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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단지 Oct 12. 2021

봄아! 너 오지 마라

"저녁 먹고, 경주 가자"

신난 아이들은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게 숟가락질을 해댔다. 어머니도 국물에 밥 말아 후루룩 마시듯 저녁을 퍼뜩 드셨다. 남편이 저녁 먹고 어머니랑 아이들과 버스 타고 경주로 넘어오라고 했다. 퇴근길에 만나 벚꽃길을 걷자는 전화를 막 끊은 후였다. 저녁 먹고 별일 없이 조용히 보냈을 밤이 요란스러워졌다. 서둘러 저녁을 먹고 나갈 준비를 했다. 봄이라지만 아직은 쌀랑한 밤이라 아이들도 옷을 한 겹씩 더 입혀 자크를 목까지 올렸고 어머니도 도톰한 옷으로 입으시며 밤마실 나갈 준비를 하셨다. 오늘은 어머니도 싱크대에 저녁 그릇을 담가 두기만 하시고 장갑은 끼지 않으셨다. 다른 날 같으면 숟가락 놓기가 바쁘게 설거지를 하셨을 거지만 그날은 콧구멍에 바람 넣을 생각으로 마음이 바쁘셨다. 불끄고 문잠그고 껑충껑충 뛰어 계단을 내려갔다.


어머니는 양쪽으로 손자들 손을 하나씩 잡고 저만치 앞에 먼저 걸어가셨다. 어머니 걸음은 신이 났었다. 아이들보다 어머니 발이 더 앞으로, 앞으로 내디뎌졌고 아이들도 잰걸음으로 풀쩍풀쩍 뛰며 쫓아갔다. 어머니 어깨에 울러맨 가방도 신바람이 나선 달랑달랑 같이 뛰고 있었다. 뒤에서 보고 있자니 고피 풀린 망아지가 따로 없었다. 무슨 얘기를 주고받는지 손주들이랑 마주 보며 웃었고 손도 더러 놓고선 박수를 쳐가며 깔깔 웃으셨다. 저런 흥이면 경주까지도 휑하니 날아갈 듯이 보였다. 행여 날 두고 갈까 싶어 어서어서 발걸음을 따라붙여 정류장에 도착했다.


아이들은 버스가 오려면 아직 멀었다는 걸 알면서도 오는 버스마다 목을 빼고 쳐다봤다. 우리가 탈 버스인지 아닌지 보고 싶어 한대 한대 확인하느라 일어섰다 앉았다를 놀이처럼 하고 있었다. 언제오나, 이제오나 버스 기다리는 시간도 즐거웠다. 정류장의자에 쪼로미 앉은 어머니와 아이들 모습이 퍽이나 다정했다. 다리도 달랑달랑 거리며 장단이 맞았고 요리저리 고개 돌려 눈 맞추며 웃는 얼굴도 정다웠다. 드디어 기다리던 버스가 오고 우리는 맨 뒷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멀지도 않은 경주 가는 길이 먼 여행을 떠나듯 설레었다. 어두워진 거리에서 볼 것이라곤 깜깜한 밤이 다였지만 그것뿐이어도 마음은 마냥 좋았다.


까만 창을 보고 있던 어머니가 한숨 쉬며 말씀하셨다. 애들이 꼬물꼬물 어릴 때였다며 지난 이야기를 해주셨다. 이렇게 까만 밤에 의식 잃고 부르르 몸 떨며 경기난 애를 들춰업고 약방으로 정신없이 뛰어가던 날도 있었다고... 애를 키운 지 얼마되지 않은 새댁이었을 때라 놀란 마음에 맨발로 뛰어다니셨다고... 그렇게 살았던 세월도 있었다며 아픈 이야기를 해주셨다. "말로 해도 다 못하지, 고생도 고생도 그런 고생이 없었지..." 배고프다는 아이들에게 강냉이 한 봉지를 사다 먹이고 물 먹여 재우던 날도 있었다고 하실 땐 눈이 그렁그렁 해지셨다. 애들 배 굶긴 걸 생각하면 아직도 미안하다며 또 한숨을 쉬셨다. 까만 밤을 보고 있으니 새까맣게 속이 타던 그 밤이 생각난다 하셨다.  


그 세월을 어찌 살았을까? 나보다 더 젊은 새댁이었을 어머니는 그 시간을 어찌 견뎠을까? 난 어머니 손을 꼭 잡고 까만 창을 같이 바라봤다. 봄은 깊었고 밤은 까맸다. 경주에 도착하니 까맣던 밤은 낮보다 환했다. 벚꽃을 비추는 불빛은 형형색색이 화려했다. 거리는 낮인가 밤인가 분간이 안되게 사람들로 붐볐고 다들 다정한 걸음으로 봄날을 즐기고 있었다. 벚꽃잎들이 고운 빛으로 몸단장해선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 아래를 어머니와 걸었다.


길은 싸락눈을 뿌린 듯 희끗희끗했고 어머니와 나는 벚꽃잎이 내려앉은 길을 가만가만 걸었다. 꽃잎은 조용히 떨어져 곱다무리한 꽃길을 만들어줬다. 화사하게 켜진 밤을 걷는 어머니얼굴은 분을 바른 듯 고왔다.  군데군데 켜진 가로등 아래로 벙그러진 꽃봉오리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어머니 얼굴이 설핏설핏 보였다. 그리 좋으실까... 밤마실 나온 강아지마냥 신이 나선 여기저기 보기 바쁘셨고 이리저리 걷기 바쁘셨다. 긴 겨울 끝, 꽃샘추위도 보내고 마침내 닿은 봄이 반가워 오늘은 봄날을 실컷 즐기리라 작정하신 듯했다. 더러 아프기도, 더러 고달프기도 했던 옛 기억은 봄바람에 뒤섞어 멀리멀리 아리송하게 날리신 듯했다.


'이젠 좋은 일만 있으면 좋겠어요, 이젠 웃을 일만 있으면 좋겠어요...' 어머니 웃는 얼굴을 오래오래 보고 싶었다.

"나오니까 너무 좋아요 어머니. 우리 봄마다 와요" "그러자꾸나 며느라" 어머니도 나도 벚꽃처럼 마음이 몽글몽글거렸다. 그다음 봄에도 우린 벚꽃길을 같이 걸었고 해마다 이렇게 걷자며 약속했다. 어머니는 "아이구 살다 보니 이리 좋은 날도 있구나" 하며 좋아라 하셨다.


그렇게 좋아하셨는데... 그다음 봄은 없었다. 봄이 왔는데 어머니가 없었다. 같이 걷자던 길은 봄이 와서 환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환하게 웃어줄 어머니가 안 계셨다. 봄이 와도 봄이 아니었고 꽃이 펴도 꽃이 아니었다. 어머니 하나 빠졌다고 봄이 이리 쓸쓸해지나 싶었다.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던 옆 자리가 텅 비었고 어머니를 잡던 손은 잡을 게 없어 허전했다.

여름가고 가을가고 겨울 지나면 봄은 다시 오건만, 봄마다 오자 약속했던 어머니는 오지 않으신다.

해마다 봄이 온대도 봄날 같은 봄이 더는 오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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