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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매기삼거리에서 Jan 08. 2020

이태리 타올

말이란


               

1부. 출생의 비밀      

  

2부. 가문의 전통




                                                                                   

오늘 큰 마음먹고 노 씨 가문의 전통을 공개 하노라.

이태리 타올이 그러하듯이 세상에 태어나 무언가 남길 수 있다면,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할 수 있다면 까짓 가문의 전통쯤이야 뭐.    

     

-  출생의 비밀 -     

       

얼굴이 몸이고 몸이 얼굴이다. 마주 보면 눈도 귀도 코도 없어 깎아지른 절벽이다. 입만 하나 달랑 있되 그나마 끝자락에서 아래를 향해한 일 자로 죽 찢어졌다. 다물면 메기입이요, 쩍 벌리면 주먹만 한 거는 뭐든 꿀꺽 삼킨다. 뒤도 똑같아 도대체 낯짝인지 뒤통수인지 알 길이 없다. 게다가 앞뒤가 찰싹 달라붙어 굶주린 빈대 같다. 얼굴치곤 기이하다. 그나마 사방이 각이 져 반듯하고 검정색 세 줄 직선으로 위아래를, 양옆 굵은 솔기로 안팎을 구분한다. 크기로만 치면 손바닥만 하니 미인이다.    


단순한 듯 요모조모 생김새와 달리 성정은 꼼꼼하고 촘촘해서 속을 보이지 않는다. 콸콸 쏟는 물을 담을 정도로 마음이 넓다. 여리기도 해 가득 찬 물이 슬금슬금 빠져나가도 차마 붙들지를 못한다. 겉과 속이 한결같아 믿음직스럽다.    


넉넉하고 듬직한 성정과 달리 체중은 나뭇잎같이 가볍다. 바람 타고 날아다닐 정도로 날렵하다. 몸값이라는 게 있지만 무게만큼이나 가뿟하다. 시쳇말 우스개 소리로 궁금하면 오백 원. 한껏 불러 봐야 천 원이다.    


피부는 거칠어 까슬까슬하되 날카롭지는 않다. 바로 이 때문이다. 땀과 먼지에 찌든 고달픈 삶의 때를 미는 임무 하나만을 띠고 자랑스럽게 이 땅에 태어났다. 1962년생이다.    


청결 하나로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의 사명감과 정열에 불타, 새빨간 단색으로 혈혈단신 사바세계에 뛰어들었다. 대를 이어 자손인가 요즘엔 대개 청춘의 녹색이다. 개나리꽃 진노랑에 짙푸른 바다 빛도 있다. 여유 있게 잘 키워 훌쩍 키 큰 녀석도 눈에 띈다. 패션 감각이 있어 두 색 넉 줄 띠를 두른 녀석도 활약한다.  

  

터키에 터키탕 없고 별다방에 별 없듯이 이태리에 이태리 타올이 없단다. 유독 우리나라만 집마다 욕실에 몇 녀석씩 살고 있다. 대개 세면대나 바닥 여기저기 팽개쳐져 버린 자식 같아 애처롭다. 주인 잘 만난 녀석들은 정돈된 수납장에서 우애 깊은 형제처럼 오순도순 모여 산다. 대중탕이라면 어디를 가나 카운터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자리를 차지한다. 하나하나 풀 먹인 듯 빳빳하게 단장하고 켠켠이 무더기로 무리 지어 순서대로 사람들의 손길을 기다린다.    


이태리와 영 연고가 없는 건 아니다. 본래 조상은 영국의 비스코스 레이온이란 신흥 명문가다. 중국의 비단이 귀하고 후한 대접을 받는 것이 부러워 인조 비단 즉 인견이 탄생했으니 비스코스 레이온이 바로 그것이다. 1904년 일이다.

인견은 누에에서 뽑은 실로 짠 비단처럼 가볍고 시원하되 비단보다 질기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 우리나라가 아직도 여름에는 거친 삼베옷이 시원하다고 최고로 치고, 서당에서 천자문을 가르치던 시절에 영국은 화학과 공학으로 의류 신소재를 만들었다. 인견은 단숨에 원단계의 황제로 등극한다. 영국에서 1870년 산업혁명에 이은 의류 혁명이어서 폭풍이 몰아치듯 유럽 전역에 가문의 세를 팽창했다. 이태리도 그중 하나.   

