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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단지 Oct 07. 2021

영영 닿을 수 없는 맛

저녁거리를 찾아 냉장고 이구석 저구석을 뒤지고 있었다. 냉장고 저 귀퉁이에 뭔가 돌돌 말아진 하얀 봉지가 보였다. '내가 저걸 언제 넣어뒀지...' 기억에도 없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게 뭐지?' 봉지를 풀었다. 깐 마늘 몇 알이었다. 지난날 어머니가 봉지를 풀었다 묵었다 하며  마늘을 꺼내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 손에 들려있던 그 마늘 봉지였다.


어머니는 생멸치조림을 해주시겠다며 장을 한가득 봐오셨고 마늘도 한 망태기는 될 듯 많이도 사 오셨었다.  써도 써도 줄지 않을 거 같던 마늘은 어머니 손이 한 번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쑥쑥 내려갔고 어느새 바닥이 보이고 몇 알 남지 않게 되었다.  그 몇 알 남지 않은 마늘이 몇 달이 지났는데도 무르지도 않고 오히려 싹을 틔워 봉지에서 자라고 있었다. 이것도 다 못쓰고 가셨구나 싶어 괜히 마늘이 애처로워 보였다. 너 사들고 온 할머니가 가신 건 아냐고 맥없는 눈으로 마늘에게 물었다. 할머니 손에 찧여 반찬이나 되지 뭐하러 이리 덜렁 남겨졌냐고 딱하게 봤다. 마늘도 여러 날 기다리다 지쳐 싹이라도 틔운 거겠지...


이제 더는 어머니가 마늘을 찧고 다지고 썰어 요리할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 밑바닥에 구멍이 난 듯 찬기가 숭숭했다. 어머니는 언제 다시 밥을 하시려고 마늘을 저리 돌돌 말아 넣어두셨을까? 분명 두고 가실 거면 며느리가 못 찾을까 싶어 "며느라 마늘 엿따 찡궈두마" 하셨을 건데 뭘 해주시려 저 몇 알을 아껴 구석에 두셨던 걸까...


내게 봄은 그냥 오지 않았다. 생멸치조림 정도는 먹어줘야 '아! 봄이 왔구나' 알아 챌 수 있었다. 봄이면 어머니는 빠트리지 않고 생멸치조림을 하셨다. 비쩍 마른 몸으로 멸치 다시물 낼 때에나 쓰이는 멸치가 봄에는 탱탱한 살을 반짝이며 어엿한 생선의 모습으로 자판에 깔렸다. 은빛 살은 갈치만큼 은은했고 등빛은 고등어만큼 푸르렀다. 어머니는 매콤한 생멸치조림에 항상 마늘쫑을 같이 넣어 자글자글 양념 베이게 졸이셨다. 찐빵 속의 앙꼬처럼 마늘쫑은 멸치조림에 빠질 수 없는 꼭 넣어야 하는 재료였다. 그래서 시장에 할머니들이 마늘쫑을 펼쳐눟고 '마늘쫑 사소. 마늘쫑 사소"하는 소리는 내게  "멸치조림 사소. 멸치조림 사소" 하는 소리로 들렀다.


자글자글 조려진 마늘쫑은 쫄깃하면서도 물컹한 것이 양념까지 잘 베어져 멸치조림을 한 맛 더 나게 했다. 씹을 때마다 매콤하고 달큼했으며 퍼석퍼석할 뻔한 멸치 살을 마늘쫑이 촉촉이 감싸주니 둘이 같이 먹으면 모자란 것 없는 딱! 좋다 할 맛이었다. 깊으면서도 뭉근한 양념은 멸치에도 스며들고 마늘쫑에도 배어들었다.  멸치의 비린맛은 마늘쫑의 풋맛이 잡아주고 마늘쫑의 빈 맛은 멸치의 담백함이 채워줘 멸치조림은 꽉 차게 맛났었다.


