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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별 Jan 03. 2020

나이를 먹어도 인연은 어려운 것

인연은 언제나 어렵다. 처음 친구를 사귀었던 유년 시절에도, 20대 후반에 접어든 지금도 똑같이 인연은 어렵기만 하다.

인연을 맺는 것은 당연히 어렵고, 인연을 끊는 것도 똑같이 어렵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과 멀어지는 일을 끝없이 겪게 되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이 허한 순간은 피할 수 없다. 절대 친해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이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경우도 있고, 마음을 다해 정을 준 이와 순식간에 멀어지는 경우도 있다. 종잡을 수 없는 인연은 그래서 더 어렵다.



첫인상만 보고 '쟤랑은 친해질 일 없겠다'고 생각했던 아이가 있었다. 동글동글하고 내성적인 나와는 달리 강한 인상에 톡 쏘는 성격 때문이다. 날카로운 눈매와 180cm를 넘는 키가 어찌나 위협적으로 보이던지, 실례가 되는 생각인 줄 알면서도 '친해질 일 없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아주 우습게도 그 아이는 일 년 후 내 남자친구가 되었다. 성격 참 까탈스러워보인다는 인상은 어느 정도 들어맞긴 했지만 의외로 소심하고 내성적인 구석도 있는 아이였다. 친구조차도 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한 아이와 사귀게 되다니, 사람 일은 정말 알 수 없다는 생각에 어이 없어 하던 날이 생생하다. 결국 헤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그마저도 인연이었으니까.


졸업한 지 3년이 되어 가는 대학 동기들을 생각해도 그렇다. 지금 동기들과의 카톡방에는 나를 포함해 총 9명이 있는데, 원래는 두 무리로 나뉘어져 있었다. 만날 때마다 반갑게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긴 하지만 그 이상으로 따로 만나 놀거나 하지는 않는 관계의 친구들이었다. 그런데 꽤나 뒤늦게, 졸업반이 가까운 3학년이 되어서야 한 무리가 되었다. 종종 "어쩌다 우리가 같은 무리가 됐지?" 하며 다 같이 머리를 맞댄 채 생각해 보곤 하지만 이렇다 할 계기는 생각나지 않았다.

대학교에 처음 들어갈 땐 '대학 친구는 밥 친구, 사회 친구다. 졸업 후엔 당연하고 방학만 해도 안 만난다'는 이야기를 주워 듣곤 걱정에 휩싸였는데,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스무 살에 만난 친구들이 어느덧 스물여덟이 되었다. 인원이 많고, 사는 지역도 다르고, 다들 취업해서 일을 하는지라 자주 만나진 못해도 여전히 아끼는 인연이다.



이와는 반대로 평생 갈 인연이라고 생각했지만 흐지부지 선을 긋게 된 이들도 있다.

2년을 넘게 지속했던 노래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은 항상 정해진 길로, 착실하게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자란 나와는 180도 다른 이들이었다. 하고 싶은 말은 직설적으로 하며, 술 마시고 왁자지껄 노는 걸 좋아하는 타입. 평생을 살면서 그런 타입의 사람들과 친해질 일이 별로 없었던 나는 아주 짧은 사이에 그들에게 많은 정을 들이고 말았다. 한 가지 취미로 묶인 모임이어서 그런지 우리들 사이엔 유대감이 끈끈했기 때문에 정이 드는 건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화끈한 성격답게 타인의 험담을 너무 쉽게 했고, 어떤 이념이나 가치관을 저열하게 깎아내리기도 했다. 하루는 한 사람이 자신의 전 여자친구 이야기를 꺼내자 다 함께 얼굴도 모르는 여자를 성적으로 조롱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이건 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게는 나서서 "그건 잘못된 거야."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선비니, 진지충이니 하는 재미 없는 사람이 되어 찬물을 끼얹기는 싫다는 비겁한 마음이 컸다. 그런 일들이 하나둘씩 쌓이게 되면서 나는 차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들의 거침없는 성격을 좋아했지만 결국 그 거침없는 언행이 거리감을 만든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내가 왜 인연을 끊기로 결심했는지 모를 것이다. 어쩌면 나를 두고 이런저런 오해와 추측과 은근히 내비치는 험담을 나누었을 수도 있다. 함께하는 시간 동안 수없이 보았던 것처럼. 생각해 보면 이런 글을 쓰는 것 역시 결국 나도 그들의 험담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겠지만.

어쩌면 즐겁게 남을 수 있었을 인연이 이렇게 끝나 버리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마음이 무겁다.


지난 달 그만둔 직장도 결국 이렇게 되기는 했지만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애초부터 나쁜 사람들이었다면 1년 7개월도 다니기 힘들었을 테다. 분명 서로에게 힘이 되는 순간이 있었고, 배울 점도 많았고, 진심 어린 유대를 나누기도 했다. 몸과 마음은 상했지만, 그래도 좋은 인연이라고 생각했기에 마무리는 잘 짓고 싶었다. 대표님과 실장님, 대리님께 조금 이른 크리스마스 카드를 남기고 온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쨌든 좋은 기억도 있으니까.

주변에 일을 그만두기까지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모두들 입을 모아 편을 들며 나 대신 욕을 해 줬지만, 나는 한 번씩 이렇게 답을 했다.

"그래도 나쁜 사람들은 아니었어... 사람은 좋은데 일이 이렇게 되었을 뿐이지."

인연을 끝까지 좋게 이어갈 수만 있었다면야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이미 그만두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연은 언제나 어렵다. 어쩌면 나는 인연을 종잡을 수 없기 때문에 사람을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올해는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 설령 금세 멀어지고 상처받는 일이 생기더라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런 인연을 아주 많이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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