  

역사는 으레 우연이 개입하는 법. 이태리는 착오로 비스코스 레이온을 배에 태워 부산으로 보냈다. 한국은 육이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재건의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가난한 나라여서 그 귀한 신분과 쓰임새를 몰라보니 졸지에 창고에 처박히는 애물단지 신세로 전락했다.     


다행히 수입한 회사 사장과 친척으로 유통과 영업을 맡은 이가 쉽게 포기를 모르고 꾀도 많았다. 직원들이 그 까끌까끌한 천 쪼가리로 손톱 때를 미는 걸 보고 몸의 때에도 쓰면 되겠다 싶었다. 시험 삼아 원단을 네모반듯 손바닥만 하게 잘라 재봉틀로 박음질해서 목욕탕에 보내 봤다. 웬걸, 인기 폭발해 경향 각지에서 주문이 쇄도했다. 업계 말로 때 밀어 버는 떼돈이 떼돈 되어 무려 500억 가량 거액을 거머쥐었다. 부산 제일의 호텔도 사고 떵떵거리고 살았다. 일찍이 특허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용신안 특허를 내어 발 빠르게 시장을 선점하고 경쟁을 배제한 덕이 컸으니 62년부터 75년까지 그 권리가 유지되었다.    


그런 전설 아닌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바 현대판 새옹지마에 신데렐라요, 역전에 재역전 드라마의 행운아다. 천 원짜리에 불과한 천조각이 대한민국 5대 발명품 중 하나이고 특허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손꼽히니 가히 레전드라 아니할 수 없다.    


처음 그 모양 그대로 지금까지도 인기가 얼마나 좋은지 누구나 마르고 닳도록 아낀다. 그것도 모자라 벌거벗고 몸 구석구석에 대고 애무하며 아낌없이 사랑을 나눈다. 부부도 연인도 아닌 것이 감히 동방예의지국의 온 백성을 남녀노소 불문하고 발가벗겨 희롱한다. 우리나라 아니 세계 어디에도 이 보다 해괴망측한 놈은 결단코 들어 본 적 없다. 그럼에도 이리 인기인 스타는 한반도 삼천 년 역사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상 최초다.    


초절정 밀기 고수라 그런가 보다. 밀면 살고 밀리면 죽는 목욕업계에서 오늘날까지 그 명성과 인기가 여전하다. 오직 밀기 필살기 하나다. 다 잘할 필요 없다. 뭐든 하나만 똑 부러지면 성공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같다.    


이렇게 해서 유럽의 명문 귀족은 우리나라에서 천하제일 때밀이로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톱스타가 되었다.       

나이가 나보다 한 살 어리나 다섯 살 차이는 벗이라고 맹자님인가 말씀하셨다. 혈통과 피부색은 다르지만 기어코 이를 따지고 든다면, 저출산 고령화가 재앙이고 다문화가 추세인 시대에 국수 말아먹듯 후루룩 나라를 말아먹을 국수주의다. 벌써 반세기 넘게 살 맞대고 얼굴 비벼대며 정겹게 지냈다. 이러하니 이제는 없어서는 참 아쉬운 친구임에 틀림없다.   

         

- 가문의 전통 -            


오늘 큰 마음먹고 노 씨 가문의 전통을 공개 하노라.    


이처럼 귀한 친구를 함부로 대하는 오늘의 안타까운 현실을 개혁할 수 있다면 까짓 가문의 전통쯤이야 뭐.    


목욕탕에 가보자. 명문가 출신을 어떻게 부려먹고 있는가 살펴보자.    

피부가 벗겨지도록 때를 박박 밀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제법 있다. 특히 겨울철에.

다들 예나 지금이나 이태리 타올을 이렇게 사용한다.

한 줄로 줄이자면, 이태리 타올에 손을 넣고 손 힘으로 몸을 닦는다.

웬만하면 다 해 본 거지만 굳이 순서대로 말하자면,    


먼저 온탕이나 열탕에서 때를 불린다. 탕을 나와서 쪼그리고 앉는다.

한 손바닥을 이태리 타올 안으로 쑥 넣는다.

이태리 타올을 바짝 피부에 댄다.

