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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인후 Apr 30. 2024

"그는 경력이 없는 내게 경력을 만들어 주었다."

열정과 간절함으로 만든 첫 경력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던 어느 날, 나는 인턴 경험을 쌓기 위해 채용 게시판을 뒤적이다 눈에 띄는 공고를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독일의 고급 자동차 및 오토바이 제조사 BMW의 인턴십 공고였다. 경력이 전무했던 나에게는 도전이 두려웠지만, 너무나도 경험해보고 싶은 기업이었기에 주저할 틈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OO대 경영학과 재학 중인 조인후라고 합니다. 
영문이력서와 영문 자기소개서 첨부시켰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


지금 돌이켜보면, 인턴십 지원 당시 보냈던 이메일에는 풋내기 대학생의 순진무구함과 무경력 청년의 투지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듯하다. 그러한 미숙함이 '패기'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용인되곤 하는 것 같다. 그때의 나는 경력의 부재가 지원자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할지 깨닫지 못했다. 이는 영어학원에서 잠깐 강사로 일했던 경험마저 필사적으로 쥐어 짜내어 이력서를 메워야 했던 사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어쩌면 이러한 간절함이 면접관들에게 전해졌던 걸까? 1차 서류 평가에 합격했다는 안내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BMW Financial Services Korea입니다. 면접일정을 알려드리오니 시간 내에 오시면 되겠습니다. 회사에서 주관하는 시험은 없고 인성과 직무에 관한 구술 면접으로 영어와 함께 병행되며, 면접시간은 1시간 정도 소요되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구술 면접은 사업부 총괄 이사님의 집무실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이루어졌다. 이사님의 온화하고 배려심 넘치는 태도 덕분에 마치 오랜 지인과 담소를 나누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내 예기치 못한 복병이 등장했으니, 그것은 바로 엑셀을 활용한 과제였다.


나는 별도의 공간으로 안내되어 노트북을 받아들었고, 가공되지 않은 데이터와 함께 정해진 형식의 표를 30분 내로 완성하라는 미션을 부여받았다. 그 순간 나는 마치 깜깜한 터널 속에 갇힌 것만 같았다. 대학 수업에서 단 한 번도 다루어 본 적 없는 영역이었기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난관을 뚫기에는 역부족이라 판단했는지, 나를 안내했던 직원은 나를 방에 남겨두고 자리를 떴다. 눈앞의 엑셀 데이터를 아무리 뜯어봐도 원하는 형태의 표를 완성할 자신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멍하니 모니터만 응시한지 10분 쯤 지났을 무렵,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한 능력 테스트가 아닌, 문제 해결 능력을 보고자 하는 의도 아닐까? 실제 업무 상황에서라면 동료의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겠지.'


이에 나는 과감히 엑셀과의 씨름을 멈추고, 은행에서 인턴 중인 절친한 친구에게 SOS를 보냈다. 해당 엑셀 파일을 첨부해 보내며 해법을 구해달라 요청한 것이다. 잠시 후 친구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물었다.


"이메일 봤어? 이거 어떻게 하는지 알 것 같아?"


돌아온 친구의 답변은 짧고 간결했다.


"나도 잘 모르겠는데?"


이제 주어진 시간은 5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러한 문제를 접한 적이 없어서 막막했고 시간제한이 뇌의 창의성을 끌어올리는데 제동을 걸었다. 이제 더 이상 고민할 시간도 남지 않자 최종 이메일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 이메일에는 첨부파일은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첨부할 파일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이번 BMW 인턴에 지원하게 된 조인후라고 합니다. 현재 엑셀과제를 풀라고 주셨는데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 잘 모르겠습니다. 염치 불고하고 첨부파일 없는 이멜을 보내드리면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앞으로 이렇게 엑셀에 무지한 인턴에게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잠 안 자고 공부해서 엑셀 명령어를 숙지하여 오늘과 같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바쁘신 와중에 빈 메일 확인하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월요일인데 힘내시고 좋은 한 주 보내세요~

인턴 지원자 조인후


이메일 발송 후, 순간적으로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부풀었던 내 마음은 이내 무거운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나오게 했다. 다른 기업에서는 압박면접이라는 명목 하에 예리한 질문을 쏟아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BMW에서는 이사님과 진솔한 대화를 나눴던 기억이 오히려 기대감을 증폭시켰던 것 같다.


그런데 며칠 후, 나는 믿기 힘든 연락을 받았다. BMW에서 다시 한번 사무실로 초대한 것이다. 나는 망설임 없이 수락했고, 이번에는 지난번 추가로 새로운 면접관까지 배석해 있었다. 벼랑 끝에서 기사회생한 듯한 심정으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집중력을 발휘하며 면접에 임했다. 비록 그때의 내 모습을 직접 볼 순 없었지만, 열정과 의지로 가득 차 있었으리라.


결과적으로 나는 최종 합격의 영광을 안을 수 있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그때의 '공포의 엑셀방'으로 나를 안내했던 직원에게 물었다.


"전 엑셀 과제를 단 하나도 해내지 못했는데, 어떻게 된 걸까요?"


그는 잠시 숙고하더니, 마치 영업 비밀을 공개하기로 결심이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는 그 문제를 대학생이 완벽히 풀어내리라 기대하지 않았어요. 물론 해결한다면 대단한 능력이겠지만, 그보다는 문제에 직면한 태도를 보고 싶었던 거죠."


"인후 님이 보내주신 이메일을 보고, 면접관들은 '엑셀 실력은 부족하지만 태도만큼은 합격'이라고 평가한 것 같아요."


내 놀란 표정이 재미있었는지, 그는 덧붙여 설명했다.


"사실 인후 님보다 스펙이 훨씬 우수한 지원자들도 많았어요. 학벌, 학점, 어학 점수 모든 면에서 말이죠."


나 역시 그 부분이 늘 의문이었기에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왜 하필 저였던 걸까요?"


그는 명쾌한 답변을 내놓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글쎄요... 면접 후에 이사님이 저한테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최주임, 왜인지 모르겠는데 나는 지난번 면접 봤던 그 친구가 자꾸 생각이 난다'라고요."


이사님은 일방적인 면접이 아닌 진솔한 대화를 이어갔던 나를 높이 평가하셨고, 다른 면접관들 역시 이력서상의 스펙보다 태도를 중시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첫 경력을 쌓게 되었다. 이후 BMW에서의 경험은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주는 원동력이 되어, 이후 내 커리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 당시 함께 일했던 이들은 저마다의 길을 찾아 떠났다. 얼마 전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친 이사님은 그후 상무가 되어 여전히 BMW에 몸담고 계셨다. 다만 이제는 은퇴를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고 하셨다. 내게 첫 경력을 선물해주신 분이 정작 본인의 경력을 마무리하는 순간을 목도하자 감회가 새로웠다.


BMW 문원열 상무님(우)와 함께, ⓒ비즈니스 스토리텔러 조인후


나는 이사님께 당신의 고민과 결정이 한 청년의 인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며 진심어린 감사를 전했다. 그러자 이사님은 십여 년 전의 일을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오히려 본인이 감사하다고 화답하셨다. 언젠가 나 역시 누군가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끼치는 고마운 존재로 기억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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