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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수 Feb 10. 2022

누구나 자랑스러운 한때가 있다

나도 그렇다.

우리 기관 에이스 격인 상담사가 면담 요청을 해왔다.


"팀장님, 아무래도 센터에 민원 넣을 것 같아요.."

"왜? 누가?"

"지금 상담하다가 잠시 나왔는데 상담실에 있어요. 팀장님 불러 달래요. "

"그래? 근데 왜?"

"제가 자기를 무시한대요"

"뭐에 대해서 그렇단 거야?"

"채용정보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지금 당장 취업 가능성이 높은 곳을 골라서 정보를 주곤 했는데 그동안 말 없다가 오늘 막 쏟아내네요."

"어떤 부분이 불만이란 건데?"

"급여도 낮고, 쉽게 말해 자기랑 수준이 안 맞는 곳만 찾아서 준다고.... 자기를 무시하는 거래요.. 근데 그렇게 형편없는 곳도 아닌데... 청년 친화 강소기업이라 나와 있는 중소기업 중에는 그래도 근무조건이 나은데 그러네요."


청년 친화 강소기업이란 강소기업 중 초임, 근로시간, 복지혜택이 우수해서 청년들이 근무할 만한 중소기업이라는 뜻이고, 강소기업이란 고용유지율 및 신용평가 등급이 높은 중소기업, 임금체불이 없고 산업재해율이 낮은 우수 중소기업을 뜻한다.


내부망에서 상담 일지를 확인했다.

<여. 30세. 인문학 전공. 언어연수 경험有. 교내 활동 약간. 대기업 인턴 경험. 컴퓨터 활용능력 자격증/ 한국사 자격증 보유. 졸업 후 CPA 및 공무원 공부>


이런 민원 건이 기관 밖으로 나가기 전에 수습하는 것이 내 역할 중 하나이다.


늘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피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다. 하고 싶은 말 다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고 최대한 몸을 낮추고 목소리와 표정을 부드럽게 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 악성으로 넘어갈 수도 있고 다행히 수습될 수도 있다.


우선은 무엇보다 한껏 고조돼 있을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그다음 이야기로 이어질 수 있다.

천천히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가 얕은 미소를 지으며 신중한 태도로 마주하고 앉았다.


"저를 만나고 싶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참여자는 팔짱을 끼고 의자 등받이에 최대한 비스듬히 기댄 채 테이블과의 사이를 두고 멀찌감치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방어적인 자세.


"네."


짧은 대답만 하고는 입을 닫아버리고 만다.


"상담 과정에서 불편한 점이 있으셨다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제가 공부를 하다가 시간도 오래 걸리고 해서 집안에 눈치도 보여서 취업 준비도 병행해야 할 것 같아서 찾아온 건데 상담사가 너무 일방적으로 취업하라는 식으로, 그것도 겨우 연봉 3,000만 원도 안되는 그런 일자리 정보를 계속 주면서 지원을 해보라고 해서 자존심도 상하고...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닌 것 같으니 그냥 여기서 중단 시켜 주세요."


상담 중단은 기관이나 참여자 둘 다에게 별로 좋지 않다. 기관은 위탁 수수료를 받지 못하고, 실적도 마이너스이며 참여자는 중단 후 3년까지 재참여가 안된다. 적절한 선에 타협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러셨군요. 마음 상하신 것 먼저 대신 사과드립니다. 도와드리려고 한 것이 오히려 마음을 불편하게 해드린 것 같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감정이 상했을 때는 무조건 가라앉혀야 한다. 흙탕물이 맑아지려면 소용돌이를 멈추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 그래야 무거운 찌꺼기는 아래로 가라앉고 맑은 윗물을 볼 수 있다.


".........."

"공부랑 취업 준비랑 같이 하신다고 들었는데 많이 힘드시죠.."