손바닥, 손가락, 팔 힘까지 총동원하여 전신의 때를 민다. 뭉쳐서 눌려 떡이 된 때가 흉해서 꼴 보기 싫다.

피부에 밀착이 잘 안 되어 잘 안 닦이니 박박 밀어댄다.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른다. 손이 닦는 면과 수평이 안 되는 옆구리나 목, 손 닿기 어려운 어깨, 등, 엉덩이는 더 하다. 거긴 예민하기까지 해서 피부가 벗겨져 쓰리기도 하다.

금새 이마에 땀이 줄줄 흐른다. 물 잔뜩 묻은 손등으로 땀을 연신 훔친다. 땀을 땀나는 손등으로 훔치니 시원찮다.

때 밀랴 때 땀 닦으랴 바쁘다 바뻐.

그리고 비누칠. 벗겨진 피부에 비누가 묻으니 더 쓰리다.

그리고 샤워. 쏟아지는 물로 어딘가 또 쓰리다.

다 하고 나면 한바탕 전투를 치른 거다. 지친다. 중노동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지구 상에 오직 한 사람은 다르다. 비법을 쓴다.    


욕실에 입실할 때 이태리 타올 한 장과 함께 수건 두 장, 수건 길이보다 조금 더 길다랗고 폭은 비슷한 때 타올 한 장을 더 챙긴다. 온탕이나 열탕에서 때가 붇건 말건 느긋하게 탕을 즐긴다. 탕을 나와서 쪼그리고 앉는 건 같다.     

이제부터 한참 다르다.


한 줄로 줄이자면, 수건 한 장을 돌돌 말아 이태리 타올에 욱여넣어 주먹 하나반만 한 뭉치를 만들고 그걸로 몸을 닦는다.

배워 두면 엄청 유용하니까 차근차근 순서대로 설명하자면,    


1. 수건 한 장을 편다.

2. 반을 접는다. 정사각형. 다시 반을 접는다. 직사각형. 길이로 다시 반을 길다랗게 접는다. 그럼 수건 폭이 이태리 타올과 비슷해진다.

3. 세게 누르면서 돌돌 단단하게 만다.     


4. 이태리 타올의 터진 입을 잔뜩 벌리고 말린 수건을 꾹꾹 눌러 가며 반대편으로 밀어 넣는다. 안에 수건이 꽉 찬 이태리 타올 뭉치 완성

5. 뭉치를 한 손아귀에 가뿐히 쥐고 손이 아니라 팔 근육을 사용해 밀고 당기는 힘으로 슥슥 가볍게 때를 벗긴다. 피부에 고루 밀착되니 힘이 안 든다. 붕긋한 뭉치라 어디든 닿는 곳은 수평이다. 손 닿기 쉽지 않은 데까지 때가 잘 밀린다. 밀고 당길 때 때가 말리면서 커지는 게 재미있다.

6. 땀 좀 나면 여분의 수건으로 슬쩍 땀을 훔친다. 두세 번 닦으면 그만이니 여유.    


7. 길다란 때 타올에 비누를 약간 묻혀서 몸에 대고 대충 슥슥 문대 거품을 낸다.

8. 물로 씻어내면 끝.    


사람이나 이태리 타올이나 속이 비어서는 맥을 못 추고 든든하게 배를 채워야 힘이 솟는 건 같다.    

그러나 요즘엔 이태리 타월보다 길다란 때 타올을 자주 쓰는데 이게 무슨 소용?

걱정 붙들어 매시라.

그래서 비법 하나 더 공개.   

 

목욕탕 거울 앞에서 하는 건 대개 세 가지. 때 밀기, 양치질, 면도. 사람들은 이 셋을 따로 한다.

비법은 다르다.    


1. 먼저 몸 구석구석 고루 비누칠하며 양손으로 도포하듯이 편다.  

2. 그다음 양치질이나 면도를 한다.

3. 그다음 길다란 때 타올에 비누칠을 조금 한다.

4. 그리고 그걸로 몸을 가볍게 슥슥 문지른다.    


무슨 차이?     


차이가 크다. 양치질이나 면도하는 사이 미리 몸에 도포한 비누가 때를 붇게 하고 몸에서 때를 얼마간 분리해 낸다. 그래서 힘이 안 들고 빠르다.    


