 말한 엘리트 – 대중화 – 전문화의 흐름이다. 종이책의 종말을 말하는 사람들은, 종이책 시장은 이미 전문화 단계의 끄트머리에 있는 반면 전자책은 대중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라디오가 TV를 이기지 못했듯, 종이책은 전자책의 상승세를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시각이다.


그러면서 또 하나, 한때 지배적이었던 것들이 몰락해온 발자취를 내놓는다. 증기기관은 인류가 산업혁명을 거치며 비약적인 성장을 하게끔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오늘날 증기기관은 내연기관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동력을 생산하고 전달한다’는 목적을 이루는데 있어서, 그 효율성과 편리함은 내연기관이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이다. 필름카메라가 더는 보도사진 분야에서 사용되지 않는 것, 그리고 LP판을 이용한 음악 감상이 주류에서 벗어나게 된 것도 증기기관과 맥락이 같다. 이슈를 담은 사진은 최대한 빠르게 보도 되어야 하고, 버스에서는 LP판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산업의 근간에 위치한 어떠한 목적, 그곳에 이르기 위한 편리함과 효율성에 따라 산업 구조가 변화하는 것은 당연하다. 책을 읽는다는 목적만 두고 논하자면, 종이책은 전자책에 비해 얼마나 불편한가. 단적으로 봤을 때,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 손가락의 개수부터 차이가 나지 않나.


여기서 특히 부각되는 것은 전자책이 지니는 독보적인 강점들이다. 우선 전자책 단말기는 무게가 가볍고 크기가 작다. 200g도 되지 않는 무게는 종이책 단 한 권보다도 가볍다. 그리고 그런 작은 부피와는 어울리지 않는 저장용량 또한 자랑한다. 수백, 수천 권의 책을 저장한다고 해도 단말기의 무게는 늘어나지 않는다. 책장이 내려앉거나 무너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듯 휴대성의 측면에서 종이책은 전자책을 이길 수 없다.


또한 시장의 높은 유연성이 있다. 탄생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시장인 만큼, 그 속에서 새로운 가치가 창출되는데 제약이 없다는 것이다. 전자책 시장에 비해, 종이책 시장은 경직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밀리의 서재’ 같은 구독 시스템은 종이책 시장에서는 시도되지 못했다. 카세트테이프 하나가 달랑 동봉되었던 종이책을 전자책 시장의 오디오북과 비교할 수 있을지 조차도 의문이 든다. 둘 모두 전자책 시장이 가지는 디지털 매체와의 접근성, 그리고 시장이 유연하다는 점 덕분에 이제야 날개를 달았다고 볼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오디오북은 새로운 감각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오디오북은 타인의 목소리를 빌려 책을 읽는 새로운 독서 방법이다. 기존의 독서가 철저히 시각 중심의 행위였다면, 오디오북은 청각을 통한 방식이다. 새로운 방식의 등장, 그에 따른 새로운 감각기관의 활성화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온다. 한 예로, 중세 때는 책을 마음속으로 읽지 않았다. 큰 목소리로 소리 내어 읽는 낭독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인쇄법이 대중화되어서야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책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자신이 읽는 내용을 타인과 공유할 필요가 없어졌다. 오늘날의 독서방식인 묵독, 프라이버시와 개인주의의 개념이 이때 처음 탄생했다. 책을 읽는 방식은 이처럼 사회문화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독서를 주관하는 감각기관이 대체될지도 모르는 지금, 그 흐름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MIT 미디어 연구소 소장의 말만 따르자면, 이 글을 적고 있는 2021년은 종이책이 종말을 맞이하고도 6년이 더 흐른 시점이어야 한다. 종이책의 활자를 더는 읽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 걱정은 과연 현실이 되었나.


하지만 현실은


2011년 개봉한 영화 <리얼스틸>, 그곳에서 그린 2020년은 인간이 격투기 종목에서 설 자리를 잃은 모습을 하고 있다. 더 폭력적인 싸움을 벌이기 위해 개발된 로봇들이 링 위에 오른다. 그들은 주먹을 주고받고, 인간들은 판돈을 내건다. 하지만 실제 2020년은 어땠나. 작년은 복싱 전설 마이크 타이슨(Mike Tyson) 이 복귀한 해로 기억된다. 기름(?) 튀기는 싸움을 펼쳐야 할 로봇들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이렇듯, 미래에 대한 예측이 들어맞지 않는 경우도 존재한다. 종이책 종말론도 그중 하나다.


