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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단지 Oct 01. 2021

국수 불어 터지겄다 며느라

어머니는 나물을 기막히게 잘하셨다. 정월대보름날 시댁에 갔을 때다. 상에 졸졸이 놓인 나물을 보고 놀랬다. 취나물, 말린 호박나물, 고사리나물, 토란 나물, 무나물, 시래기나물, 시금치나물, 배추 나물, 도라지나물... 열 가지도 넘는 나물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깨까지 솔솔 뿌려져 그릇그릇마다 소복이 담겨있었다. 이게 죄다 나물인가 싶게 눈이 휘둥그레졌고 저걸 다 손수 하신 어머니 정성에 놀랐다. 어머니는 솜씨가 좋아 지지고 볶고 무치고 조리고... 손만 댔다 하면 뭐든 뚝딱뚝딱 음식이 되어 나왔다. 김치도 맛났고 된장, 고추장, 간장도 맛났다. "암만! 내가 식당을 하면 손님 줄이 도로까지 길게 늘어져 있을 게야' 라며 지나가는 말로도 자랑을 하셨다. 정말 빈말이 아니라 그 맛난 음식을 나만 먹는 게 아까웠다. 이런 건 세상 사람들이 다 맛봐야 된다며 난 어머니 음식 솜씨를 젤로 생각했다.


식당에 갈 때면 이것도 음식이라고 내놨나 싶을 때가 여러 번이었다. 어머니가 하면 백배는 더 맛나겠다 싶어 돈 주는 것도 아까웠다. 여럿 음식 중에서도 어머니의 특기는 단연 나물이였다. 짜지도 않고 밍밍하지도 않고 감칠맛이 살살 돌면서 살캉살캉 식감도 잘 살리셨다. 나물은 잘 삶는 게 첫 번째라 하셨다. 너무 삶으면 홍태가 되어 씹을 게 없고 너무 안 삶으면 질겨서 먹지를 못하고 딱 됐다 싶은 적당한때를 알 마작 하게 잡아야 된다셨다.


시금치나물은 끓는 물에 살포시 담갔다 빼서 초록빛은 여전히 남은 채 조물조물 무치셨다. 시금치 잎을 씹을 때마다 단맛은 쭉쭉 빠져나와 달큰했고 향은 진했다. 무나물은 약간 투명하니 살캉살캉 단맛이 적당히 도는 그때를 딱 맞춰 불을 끄셨다. 별 양념도 없이 소금과 마늘만 넣어 조린 무나물은 소박한 단맛이 돌았다. 미역도 미지근한 물에 담가 쓴맛 짠맛을 우리고 꼬돌꼬돌한 미역이 나른해지면 건져서 국간장이랑 참기름, 깨만 넣어 무치는데도 시원한 바다향과 짭짤한 간이 어울려 맛났다.


고사리는 할 말이 많다. 어머니는 고사리 사랑이 유독스러웠고 고사리 욕심도 있으셨다. 집에는 늘 마른 고사리가 있었고 어디라도 다녀오셨다 싶으면 꼭 고사리를 사 오셨다. 자갈치시장 그 넓은 가운데서도 하동 고사리가 맛나다며 꼭 그 집만 고집하셨다. 고사리는 물이 팔팔 끓을락 말락 할 때 불을 끄고 마른 고사리를 물에 팍 담가 그대로 뚜껑 덮어 하룻밤을 재우셨다. 다음날이면 통통하니 물오른 고사리는 나물 하기에 좋게 불려졌고 독기도 빠졌다. 통통하니 불려진 고사리에 멸치육수랑 마늘을 넣어 자글자글하니 졸이면 쫄깃쫄깃 씹히는 고사리 새로 진한 멸치육수가 배어 감칠맛이 제대로 돌았다.


이런 것들은 어머니가 장사를 하신다면 분명 음식장사일 거라 짐작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늘 부엌에서 고소한 참기름 냄새 자작한 찌개 냄새를 풍기셨으니 그게 마땅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길에서 채소장사를 하신 댔다. 겉과 속이 맞지 않아 갸우뚱하게 하는 일이었다. 깻잎, 상추, 쪽파, 대파... 이런 야채를 도매로 떼와 소매로 파 신다 하셨다. 사람만 좋았지 장사꾼처럼 계산에 밝지도 영악스러운 구석도 없는 어머니가 돈 달라는 말이나 제대로 하실 수 있으려나 어설픈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머니잩에 가면 부엌에서 풍기던 음식 냄새가 코끝에 선명한데 그걸 지우고 찬 바람 냄새를 풍기시겠다 하시니... 맘을 저릿저릿 아프게 한 일은 토요일 오후의 도로 옆 큰 길가에서의 한 장면이었다.