이렇게 비법 둘을 알면 목욕탕 가는 게 기대된다. 탕을 즐긴다. 때 밀 때 힘이 안 든다. 때가 돌돌 돌돌 신기하게 말리는 재미는 덤. 힘이 안 드니 땀도 덜 난다. 그나마도 여분의 수건으로 훔치면 된다. 피부가 상하지 않는다. 즐겁다, 빠르다.     


수건 두 장 더 쓴다고 목욕탕 주인이 제지한다고? 천만에. 단 한 번도 없다. 눈치 준 적도 없다. 널린 게 목욕탕, 무한 경쟁 시대에 그깟 수건이 대수인가. 와 주기만 한다면야. 사업 수완이 있는 주인이라면 기름 값, 물 값, 인건비 탓할 시간에 비법을 적극 홍보해서 손님을 끌 일이다.   

 

비법은 아들 덕분이다. 목욕탕 가서 아이 둘 다 때 밀어주고 그다음 나까지 하려니 온몸에 땀이 비 오듯. 그래서 꾀를 낸 거다. 그러니 20년 훌쩍 넘은 거다.    

비법을 숨긴 적은 없다. 홀딱 벗고 하는 거니 숨길 수도, 이유도 없다.


다들 본다. 지나다가 혹은 바로 옆에서 때 밀면서 힐끗힐끗 보거나 탕 속에서 때 불기며 일거수일투족을 빤히 쳐다본다. 원주 좁은 바닥에서 20년 했으니 일 년에 목욕탕 열 번이면 200번, 한 번에 열 명이 봤으면 2,000명은 족히 봤을 터. 참 이상하다. 훨씬 쉽고 즐겁고 빠른데 아무도 따라 하지 않는다. 단 한 명도.     


이젠 삼 부자가 함께 대중탕 가면 각자 알아서 이태리 타올 뭉치를 만든다. 그게 없을 때는 두 번째 비법을 쓴다. 녀석들도 해보니까 좋다는 걸 아는 거다. 아들에게 이른다.

    

"니 자식에게 전수해라. 이거 할아버지가 개발한 거라고. 노씨 가문의 전통이란다. 전 세계에 우리 집뿐이다."     

편의란 한 번 맛 들이면 돌이키기 어려운 법이니 알아서 물려주겠지만.    


오늘 노 씨 가문만의 전통 포기를 선언 하노라.     


이태리 타올이 그러하듯이 세상에 태어나 무언가 남길 수 있다면 열 번인들 포기 못 할까. 특허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개한 비법이니 공짜다. 대한의 아들 딸이라면 누구든 써도 좋다. 자식과 목욕 갈 때도 함께 써먹자. 싫으면 하지 마시고.   

 

음... 하지 말라는 게 더 효과 있겠군.

참 바꾸기를 싫어하는 인간의 속성. 공짜니까 하고 싶고, 공짜라서 하기 싫은 인간의 이상한 속성. 하라면 조패도 안 하고, 하지 말라면 죽어라 하고 싶은 인간의 삐딱한 속성.    


따라 하지 마셔요. 제발.

우히히히    


이제 우리나라 전통이 되려나? 아님 그래도 여전히 노 씨 가문만의 전통?

좋은 줄 알면 흑심은 없나 의심하는 인간의 속성. 모두가 다 하면 괜히 하기 싫고, 누가 혼자만 하면 먼저 따라 하고 싶은 인간의 야릇한 속성. 전부가 다 하면 왠지 해야 할 거 같고, 누가 혼자만 하면 먼저 나서지 않는 인간의 배반적 속성.  

  

할 거요? 말 거요?

우히히히    


30년 후 이태리 타올은 존재할까? 그때도 노 씨 가문만의 전통일까?

300년 후 이 글을 보고 이태리 타올을 상상할 수 있을까? 그때도 노 씨 가문의 전통일까?

3,000년 후 이 글을 해독할 수 있을까?

30,000년 후 한글은 존재할까?    


너무 멀리 가진 말자. 어느 날 목욕탕 입장료가 이태리 타올에 넣는 수건 한 장 때문에 인상되었다는 기사가 난다면 그로써 세상에 태어나 일 하나는 한 거다. 이태리 타올이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하듯이.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아직 모르는 것이다.

왕수인 전습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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