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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Feb 27. 2021

중년의 신사

길 위의 사람과 행복 


" 어젯밤에 속이 불편하다 하셔서 비트 조림을 만들어봤습니다. 비트가 위에도 좋다고 해서요.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너무 감사합니다. 어제 매실차도 너무 감사했는데요. 이거 꼭 다 먹을게요! "

" 계란은 유정란이에요. 매일 새벽마다 저희가 키우는 농장에서 가지고 옵니다. 건강한 계란이니 꼭 드세요."


정갈하게 담긴 음식을 보니 느긋해진다. 늘 급하게 먹던 아침, 또는 커피 한 잔으로 때우던 여느 때와는 다른 아침이 되고 있다. 접시를 앞에 내려놓으며 하나하나 설명을 해주시니 급할 수가 없다.

아침의 속도를 한 템포 늦춰주는 그의 출현은 예상치 않은 순간이다. 계획에 없던 여행은, 계획에 없었기에 뜻밖의 기회를 준다.


일요일 낮. 오전에 있던 일을 마무리하고 끝나자마자 공항으로 갔다. 제주를 다녀온지 한 달 남짓밖에 안되었기에 느닷없는 제주행은 소풍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루 여행이다. 이 또한 처음이다. 제주도를 하루만 다녀오는 일은. 

엄마는 어느 날 늦은 저녁.

" 제주도 두부집이 생각나네."

툭 한마디를 내게 던졌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비행기 티켓을 바로 구매했다. 서울 가는 거리나, 부산 가는 거리나, 별 차이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스쳤으니. 즉흥적인 결정은 행동을 빠르게 한다.

숙소도 별 고민할 것이 없었다. 하루 머무르는 것이니 공항과 가까운 곳으로 정하고 평소 가지 않던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계획 없던 여행이니 다르게 움직여도 좋지 않을까 싶었다.

도착하자마자 엄마가 원했던 그곳. 신의 한모에서 두부 요리를 먹었다. 동생도 서울에서 엄마의 호출로 합류했다. 한 달 반 만에 온 식구가 마주 앉아 밥을 먹는 것 자체가 기쁨이었다. 엄마의 한 마디로 뜻밖의 시간에 뜻밖의 장소에서 마주 앉은 우리는 한 끼 식사에 안도와 행복을 느낀다.

사실 그 전날 점심때부터 체했던 나는 조심스럽게 음식을 먹었는데, 한 번 막혔던 속이 다시 꽉 막히는 느낌이 든다. 행복한 한 끼를 먹고 속이 불편하니 민폐를 끼치는 이 불편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엄마는 " 그놈의 속이 툭하면 왜 그럴까. " 하며 한숨을 내쉰다. 결국 길 가에 차를 세우고 까스활명수 두 병을 사서 벌컥벌컥 들이켰다.


체크인을 하면서 직원에게 탄산음료가 있는지 물었다. 얼마나 속이 엉켰는지 소화제로도 속이 가라앉지 않았다. 마침 직원 옆에 있던 나이 지긋한 중년의 신사가 내게 매실차를 마셔보겠냐고 권했다.

약으로 준 것이니 계산도 하지 않겠다는 그의 호의가 그날의 감사한 일로 마무리되기도 하였다.

밤사이 속은 가라앉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창 밖에 보이는 푸른 바다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와 하늘이 맞닿아 내게 마음은 경계 없이 그러해야 한다고 아침부터 일러주었다.


엄마는 하나밖에 없는 손자를 뚫어져라 보며 정갈하면서 기품 있는 에그 베네딕트를 한 입 잘라 자신의 입이 아닌 손자 입에 쏙 넣어주었다.

그 광경을 놓치지 않고 대표가 다시 다가왔다.


" 손자 보시는 눈이 너무 애틋하십니다. 저도 아들 둘을 다 키워 놓고 보니 할머니 마음이 어떤지 알겠습니다. "

그렇게 대화가 시작되어 중년의 신사는 자신의 사생활을 뜻밖의 손님에게 털어놓았다.


그는 금융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었다. 이십 대를 미국에서 보냈고, 오랫동안 투자업계에 종사한 그는 제주도 호텔에도 투자한 사람으로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내려와 이 곳을 살핀다고 하였다.

큰 아들은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그곳에서 결혼하였고, 둘째 아들은 영국에서 공부하여 현재 통역 장교로 한국에서 군 복무 중이라고 하였다. 미국과 영국의 장단점을 짧은 시간 안에 굵직하게 내게 설명하기도 하였다.

그의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으며, 목소리는 중후했다. 손짓과 표정은 무게감이 있으며 타인에게 안정감을 준다.


" 어떻게 그런 마인드를 가지셨는지 너무 궁금해요. 아드님 너무 잘 성장해서 많이 뿌듯하실 것 같고요."

내 말에 그는 몇 초 정도 말을 멈추고, 휴대폰에서 두 아들의 사진을 찾아 내게 보여주었다.

훤칠하다. 눈빛이 아버지를 닮았고, 딱 벌어진 어깨와 다부진 체격으로 건장한 청년이 나의 눈을 사로잡았다.

" 너무 멋지네요.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할 것 같아요."

다 가진 듯하였다. 재력도, 명예도.

잘 키운 자식은 더할 나위 없는 자산이 되어 누가 보더라도 부러울 것이 없는 중년이었다. 그를 부러워할 수도 있겠다. 동경할 수도 있겠다. 사람 마음을 들뜨게 하니. 그때, 그는 나를 정신 차리게 한다.


" 사실, 아내가 오래전에 지병으로 일찍 세상을 떴습니다. 젊어서부터 아들 둘 멀리 보내 놓고 이렇게 살았는데 그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요. "


나는 잠시 침묵하였다. 에그 베네딕트를 한 조각 자르던 중에 포크와 칼을 내려놓았다.

그는 홀로 두 아들을 키웠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재혼도 생각해본 적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하였다. 그 긴 시간들의 속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인생도 한 장의 그림으로 표현이 안될 것이다.

십분 남짓한 대화였다. 오랫동안 사람을 알아도 아무 생각이 안들 때가 있건만.

중년의 한 남자로부터 내가 어떻게 나이 들어갈 것이며, 어떻게 내 아들을 대할 것인지 다시 가다듬을 수 있던 시간이 되었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마인드로 자식을 대하고, 삶을 살아왔던 그에게서 나는 뜻밖의 사유를 하게 된다.


길 위에서 만난 한 사람.

뜻밖의 여행은, 뜻밖의 만남과 뜻밖의 시간을 내게 만들어준다.

나는 돌아와 며칠 동안 찰나의 만남, 그 중년의 신사를 되감기하며 그 날의 시간을 남겨 놓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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