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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단지 Sep 29. 2021

이걸 어찌 버려

여름 장마가 지난 햇볕 쨍한 날이었다. 습한 옷장을 말리려 문을 활짝 열었더니 눅눅한 냄새가 가득했다. 옷 사이사이를 벌려 통풍시키고 몇 벌은 꺼내 햇볕에 말렸다. 옷들 틈에서 노란 고운빛이 눈에 들어왔다. 막내가 유치원 때 입던 한복이다. 이젠 작아져 더는 입지 못하게 되어 몇 번을 버리려다 말고 버리려다 말고... 그러느라 여태껏 옷장에 걸려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햇살에 저고리의 노란빛이 뽀얗게 반짝였다. 노란빛은 사알 사알 떠올라 주위를 물드렸고 이내 방안을 환하게 만들었다. 나는 저고리에 치마도 대어보고 소매 끝 색동도 가만가만 만져보았다. 진한 분홍빛의 붉은 치마도 살펴보았다. 그러자 그날의 기억들이 저 멀리서부터 잔물결처럼 밀려왔다. 


"며느라 도경이도 한복 사줘야 안되겄냐?" 설날이 다 돼가던 날이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다섯 살 무렵이면 한복을 마련해주셨고 설이고 추석이면 큰 애와 작은 애는 한복을 차려입고 할머니 댁으로 갔었다. "아이고! 한복을 입혀놓으니 왕자님들이네. 이리 훤하네!" 하며 어머니는 흡족하니 좋아하셨다. 이젠 막내도 다섯 살이니 한복 입을 나이가 되었다. "도경이 한복은 내가 시장 가서 골라볼란다. 이쁘고 고운 게 얼마나 많은지..." 어머니는 손녀 입힐 한복 고를 재미로 벌써 맘이 들떠계셨다. 보는 것도 좋지만 내 손으로 사 입히는 재미는 비할게 못됐을 거다. 


부산진시장에 가서 사신다고 하셨다. 가게들마다 쪼로롬 걸어놓은 고운 한복들 틈에서 어머니는 많이도 바쁘셨을 거다. '뭘 살까? 뭐가 예쁘려나?' 머릿속으로 이리 대어보고 저리 대어봤을 어머니가 훤했다. 앙증맞은 한복들은 '저 좀 보세요. 제가 이뻐요' 하며 깜찍한 아우성을 치며 저를 봐달라 손짓했을 거다. 이 가게, 저 가게 발품 팔아 다니시며 눈으로 이걸 입혔다 저걸 입혔다 하며 여러 벌을 대어보셨을 거다. 드디어 어머니 눈에 '그래! 이거 좋겠다. 요거 됐다!' 싶은 한복이 들어왔을 거고 다섯 살이 입을 것이라는 말로 치수도 고르셨을 거다. "오늘 도경이 한복 택배로 보냈다. 입혀보거라 이쁠 게야" 어머니 목소리는 벌써 들떠 있었다. 나는 한복을 기다리느라 궁금했고 어머니는 저 한복을 입은 손녀의 모습이 어떠할꼬 궁금하셨을 거다. 


상자를 열었다. 하얀 종이를 한복 위에 곱게 덥어 보내셨다. 종이를 걷어내니 저고리의 노란빛과 소매의 고운 자수가 보였다. 하얀 동정으로 저고리 목덜미는 새하얗고 연한 빨강, 파랑, 초록의 색동은 은은한 것이 소매 끝 자수와 잘 어울렸다. 저고리 아래엔 진한 분홍빛 치마가 소담하게 앉아있었다. 분홍빛이 과하지도 촌스럽지도 않은 '예쁘다'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색깔이었다. 그 많은 한복들 틈에서 어머니 눈에 들만큼 참하게 보였다. 이걸 고르느라 여러 날 시장을 들락날락하셨을 거고 어쩌면 몇 해전부터 '저 쪼꼬만 한 것이 크면 고운 한복을 입혀봐야 할 텐데 언제 클꼬...' 마음에 두고 계셨을지도 모른다. 치마까지 꺼내 저고리랑 대보니 노랑빛과 분홍빛이 춤을 추듯 잘 어울렸다. 은은한 색동도 적당히 예뻤다. 한복을 꺼내니 방이 환해졌고 내 얼굴마저도 화사한 빛이 도는 듯했다. 


상자 아래에 노란 것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싶었다. 어머니가 복주머니도 같이 넣어주신 거였다. 조글조글 주름진 둥근 복주머니가 매끈해 보였다. 금빛으로 반짝거렸고 가운데엔 빨간 글씨로 "복"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네가 복주머니구나 싶었다. 꺼내 들었다. 안에 뭐가 있는 듯 빳빳했다. 주름을 펴서 주머니를 열었더니 만원이 있었다. '복주머니를 주는데 그냥 주면 안 되지 복도 담아줘야지' 하며 넣으셨을 거다. 그리고 그 복이 달아나지 않게 입구를 꽉 여 매어 '울산까지 잘 가거라' 하며 상자에 조심히 담으셨겠지... 어머니 손이 보이는 듯했다. 진한 할머니 사랑이 담뿍 담긴 복주머니가 묵직하게 들렸다. 복주머니는 손녀를 살갑게 챙기는 할머니 마음이었다. 


'어머니두 참... 뭘 이리 챙기시는지...' 복 받고 살아라는 할미의 지극한 맘이 느껴져 내 맘도 아리 해졌다. 복주머니를 다시 만져본다. 손끝이 알알해온다. 손녀 머리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매만져주시던 어머니 손이 느껴졌다. 복주머니 속 만원은 여전히 담아져 있다. 꺼내지도 쓰지도 못한 채 어머니 손길이 닿았던 그대로 가만히 있다. 그날 이후로 시간이 멈췄다. 


'이 한복을 고르느라 얼마나 설레고 행복하셨을까?' 어머니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복주머니랑 한복! 아마 난 이걸 평생 버리지 못하고 품고 있을 거 같다. 설이고 추석이면 꺼내보고 맞춰보고 울었다 웃었다 할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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