2015년은 종이책 시장의 데드라인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거기서 1년이 더 지난 2016년의 통계를 보면, 당초에 예상했던 것과는 반대 양상을 찾을 수 있다. 미국출판협회(Association of American Publischers, AAP)의 집계에 따르면, 2016년 1월부터 9월까지 도서 판매에서 전자책의 매출은 18.7% 감소한 반면, 종이책의 매출은 7.5% 증가했다. 영국출판협회(Publishers Association, PA)가 제시한 자료도 비슷하다. 2016년 영국의 전자책 판매는 17% 감소하고, 종이책은 7% 증가했다. 종이책은 반등했고, 전자책은 상승에 실패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도서정가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도서정가제란 도서 가격 경쟁이 과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가 직접 책의 할인 범위를 정한 제도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적용되고 있는 도서정가제는 2014년 11월 21일부터 시행된 것이다, 해당 법률에 따르면 모든 도서의 최대 할인율은 10%로, 적립과 같은 간접할인을 5% 추가로 붙여 최대 15% 할인으로 제한하고 있다. 서점들이 저마다 할인 경쟁을 펼치다 공멸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다. 전자책의 지표가 하락한 것과 이 법이 그래서 어떤 관계가 있는가. 아주 깊은 연관이 있다. 도서정가제의 할인율 제한은 전자책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동네 서점을 대형 프랜차이즈 서점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법률은, 전자책이 종이책에 비해 가지는 저렴한 가격 측면을 약화시켰다. 전자책 시장은 도서정가제의 법망에서 피해가기 위해 꼼수를 부리기도 했다. ‘구매’의 방식이 아닌, 50년 대여와 같은 ‘장기 대여’ 방식을 사용해 헐값에 책을 제공하는 것인데…. 매매 단계의 할인율을 어긴 것이 아니지 않냐는 식이다. 하지만 이는 결국 위법으로 판결 났고, 할인율의 제약을 받는 우리나라의 전자책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월등히 비싼 가격대를 형성하게 되었다. 실물을 만질 수 없고 중고로도 되팔 수 없는 전자책이 종이책과 비슷한 가격을 가진다. 그 점에 실망한 사람들이 꽤 많다.


“도서정가제” 법률은 이렇듯 종이책 시장이 반등했던 이유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하지만 어찌 보면 조금은 덩달아 생겨난 효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격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말이다. 법안 시행에 의한 부수 효과로 수치의 변동이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종이책 자체가 전자책과 비교해 가지는 매체적 특성에 의한 반응은 독립서점의 예시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독립서점은 무엇인가. 말 그대로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서점이다. 프랜차이즈 점포들의 일괄적인 인테리어나 서적 배치를 따라가지 않고, 주인장이 마련한 기준대로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다. 독립서점 열풍은 해가 가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종이책이 종말을 맞이할 것이라고 했던 2015년, 전국에는 97곳의 독립서점이 문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 2020년 작년, 그 수치는 6배가 넘어 634개까지 증가했다. 추가적인 공급은 높은 수요에서 오는 법이다. 독립서점들이 이토록 꾸준하고 열렬히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각 서점마다의 고유 컨셉들이 모두 종이책의 특성과 절묘하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독립서점 ‘유어마인드’는 매년 아트북페어를 개최한다. 축제에 참여하는 고객들은 책들을 만져보고 페이지를 직접 넘겨볼 수 있다. 규격이 일정하지 않은 책들 사이에서, 자신의 독서습관에 알맞은 서적을 고르는 재미가 있다. 모든 서적이 한 단말기의 포맷으로 재단되는 전자책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일부 독립 서점들은 온라인 판매를 병행하기도 한다. 그리고 온라인 스토어를 운영하는 방식에서도 종이책의 특성을 유감없이 활용하고 있다. 서적을 주문해준 고객 한 명 한 명에게, 수기로 직접 작성한 엽서를 동봉하는 것이다. 사은품 증정 퀄리티 등에서 확연히 벌어지는 대형 온라인 서점과의 서비스 품질 격차를 극복하고자 마련한 방안이지만, 이는 어느새 독립서점만의 특색이 되었다. 정성스러운 소포에 책이 싸여 온다. 포장 안에는 깔끔한 펜글씨 엽서가 있다. 물리적인 형상이 실재하는 종이책 시장에서만 맛볼 수 있는 광경이다. 

