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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단지 Oct 06. 2021

군밤 두 봉지를 사들고 길을 잃었다

5월도 지나고 6월 어느 날이었다 . 가만히 있어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더위가 시작되어 긴 팔은 짧은 팔이 고 운동화도 갑갑해졌다. 여름이 오는 길목에 바람이 지나갔다. 어디선가 흐릿하니 많이 맡아본, 익숙한 냄새가 날아와 내 코를 스쳤다. 부드러우면서 따뜻한 것이 코 아래로 들어왔다. 친숙하고 낯익은 냄새는 내 속을 덮었고 내 눈은 주위를 살폈다. '이 여름에 웬 군밤 냄새야. 아닐 거야. 군밤을 굽기에는 계절이 맞지 않지. 겨울에나 먹을 군밤이 이 여름에 있을 리 없지...' 속으로는 이리 말하면서도 눈은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보았다. 아니라면서 찾기를 바라는 맘이었다.     

   

 '뻥튀기'라 크게 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파란색 트럭 옆으로 자루도 보이고 둥그런 기계 같은 것도 보이고 소쿠리 몇 개가 졸졸이 자판에 얹힌 것도 보였다. 저 속에 담긴 게 혹시 밤인가? 얼마쯤은 믿으며 얼마쯤은 의심하며 걸어갔다. 소쿠리에 것들이 점점 보이기 시작하고 노릿노릿한 것이 군밤이 맞았다. 겉은 거뭇거뭇하게 거슬려있고 속은 노랗게 입 벌려진 것이 잘 구워진 군밤이었다. 방금 구웠는지 소쿠리에 소복소복 담긴 밤에서 김이 술술났다. 아저씨는 지나가는 손님을 잡으려는 듯  "방금 구워서 따끈따끈 맛있어 잡숴봐" 하며 밤을 하나 건넸다. 초여름인 날씨에 더운 걸 받아 들고 껍질 벌려 속에 숨은 노란 속살을 꺼내 씹었다. 밤 향기는 구수했고 입안은 달달했다. 혀 위에서 구르며 이리저리 뭉그러져서 목구멍을 지날 때, 밤은 뜨끈한 것이 되어 내 속으로 내려갔다.  

지금이 여름인 것도 그래서 겨드랑이 새로 땀이 축축해지는 것도 햇볕이 뜨겁다는 것도 상관없었다. 그저 군밤을 만난 게 반가웠다. 군밤은 내게 그냥 밤이 아니었으니...


"며느라 방금 택배 부쳤다. 아마 내일이면 갈게다. 매생이랑 겨울초랑 시금치 낙지젓갈이랑 군밤도 넣었다. 하나씩 까서 애들 입에다 넣 줘라""

자갈치시장에 파는 것들이 싱싱하고 양도 많고 싸다면서 어머니는 종종 먹을 것들을 보내주셨다. 그때마다 잊지 않고 구석에 끼여 같이 딸려온 게 군밤이다. 애들이 잘 먹는 거라며 어머니는 군밤을 애지중지 챙기셨다. 추석이면 시장에 파는 밤은 다 사 오신 듯 냄비에 수북이 넣어 삶으셨다. 다 삶아진 밤이 뜨겁지도 않은지 맨손으로 잡아 내어 쟁반에 올려선 칼로 반을 뚝 가르셨다. 작은 숟가락을 들고선 밤 속을 파내어 후후 식히셨다. 내손에 든 밤은 뜨겁지 않아도 손주 입에 들어가는 밤은 뜨거울까 걱정이 되셨나 보다. 기다리느라 벌어진 손주 입으로 밤이 들어가는 걸 보시곤 "맛나지" 하시며 좋아하셨다. 다시 밤 속을 살살 파선 후 불어 식혀 둘째 입에도 넣어주셨다.


오물오물 받아먹는 입을 좋아라 하며 지켜보셨다. 내 입에 들어가는 게 없어도 괜찮은지 밤을 파선 떠먹이기 바쁘셨다. 입 벌리고 있는 손주들을 보고 벙긋벙긋 웃으셨다. 손주들 먹이는 재미에 빠져 내손 뜨거운 것도 잊고 그 뜨거운 것들을 덥석덥석 잘도 잡으셨다. 속이 텅텅 비어진 밤 껍질은 수북수북 옆에 쌓여가는데도 밤 달라 할머니 옆에 붙은 손주들은 여전히 곁에 앉아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밤 먹이랴 얼굴 쳐다보랴 엉덩이 두드리랴 어머니가 바쁘셨다. 바쁘신 게 아니라 신이 나 보였다. '먹이는 게 저리 좋을 실까?' 하며 밤 한 바가지를 더 담아왔다. 어머니에게 가을이 좋은 건, 추석이 좋은 건 손주들에게 먹일 밤이 그득해서 인 거 같고 손주들이랑 옹기종기 붙어 밤 파먹는 재미가 있어서 인 거 같고 뜨거운 것도 덥석덥석 잡으며 할머니 노릇을 제대로 할 두툼한 손이 있어서인 거 같았다. 내가 해줄게 이리 많구나 싶어 좋아하시는 거 같았다.


할머니가 먹여준 밤으로 배를 채운 아이들이 옆에서 떨어지면 그제야 어머니도 밤 몇 개를 파 드셨다. 손주들 실컷 먹인 게 흡족하신지 밤을 몇 개 안 드시고도 배부르다 맛나다 하셨다. 손주들이 흘린 밤 부스러기도 손으로 슥슥 쓸어 담고 다 먹지 않은 밤 속도 마저 파면서 밤 껍질을 쟁반에 담으셨다. 이걸 다 애들이 먹었구나 싶으신지 만족스레 보시곤 "아이구! 이 맛에 내가 밤을 사지" 혼잣말을 하시며 일어서셨다. 과자야 빵이야 애들 좋아하는 게 집 앞 마트에 가면 널렸건만 굳이 이 밤 파 먹이는 수고를 하셨다. 봉지 하나 뜯어주고 그릇에 부어주면 끝일 간식거리를 일을 만들어가며 해주셨다.


밤사다 씻어서 삶고 잘라 밤 속 파내고... 이런 자잘한 손놀이가 하고 싶으셨나? 손놀이로 손주들이라 놀고 싶으셨나? 떠먹이는 할미와 받아먹는 손주 그렇게 주고받는 오붓한 시간을 많이 많이 갖고 싶으셨나 보다.


군밤 두 봉지를 받아 들었다. 잠시 어쩔 줄을 몰라 멍청히 길 한복판에 섰었다. 맘이 시무룩해졌다. 밤을 만나 반갑던 마음도 애들에게 군밤을 먹일 수 있어서 좋았던 마음도 쭈글 해진다. 종이봉지를 부스럭거리며 열었다. 반질반질 잘 구워진 밤이 소복이 담겨있었다. 갇혀있던 김이 살폿 빠져나오더니 잠깐 얼굴에 닿고 이내 날아갔다. 더운 날 밤까지 안아 몸은 덥기까지 하건만 내 속은 자꾸자꾸 시리기만 했다.

밤을 들고 집으로 가야 하는데 집을 잃었나... 길을 잃었나... 어디로 가야 될지 몰라 흐리멍덩하니 길 한복판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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