".. 네.. 뭐.. 집에 눈치도 좀 보이고요. 그래서 공부만 고집하기가... 적당한 곳 있으면 그냥 취업할까 생각하다가 온 거라서요. 그런데 생각보다 해야 할 것이 많기도 하고 상담도 자꾸 와야 하고..."


팔짱을 풀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시군요. 중단해 드릴게요. 그런데 규정상 널티가 있어서 말씀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중단이 되면 3년까지 재참여는 힘듭니다. 혹시 중간에 계획이 바뀌어서 꼭 필요한 훈련을 지원받고 싶을 때 지원이 대폭 줄어듭니다. 자기 부담금이 커집니다."


"..... 할 수 없죠 뭐. 지원해 준다더니 뭐가 복잡하네요."

"네. 아무래도 이 모든 운영비가 세금이다 보니 운영원칙에 있어서 엄격한 편입니다. 공무원 준비하시니 세금이 얼마나 민감한 부분인지 잘 아시죠? 하하"


이제 돌려세워야 한다. 중단만은 막아야 한다.


"그런데 제가 좀 들여다봤더니 이제 한 번만 더 오시면 직접 방문해서 하는 상담은 안 하셔도 되겠던데요? 그리고 훈련을 받으실 것 아니면 바로 구직활동 기간이라고 해서 자유롭게 시간을 두고 기간이 만료될 때까지 문자로 제공되는 채용정보만 받아보시면 됩니다. 혹 필요할 경우 지원서류,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나 면접 컨설팅만 유선으로 받으셔도 되고요."


"구직활동 기간이 어느 정도인데요?"

"최소 3개월, 최대 6개월입니다."

"그래요..."


"네. 그동안 시간 여유를 좀 가지면서 취업 준비를 좀 더 적극적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아예 공부에 다시 올인할 것인지 판단하시면 어떨까요? 어차피 방해가 되지도 않는데 괜히 페널티를 받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잠시 갈등하는가 싶더니


"그럼, 나머지는 팀장님이 해주세요. 그 상담사랑은 더 하기 힘들 것 같아요."


눈빛이 완고하다. 설득당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것 같다.


"그러시죠. 제가 지금은 상담은 하지 않고 있긴 한데 저랑 하시다가 나중에 구직에 적극적으로 임할 생각 있으시면 그때 잘하는 상담사로 바꿔 드릴게요. 원래 담당하는 상담사도 잘하시는 분이긴 한데 다른 잘하는 상담사로 하시면 되겠네요."

그렇게 다행히 수습이 되었다. 바뀐 것 하나 없는 수습이지만 민원까지 안 간 것도 어디며, 중단 안한 것이 어디인가.


그날 좀 더 많은 대화가 이어졌는데 본인이 처한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어려움에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 가장 컸다.


외고를 다니고 대학도 비록 재수는 했지만 명문대를 들어갈 때까지는 집안의 자랑이었는데 어느 순간 낙오자가 돼버린 것 같고, 학교 동기나 친구들이 하나둘씩 공기업이며 대기업에 취업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전문자격시험에 합격하는 동안 본인은 '고작' 3,000만 원도 안 되는 이름 없는 회사 채용공고나 보고 있다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담당 상담사 급여도 3,000만 원이 안된다는 건 몰랐을 것이다.


이후에 몇 차례 스스로 알아본 채용공고에 지원하는지 이력서, 자기소개서 컨설팅을 메일로 의뢰하곤 했는데 어딜 지원하는지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어느 순간 뚝 끊기더니 내가 연락을 해도 더 이상 연락을 받지 않으면서 의무 상담 기간은 종료되었다.


가슴에 남아있는 몇몇 참여자 중 한 사람

취업 시즌이 되면 한 번씩 생각나는.

누구나 그런 시절이 있지 않을까

자기가 가장 자랑스러웠던 한때가.


그것이 때로는 약이 되기도 하지만 독이 되기도 한다는 걸

알면서도 벗어나기 참 힘든 그런 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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