어머닌 큰 길가에서 고추 팔고 감자 팔고 시금치 파는 할머니들 새에 앉아 상추를 수북이 담아두고 앉아계셨다. 좋아서 한다고는 하셨지만 그래도 저리 앉아 계신걸 보니 마뜩잖았다. 겨울바람이 차서 내복은 두 겹씩 껴입었고 속이 툭툭한 몸배바지도 입으셨다. 추운 날씨에 단도리하시느라 윗도리도 몇 꼅, 조끼도 몇 겹 끼어 입어 몸집이 두리뭉실해져 있었다. 팔 엔 토시를 끼고 흙 묻은 장갑까지 기고선 쪽파 껍질을 까고 앉은 어머니를 보니 영락없는 시골 할머니였다. '우리 어머니가 왜 저러고 계셔?' 싶은 게 안쓰럽다기보다 화 같은 게 올라왔다. 많이 파셨냐는 말보다 추운데 뭐하러 이러고 계시냐는 말이 먼저 튀어나왔다. 살랑살랑 원피스 입고 다니시던 고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왠 늙은 할머니가 저리 앉아있나 싶어 속이 상했다. "아이구 며느라 오늘 상추 한 박스를 다 팔았다"며 해맑게 웃고 있는 얼굴이 애잔하게 보였다.


그런데 한 달도 못해 어머니는 장사를 접으셨다. 역시나 늘 퍼주기 좋아하는 어머니는 나날이 손해 보는 장사를 하셨다. 상추도 한 줌 더 얹어주고 끝이 무르고 시든 상추는 못다 팔고 내다 버리셨고 받는 돈이 미안해 깎아주시니 남을 턱이 없었다. 돈 벌자고 시작한 장사가 빚만 늘어갔고 버티다 버티다 안 되겠는지 "이제 고만할란다. 장사도 아무나 하는 게 아녀" 하시며 다시 부엌으로 돌아오셨다. 역시나 어머니가 계실 곳은 부엌이고 밥하는 자리였다.


그래도 어머닌 하다만 장사에 미련이 남아 국수장사를 하면 되려나 싶어 '상을 이리 두 개 놓고 장롱은 2층으로 올리고 그러면 앉을자리는 나오겠다'며 머릿속에서 가게를 접었다 폈다 하셨다. 분명 어머니 음식 솜씨면 국수가 불티나게 팔릴 거 같았다. 손맛 좋고 마음 좋아 한번 온 손님은 다시 올게 안 봐도 선하게 그려졌다. '영감만 먼저 가면 내가 하고 만다!' 마음도 단단히 먹으셨더랬다. 이 집에서 야채 사고 저 집에서 조기 사고 옆집에서 멸치 사다 장사하면 딱 됐겄다' 싱싱한 채소랑 생선 살만한 집도 다 알아두셨다. '영감만 가면 나도 나 하고 싶은 거 함 해봐야지' 기다리셨다. 그런데 그것 하나 못해보시고 어머님이 먼저 가셨다. 그 하고 싶은 밥장사를 거기서는 하고 계시려나... 국수야 밥이야 원 없이 퍼주고 먹여주고 배 채워주고 그러고 계시려나...


그때 장사를 그만두실 때 내가 말씀드렸다. "어머니! 좀만 있어보셔요 제가 돈 벌면 어머니 식당 하나 차려드릴게요." 믿거나 말거나 말이었지만 어머닌 말뿐이어도 좋다며 "너나 돈 벌어 옷이나 사 입고 좀 꾸미거라"며 도로 내편을 들어주셨다. 그 말을 하고도 몇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난 식당은 고사하고 내 옷 하나 사입을 벌이를 못하고 있다. 옆에 계셨다면 기다리느라 속도 타고 애가 타셨을 거 같다. "며느라 언제쯤이겄냐? 이제 곧 되겄냐? 국수 불어 터지겄다" 어머니의 장난 썩인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네네 어머니 곧 되어요 곧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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