독립서점은 단순히 서적을 판매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독자들 간의 취향을 연결하며 지역 내에 존재하는 커뮤니티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관광지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기존에도 많은 이들이 방문하는 핫플레이스에 독립서점이 자리 잡기도 하지만, 독립서점이 뿌리 내린 곳이 새로운 핫플레이스가 되기도 한다. 이런 공간들은 독서모임과 북토크 등 다양한 오프라인 행사 현장으로도 활용된다. 독립서점에서만 구매할 수 있는 특별 에디션도 존재한다. 종이책의 특색 아래 독립서점 열풍이 불었고, 이는 종이책 시장의 반등으로 이어졌다. 종이책 스스로가 자신을 일으켜 세운 셈이다.


전자책의 인기가 식은 것에는 그들이 가져오는 디지털 피로감의 영향도 있다. 디지털 기기를 사용해 독서를 하는 전자책 특성상, 전자기기를 사용함에 따른 신체적인 피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전자책을 읽을 때 많이들 사용하는 태블릿 PC나 스마트폰 등에는 무수히 많은 발광 다이오드가 들어간다. 이들은 페이지를 넘길 때, 넘기지 않을 때를 가리지 않고 발광하며 눈앞을 이지러트린다. 시력이 낮아지고 안구는 건조해진다. 물론 요즘의 전자책 단말기는 대부분 전자잉크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 전자잉크 기술은 최근 5년간 거의 제자리에 있었다고 봐도 될 만큼 그리 큰 발전을 이뤄내지 못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저번 장의 글씨가 흐릿하게 남고, 그 잔상을 지워내기 위해 화면을 수시로 깜박여 줘야 한다. 아주 초창기 때의 불만 사항을 전혀 개선하지 못하고 있다.


디지털 피로감에는 이런 정신적인 피로 또한 포함된다. 전자잉크의 특성에서 오는 불편함은 어쩔 수 없다 치고, 독서를 위한 기본 물품이 전자기기라는 것 자체에서 오는 피로감도 존재한다. 배송을 받으면 제품 등록을 해야 한다. 전자책 단말기는 안 그래도 설탕액정이라던데, 깨지면 AS는 받아야 할 것 아닌가. 양품 테스트는 기본으로 거쳐야 한다. 배터리 성능을 직접 검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끈따끈한 제품은 내 손에 있는데, 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하룻밤을 참으며 제품을 공회전시킨다. 테스트까지 통과했다. 그럼 이제 각종 앱을 설치하고 기본 설정을 건드린다. 들고 다닐 때는 케이스에 꼭꼭 숨겨 다닌다. 이러한 피로감은 모두 소비자가 떠안는 것이다. 여기서는 전자책 단말기에 한정해서 말하긴 했지만, 전자기기를 구매하고 사용하는 데에 있어서 소비자가 부담해야 하는 피로감은 얼마나 막심한가. 좋은 책을 읽는 것만 한 공부가 없다는 말이 있다. 다만 그 좋은 책을 읽기 위해서는 또 공부를 해야 되는 판이다.


마지막 이유로, 종이책과 전자책의 보급률은 각 매체 자체의 차이 때문에 유발된 것일 수도 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같은 내용을 디지털 화면과 종이 활자로 읽었을 때, 독자가 그 내용을 이해하는 정도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세부적인 디테일을 기억하는 것은 디지털 화면이 나았다. 하지만 내용의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는 데에는 종이 활자가 디지털 화면을 앞섰다. 이런 매체 자체의 특성을 설명하는 좋은 예시가 있다. 종이 신문과 온라인 신문이 가지는 형식상의 차이다. 종이 신문은 지면을 하나의 판으로 둔다. 그리고 판 하나를 구성하는 기사들 속에서의 스토리텔링을 중요시한다. 이른바 ‘판짜기’다. 하지만 온라인 뉴스는 그렇지 않다. 각 기사들을 포털 상위에 올려 독자들의 눈에 보이게 하는 과정에 판짜기는 고려되지 않는다. 사람은 기존의 방식과는 다른 새로운 접근에 불편함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만약 한 독자가 주로 읽는 장르가 문학이라고 가정해보자. 소설의 전체 줄거리를 따라가야 하는 상황에서 종이책과 전자책, 어떤 매체가 유리할까? 기존에 문학 작품을 향유하는 독서를 즐겼던 사람일수록, 종이 활자라는 매체 특성에 익숙해져서는 전자책으로는 줄거리 파악에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다.


