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 독립. 이것이야말로 주체적인 삶의 시작을 위한 필수 코스라고 생각했다. 학생 때부터 쉬지 않고 계속해온 생각인데 실행을 못 했다.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스스로 가정과 나를 격리시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겪은 어떠한 경험에서 비롯된 넘지 못할 벽이었다 한들 결국은 나의 결단이 가장 중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어쩐지 나가서 사는 것은 큰 반항처럼 느껴졌다. 당시까지는 그랬다.
막내작가 대략 3개월 차,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정말이지 갑작스럽게 나가 살게 됐다. 방송작가의 말도 안 되는 생활 덕(?)이었다. 12월경 일을 시작해서 해가 바뀌는 날, 뜬눈으로 밤을 새고 거기에 더해 떠오르는 해를 사무실에서 맞이할 때만 해도 이런 생활이 계속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아이템을 찾아오라며 붉게 충혈된 눈으로 닦달하는 팀장은 사무실에서 담배를 뻑뻑 피워가며 공기를 흐렸다. 무엇이라도 들고 가야만 하는 막내작가들은 사무실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졸린 눈을 억지로 떠가며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각종 신문사의 기사 한 줄, TV프로그램에 출연한 가슴 아픈 사연의 주인공들이 하는 한 마디들을 그러모았다. 당시 그 외주 제작사에서 일하던 막내작가들은 모두 방송일이 처음이었다. 그 회사에서 1년을 버텼다는 어느 막내작가의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기도 했다. 새벽마다 생각했다. 우리가 찾고 있는 슬픈 사연의 주인공들만큼 여기 앉은 우리의 삶도 참으로 처량하다고.
사무실엔 당연히 숙직실도, 샤워실도 없었다. 이 닦고 세수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밤샘이 이틀을 넘어가면 온몸이 답답해서 견딜 수 없었다. 나에겐 특별한 결벽 같은 것이 없는데도 담배 연기, 퀴퀴한 냄새가 나는 사무실에서 씻지도 못하고 일하자니 참 미칠 노릇이었다. 처음 시도한 것은 외주사 옆에 있는 미용실에서 만 원을 내고 머리만 감는 것. 두 번째 시도한 것은 외주사 가까이에 있는 사우나에서 후루룩 씻고 돌아오는 것, 세 번째는 15분쯤 걸어야 나오는 찜질방에서 씻고, 30분이라도 자고 일어나서 부리나케 달려서 돌아오는 것. 세 번째가 가장 달콤했는데 만약에라도 깊이 잠들어서 일어나지 못한다면 분 단위, 시간 단위로 업무를 쪼아대는 팀장의 화를 면치 못한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네 번째 따위는 없다. 집까지 택시를 타고 가면 지역을 넘어가기 때문에 월급으로 감당할 수 없는 금액을 반복해서 지불해야 하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집에 다녀오면 적어도 3시간이 비어버리기 때문이다. 늘 초조하고, 조급하고, 일을 하면서도 심장이 뛰었다. 기쁨과 설렘의 두근거림이라면 좋았겠지만 약간은 병적인 반응 같은 것이었다. 빨리 아이템 찾아야 하는데, 예고 만들어야 하는데, 자막 써야 하는데, 보도자료 써야 하는데, 아직 프리뷰 하는 중인데 메인 작가님 연락 오면 어떡하지, 방송이 안 나가면 어떡하지. 쉬지 않고 일하면서도 끊임없이 무언가에 쫓기는 듯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은 방송일에 막 뛰어든 막내작가나 조연출들이 많이 산다는 동네였다. 일단 외주사 근처에 어디든 몸 누일 곳을 잡아놓고 천천히 돈도 모아가며 괜찮은 집에 들어가잔 생각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새로 구한 집이 있어 계약이 남은 몇 개월, 그냥 놀리기는 아까워 싼값에 살아도 된다는 부부의 집을 찾아냈다. 그들은 주먹구구식으로 계약서도 없이 급해 보이니까 그냥 빨리 들어와서 살라는 투로 우리를 맞았다. 급한 건 사실이었지만 영 불안한 마음에 직접 계약서를 만들었다. 짧게 살더라도 머무는 동안만큼은 안심하고 지내고 싶었다. 함께 살기로 한 회사 내 다른 팀 막내작가 친구와 왜 이렇게 우리에겐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게 흘러가지 않을까, 우리의 문제일까, 잠시 고민했다.
그렇게도 바라온 독립이건만 그 기쁨을 누릴 새도 없었다. 대충 꼭 필요한 것들만 챙겨서 부모님과 함께 이제 내가 살아야 할 집을 찾았다. 그날 부모님이 온종일 집을 함께 청소해주셨고(화장실 청소를 하던 엄마는 사람 살던 집이 정녕 맞느냐며 헛구역질을 했다) 짐을 함께 옮겨주시고, 짐과 함께 나는 그 집에 남고, 부모님은 가셨다. 그제야 실감이 나는 듯했지만 대충 이사(라기엔 단출했지만)를 마무리 지어놓고 다시 회사에 갔다. 정말이지 멋없는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