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직이지만 신입 무기 계약직입니다 (3)
의료계 중소기업인 B사의 홍보팀 계약직으로 입사한 나는 전문적인 홍보 업무를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차 있었다. 그러나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는 게 나에게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인수인계가 끝난 이후부터 나는 황당한 일들을 연속으로 겪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혹시 내가 무한상사를 촬영 중인 건가?'라는 웃지 못할 의문을 품은 적도 있었다.
먼저, 전임자가 떠난 후 내가 혼자가 되자 나의 직속 상사인 과장이 나를 불러 말했다.
우리 회사 홍보팀은 내가 메인이니, 계약직은 업무량이 많지 않아서 내일부터는 출근하면 오전에는 콜센터에서 근무해 줘야겠어요.
콜센터 업무를 겸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구인 페이지에도 면접 때에도 들은 적이 없었다. 나는 당황스러웠고 찰나의 시간 동안 머리를 정리하고 과장에게 침착하게 (최대한 따지지 않는 말투로 이야기하고 싶었다) 왜 내가 홍보팀에 취직을 했는데 콜센터 업무를 해야 하는지 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과장에게 돌아온 대답은 "계약직"이었다. 내가 계약직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회사에서 필요한 업무를 그때그때 맡아서 할 수밖에 없고, 그게 싫으면 회사를 그만 두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나에게 콜센터 일이 싫냐고 수없이 물었다. 싫다고 물으면... 싫지는 않았다. 그게 아니라 정확하게는 싫은지 좋은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싫다 좋다 할 것 없이 나는 아직 홍보팀 업무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 업무를 가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하라면 해야지...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싶지 않았고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그렇게 오전에 출근을 하면 먼저 회사 콜센터에서 근무를 하게 됐다. B사의 콜센터 규모는 잘 갖춰 있었지만 고객 문의 수도 많았기 때문에 항상 일손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홍보팀으로 입사한 나는 엉겁결에 오전 시간, 혹은 콜센터 직원이 휴무를 내는 날에 대신 콜센터 업무를 하러 가야 했다.
고객이 왕인 우리나라에서 서비스직으로 근무한다는 것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 나도 콜센터 업무를 하면서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소리를 지르는 고객, 욕을 하는 고객, 상사를 바꾸라고 하는 고객 등 여러 진상 고객들을 만나야 했다.
내가 그런 진상 고객들을 처리하는 경우가 생길 때마다 과장은 콜센터로 쪼르르 달려와서 나에게 "이렇게 고객 니즈를 파악할 수 있으니 홍보팀 업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나름의 위안의 말을 해줬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은 콜센터 업무 서포트에서 그치지 않았다. B사 건물 1층에는 회사에서 관리하는 편의점이 있었는데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갑자기 출근을 못하는 날이면 과장의 명령으로 나는 갑자기 편의점 업무도 봐줘야 했다. 다행히 많은 손님이 오지는 않고 사내 직원들이 이용하는 곳이어서 바쁜 곳은 아니었지만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자꾸 다른 부서 일을 서포트하는 일을 주로 하자 다른 부서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기분이 들었다. 콜센터 업무를 하면서 다른 팀에 문의 사항이 있어 문의 메일을 보내거나 하면 답변이 오지 않거나 알아서 처리하라는 성의 없는 답변을 받는 일은 부지기수였고, 아침이나 점심시간에 스쳐 지나가며 만나는 직원들에게 목례나 가벼운 인사를 건네도 인사를 씹히는 경우가 수도 없었다.
나는 정작 홍보 업무는 제대로 배우지도, 하지도 못하고 회사의 필요와 과장의 편의에 따라 회사에서 동네북이 되어가고 있었다.
회사 내 입지가 좁다 보니 타 팀으로부터 무시를 당하는 일들이 잦아졌지만 우습게도 그런 상황들도 점점 익숙해지고, 콜센터 업무나 다른 부서의 서포트를 하는 일에도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직 B사에 다니는 것은 나에게 메리트가 있었고,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기는 했지만 내가 하는 업무들이 힘들어서 고되거나 적어도 몸이 아플 정도로 일을 해야 하거나 하는 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당한 일들은 그 정도에서 끝이 나지 않았다.
나는 과장과 함께 홍보팀 방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사내 공사를 한다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회사 옥상에 있는 다락방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다. 나는 이때 무한상사에서 무한도전 부서가 일을 잘 못해서 회장님이 화가 나서 옥상행을 당한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여기가 진짜 무한상사인가?'
옥상 다락방에서 근무하는 것에도 익숙해져 가고 있었는데 몇 달 지나고 나서는 다락방도 공사해야 한다고, 갑자기 과장은 다른 부서에 책상 하나를 더 넣어서 들어가고, 나는 무려 서버실로 책상을 옮겨야 했다.
서버실에 IT팀이 아니고서 들어가 본 사람이 있을까?
나는 정말 좁고 어두운 서버실 안에 내 책상 하나를 간신히 욱여넣고 그 자리에서 업무를 봤다. 서버실은 환기가 안되고 항상 에어컨을 틀어놔야 해서 너무나 추웠기에 근무 환경으로써는 최악이었다.
그때쯤 사내에서 내가 불쌍하다는 얘기가 돌고 있다는 걸 얼핏 들었다. 과장은 먼지가 많이 날리니 건강 상할 수 있다고 나에게 마스크를 건네줬다. 감사드려야 하는지... 웃어야 하는지 모르는 상황들은 계속해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