책에는 곰팡이가 핀다


그래서 종이책은 과연 몰락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 아주 위험한 상태까지 왔다고는 보기 힘들다. 종이책이라는 매체가 전문화 곡선에 들어선 늙은 미디어인 것은 맞으나, 위 독립서점의 예처럼 그 속에서 새로운 가치가 발굴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앞서 ‘종이책 종말론’에서 제시한 몇 가지 사회적 연구들에만 따라 종이책 시장을 점치는 것은 매우 단편적인 시각이다. 한 매체의 향방을 예측하는데 있어서는 보다 다각도에서의 접근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가 접하고 있는 전자책은 아직 텍스트를 읽기 위한 새로운 수단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책’을 향유하기 위한 매체로 인정받기에는 부족한 면모가 많은 것, 거기에는 앞서 제시한 다양한 이유가 존재한다. 그 이유들 중 가장 직관적으로 체감할 수 있는 것으로 전자책 플랫폼 자체의 미성숙함을 들 수 있다. 아직 충분한 깊이를 지니지 못한 전자책 플랫폼, 그리고 전자책을  읽기 위함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제작되는 단말기가 정작 애매한 완성도를 가진다는 점. 현재의 전자책은 기존의 독자들이 종이책을 통해 얻었던 만족감을 모두 채워주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향방은 전자책이 자신의 단점을 어떻게 메꾸어 나갈지에 결정된다.


사담을 조금 덧붙이자면, 종이책과 전자책은 증기기관과 내연기관 사이의 관계보다는 연초와 전자담배로 비유해야 하지 않을까. 증기기관이 가지고 있던 모든 부분을 충족시키면서도 자신만의 강점이 어마어마했던 내연기관. 반면에 증기기관은 자신의 개성을 바탕으로 존립하기에는 장점의 뿌리가 너무 얕았다. ‘목적에 보다 효율적으로 도달하는 것이 승리한다.’ 지배적인 산업이 몰락해온 과정의 바탕이 되는 가치다. 하지만 이 관계를 종이책과 전자책에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다. 종이책에는, 그리고 보다 맞는 비유일 것이라고 말했던 연초에는 감성이 존재한다. 맛이 존재한다. 매체나 기호식품이 얼마나 늙었는지를 떠나서, 그들 자체에서 오는 느낌이 있다. 증기기관에는 없었던, 또 전자담배가 그토록 찾으려고 애를 쓰는 감성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종이책 독자들이 추구하는 ‘감성적 기호’의 가치가 생각보다 거대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종이책은 단지 정보전달만을 위한 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포츠처럼 개개인의 굶주림을 채워줄 ‘기호 행위’로 다가가야 하며, 전자책은 기호 행위를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제시된 툴 정도로 보아야 한다. 미국에서 MLB의 인기가 줄어가는 것처럼 사회의 흐름에 따른 선호 비율 등락은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이 다른 새로운 매체로 완전히 대체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는 말이다.


글의 처음에서 말했듯이, 종이책에는 곰팡이가 핀다. 그렇다면 곰팡이가 끼지 않도록 관리하면 된다. 이미 생겼다면 닦아내면 그만이다. 곰팡이가 짙게 눌러 붙어 닦이지 않는다면, 그게 뭐 어떤가. 오히려 그게 종이책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이지 않을까. 빛바랜 사진첩에서 지나가 버린 과거의 향수를 느끼는 것처럼. 사람에게나, 그리고 물건에나 노화의 과정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한 페이지에 눌린 채 가려져 있는, 다음 장을 펼치는 설렘은 아름답다. 검지와 엄지로, 종이의 까칠한 질감을 느끼며 페이지를 넘긴다. 그 행위를 스스로 해내는 것에서 오는 성취감이 있다. 우리가 종이책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페이지를 넘긴다’는 작은 행위를 직접 하고자 하는 고집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종이책의 전망을 목적성의 논리로만 판단할 수 없다. 때때로는 행위 자체가 목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 책을 읽읍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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