그날도 어머니는 자갈치시장에서 생멸치와 마늘쫑을 사 오셨다. 봄에만 먹을 수 있기에 시장에서 반짝거리는 생멸치를 봤다 하면 철을 놓치지 않고 꼭 사셨다. 그것도 가시를 다 발라내어 포뜬 멸치로 사셨다. 멸치를 통째로 쓰면 먹을 때 가시가 꾹꾹 씹히고 목에도 걸려 넘길 때 성가시다 하셨다. 통통한 멸치는 물에 씻고 초록빛의 마늘쫑은 썰어 차례차례 올려가며 바닥에 깔고 간장, 고추장, 액젓, 된장, 마늘을 썩어 만든 양념을 그 위에 골고루 바르셨다. 센 불에서 팔팔 끓이다 불을 낮춰 약불에서 뚜껑 덮어 뭉근하게 조리셨다. 한참을 끓여 자작자작 양념이 졸여지면 멸치에도 마늘쫑에도 양념이 배어들었다.


어머니는 항상 상추도 같이 사 오셨는데 집 앞 마트에서 파는 상추가 맘에 안 들어서였다. 상추가 다 그게 그거 아닌가 하겠지만 어머니가 찾는 상추는 따로 있었다. 잎이 치마처럼 너풀너풀거리고 넓적하니 커서 멸치 넣고 마늘쫑 넣고 밥까지 넣어도 옆구리 터지는 거 없이 쌈 싸져 입으로 쑥 들어갈 수 있는 상추여야 했다. 그 상추와 멸치조림이 식탁에 올라갔던 저녁 날이었다.


그날 어머니는 신이 나게 저녁밥을 하고 계셨다. 이제 곧 일 마치고 올 거라는 아들 전화를 받고서 손이 더 바빠지셨다. 나물도 조물조물, 멸치조림도 보골보골, 밥솥도 칙칙... 부엌이 시끌벅적했다. 손주들 먹이고 아들 먹일 저녁밥을 한상 푸짐하게 차리고 계셨다. 맛있는 냄새는 창문 새를 삐집고 나가 복도를 가득 채웠고 '이 무슨 맛 좋은 냄새지?' 하며 오 가는 사람 코를 킁킁거리게 했다. 문 열고 들어오는 아들을 보고서 어서 손 씻고 앉으라며 어머니 마음이 더 바쁘셨다. 어서 멸치 쌈 사다가 먹어보라는 재촉이었다. 아들이 좋아하는 것이기에 아침부터 바쁘게 장 봐서는 가방에 넣어 짊어지고 오셨고 집에 오셔서도 아들이 오기 전에 얼른 끓여놔야지 하며 달음박질치던 것이 이제야 끝나고 이젠 먹는 모습을 보려고 앉으셨다. 그렇게 앞에 앉으셔선 먹는 모습을 보고 계셨다. 아들 쌈에 멸치도 더 얹어주고 고추도 넣어주며 많이 먹어라 말씀하시며 좋아하셨다.

 

푸짐하게 쌈 싸 먹던 생멸치조림을 먹지 않은지 여러 해가 되어간다. 그 맛은 혀끝에 잡힐 듯 말듯한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입안에서 맴돌기만 한다. '이 맛이었나? 저 맛이었나?' 어제도 그 어제 어제 먹었던 맛들 속에서 '딱 이 맛이야!'라며 콕 짚을 맛을 찾을 수가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가 해주신 생멸치조림을 먹기만 했지 만든 적은 한 번도 없기에 잊힌 그 맛을 흉내 낼 수 조차 없는 형편이다. 옆에서 찬찬히 보고 미리서 좀 배워둘 것을... 늦은 후회가 된다.


일 년이 가고 다시 일 년이 가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그 맛은 영영 닿을 수 없는 맛이 돼버릴 거 같다.    

봄이면 생멸치조림 한 번쯤먹어줘야 하건만...

생멸치조림 없는 봄은 봄이 아닌 듯 어딘가 서운한 구석이 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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