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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가을 Mar 13. 2020

3월 둘째 주 예상 밖의 담백한 맛

오늘의 간식: 삶은 계란

저녁을 먹지 못했다. 퇴근 후 곧장 이동해야 하는 상황에 급히 뭔가를 욱여넣듯 끼니를 때우기가 싫었다. 차라리 굶고 말자는 마음으로 오늘의 해야 할 일을 모두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9시가 조금 넘었다. 집이 공허하고 속도 허했다. 요리를 하기에는 재료도 없고 내 기운도 부족했다. 방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손으로 바닥을 휘적대다가 순간 몸이 한없이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를 먹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건강하게 튀겼다는 돼지감자 과자도, 견과류가 들어가 씹히는 맛이 일품인 스타벅스 리저브 초콜릿도, 강호동이 사랑하는 안성탕면도 지금 먹기에 과했다. 냉장고를 살펴보다가 냉장실 문짝 상단에 나란히 줄지어 선 계란이 눈에 들어왔다. 네 알만 포장된 계란을 사려고 마트에 갔다가 네 알짜리가 다 나가고 없어서 별수 없이 열 알이 들어 있는 계란을 얼마 전에 샀다. 어느 음식에나 들어갈 법한 재료라고 생각하고 고이 냉장고에 잘 모셔뒀다. 나름 알뜰하게 장을 보려던 계획을 실패로 만든 장본이었다. 어차피 언제 다 먹을지도 모르는 계란, 그냥 두면 상할 텐데 야금야금 삶아 먹을까, 생각하고 보니 괜히 지금에 딱 맞는 안성맞춤 먹을거리인 듯했다. 식초는 없지만 뻑뻑하게 까면 그만이니 문제는 없었다.     


냉장고에서 계란 두 개를 꺼내 바깥 온도와 얼추 비슷해지게끔 그릇에 담아뒀다. 그리고 전기 포트에 물을 끓였다. 포트 가장 높은 눈금에 물을 채우면 냄비에 계란이 딱 잠길 만큼의 적절한 양이 됐다. 물에 소금을 넣고 보글보글 소리가 날 때까지 끓인 후 계란을 넣었다. 거품이 빠르게 원을 그리며 생기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나타난 거품은 나타나기가 무섭게 터져 없어지고, 없어졌다고 말하기도 전에 크고 작은 새 거품이 연거푸 일어났다. 계란 노른자가 가운데로 갈 수 있도록 국자를 휘휘 저어가며 조심히 계란을 굴렸다. 격렬한 거품을 헤집고 조심스럽게 구르는 계란. 그 둥근 형태 속에서 어지러이 자리를 찾아가며 고체가 되어가는 물질. 각기 다른 방식으로 분주한 모양새가 안쓰러우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각자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때를 살아낸다는 건 무엇이든, 누구든 고귀한 일이다.

학창 시절에는 삶은 계란을 먹지 않았다. 내게는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를 음식이었다. 맛있다, 맛없다는 개념을 떠나서 맛이 실종된 것 같달까. 언젠가부터 있으면 먹고, 없으면 찾지 않는 음식 정도가 됐고, 몇 년 전 방송작가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계란을 직접 삶아 먹어봤다. 같이 일하던 작가 선배가 덴마크 다이어트를 하면서 특정 요일에 삶은 계란을 하루 9개씩 먹는다는 걸 따라했다. 2주 동안 식단을 조절하는 다이어트였는데, 별생각 없이 재밌겠다는 심산으로 가볍게 같이하다가 선배는 대략 3kg가, 나는 2kg가 쪘다. 이상하고 웃기는 다이어트다.


이제 반숙 계란도 먹는 경지에 이르렀지만 호는 완숙이다. 13분 정도를 끓이고 불을 껐다. 국자로 계란을 건지고, 냄비에 찬물을 받았다. 그대로 국자를 담가 계란을 식혔다. 식초 없이 소금물에만 끓였는데도 다행히 껍질이 잘 벗겨졌다. 반숙보다는 더 익고, 퍽퍽할 정도는 아닌 수준으로 계란이 익었다. 부드럽게 먹기가 좋았다. 작은 접시에 소금을 조금 덜어 찍어 먹으니 담백하게 감칠맛이 돌았다. 생각보다 훨씬 든든했고, 그 몇 년 전에 9개의 계란을 대체 하루에 어떻게 다 먹었을까, 그때의 나(와 작가 선배) 대단했네, 우리들은 모두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늘 열심히 살고 있었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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