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상한 나뭇가지에 봄의 시그널이 보인다. 허리선까지 오는 묘목엔 새끼손톱보다 작은 초록 잎사귀가 촘촘히 돋아나 있고, 벚꽃 나무에는 꽃봉오리가 몽글몽글, 길가엔 벌써 초록 풀이 가득해져 봄을 터트릴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 혹시나 그들의 시작을 놓칠까 아침마다 동넷길을 이리저리 헤매며 봄이라도 쫒아다니고 있으니 하루가 다시 짧아지고 있다.
사는 게 재미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매일 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도 있지만 몸이 약해지고 나서부턴 삶의 의무와 책임만으로 '낙'없이 살고 있으니 지금을 누리지 못한다. 가끔은 아무것도 하기가 시. 르. 다. 하며 어린애처럼 혼잣말로 투정을 부리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매일 눈뜨면 사는 걱정을 끌어안고 있으니 꾸역꾸역 또 하루를 산다. 그래, 안다. 배부르고 게으른 소리라는 걸.
다른 사람은 이런 생각이 밀고 올라올 때 무엇을 할까, 아니. 시간 가는 게 아까울 정도로 삶이 즐거운 일은 무엇이 있을까... 지금의 나는 걷는 것. 멍 때리는 것 외엔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고 있다. 죄스럽다.
그래. 이러고 있으니 내가 재미가 없구나 싶다.
혼자 무언가에 끓어오르고 삭히는 삶에 익숙하여 생각을 부풀리기도 끊어내기도 쉽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행복과 즐거움으로 살까 가끔 궁금해할 때도 있지만 이걸 풀어낼 방법은 없었다. 온갖 소모임을 찾아다니기엔 열정이 없다. 그러다 어느 게시판에서 누군가의 글이 시선을 끌었다.
'무슨 낙으로 사세요?'라는 제목이었는데, 부부간의 사랑도 정으로 바뀌고, 자녀들도 무지 말을 안 듣는 나이가 되어 있고, 직장은 여전히 바쁘고, 드라마나 영화도 재미없으니,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낮과 밤을 보내는지 궁금하다는 글이었다. 수십 개의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대부분 40대에서 60대 사이의 사람들이 답을 했다.
사람들의 답은 이랬다. 재테크와 선후배, 친구들과 노는 재미, 유튜브로 여행 영상이나 구글 맵을 보며 상상의 여행을 하거나, 커피 한잔 두고 수다 떠는 재미, 식물을 키우는 재미, 영화나 드라마 정주행 하기, 뒤늦게 시작한 공부,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 운동 혹은 날씨 좋은 날 걷기, 반려견, 반려묘 키우는 행복 등이었는데 여러 번 확인해도 내가 미처 알지 못한, 기발한 삶의 낙은 나오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근심 걱정으로 인생의 낙을 고민할 겨를이 없어 드라마나 식물 키우기, 여행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그저 부럽다는 이도 있었다. 나도 삼십 대에 삶이 절벽에 걸쳐져 있다고 여겼던 시절,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떠는 사람들의 모습을 창밖에서 구경만 하며 내 삶의 낙을 찾는 것은 사치로 여겼으니 근심 걱정으로 어깨가 무거운 사람들의 댓글은 사는 게 어렵고 고통이라는 것을 자각하게 한다.
자신의 삶의 낙엔 무엇이 있는지 알려주는 것보다는 되려 나이가 들수록 이 삶을 어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댓글로 채워지는 걸 보면서,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싶은 동질감?을 느끼니 안도의 헛웃음이 나기도 한다. 보물 찾기라도 하듯 기대했던 마음이 완전히 꺾인 것은 의외의 댓글에서 시작되었는데, 그의 말은 이렇다. 특별한 즐거움이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고나서부터는 주어진 일상과 허락된 시간에서 감사를 느끼고 웃으려고 노력하며, 사소한 대화로 주변을 살피며 조용히 하루를 마무리하는 일상이 삶의 낙이라고 생각한다는 답글에 한참 동안 머물렀다. 그의 말에 동의하던 몇몇은 젊은 시절 삶이 버라이어티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날들이었기에 단순한 삶을 지향한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렇다. 즐거움은 영원하지 않았다. 한 때 자식 키우는 낙이 내게도 있었고, 일상을 비껴간 여행이라도 하면 그래, 이게 인생의 낙이지 하며 다시 자리로 돌아와 선택한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던 시간이 있었다. 친목 모임에 재미가 들어 와인과 등산, 음악 방송 등 생소한 경험으로 까르르 웃던 시간도 있었지만 그것도 영원하지 않았다. 자기 계발에 꽂혀서 배움의 낙에도 젖어봤지만 이것으로 삶을 채우기는 여력이 부족했다. 그 낙이 있어도 삶의 걱정과 괴로움은 끊임없이 침범했고 하루가 멀다 하고 노심초사하는 일들은 여전히 내 주변을 머물렀으니 배우고 즐길 힘이 모자랐는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무료하다고 표현하게 된 것은 어떠한 일이든 감응하는 일이 줄어든 탓도 있다. 크게 놀라는 일도, 크게 슬픈 일도 없어져 슬퍼도 더 이상 슬프지 않고, 아들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어 느닷없는 연락이 오거나 행여 부모가 쓰려졌다는 소식에도 담담하고 냉철한 내 모습에 가끔 경악을 금치 못하는데, 제삼자는 그런 나를 이성적이라고 본다.
단순하게 '너무 일을 많이 겪어서 그럴 뿐이야.' 하고 더 이상의 해석을 못하도록 막지만, 삶이 나를 단련 시킨 것인지, 삶이라는 단어가 족쇄가 된 것인지 더 이상 크게 감응하지 않는 내가 때때로 안타까운 것은 왜일까. 삶의 낙이 없다며 다소 자조적으로 돼가는 것은 아닐까 염려스러웠던 순간, 지나가는 행인들의 말속에서 무료한 이 삶에 감사하려고 한다.
그저 무탈한 하루가 지속되어 단조로운 삶 속에서 무엇이 소중한지 다시 알아가고 있다.
가슴 뛰는 일은 없지만, 이 또한 일상이 평온하다는 증거 아닐까. 물론 마음 한 구석에 여전히 살아갈 것을 걱정하고 있지만, 이 걱정을 부풀려서 오늘을 좀먹게 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지는 않으니 그런 자세로 봄을 맞이하는 나를 조금은 다독여본다. 햇살과 바람을 벗 삼아 길을 걷는 것을 낙으로 삼는 것도 꽤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으로 삶을 채울까로 고민하며 삶을 고단하게 사는 것보다는 비록 소박한 삶이어도 괴로움을 싫다 하지 말고 즐거움을 마다할 줄 아는 삶이 되면 어떨까 생각하니 초조함과 조바심도 사그라든다.
행복은 지금이라고 한다. 수년 전 고속도로 휴게소에 야심한 시간에 들어갔을 때 수십여 대의 화물 트럭들이 밤을 짊어진 채 삶과 맞서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정신 차렸던 순간이 아직도 기억 파편에 또렷하게 남아있다.
나와 다른 삶의 낙을 찾아다니느라 내일의 시간을 기다리지 말고, 내게 온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고 있다는 낙으로 그저 행복하면 좋겠다. 그럼에도 삶이고 그럼에도 살아가는 삶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