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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댄스댄스댄스 Jan 03. 2024

지나친 자기혐오는 지나친 자기애에서 비롯된다.

가면증후군(Imposter syndrome)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여느 때처럼 안 읽히는 논문을 억지로 부여잡다 포기하고 사람들과 수다를 떨었다. 나는 지금 이곳에 내가 있어도 되나 하고 스스로 의문이 들 때가 있다고 말했다. 수업을 듣거나 대화를 나누며 이곳에 굉장히 탁월한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걸 느꼈고, 동시에 별것 아닌 내가 여기에 잘못 존재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있다고. 바다로 흘러간 민물고기처럼 이곳에 제대로 적응 못하고 죽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다고.


영어가 우리말보다 익숙한 한 문학 전공의 박사과정 선생님이 유려한 발음으로 말했다.


“그거 Imposter syndrome이네.”


난 처음에 그 발음을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Imposter. ‘사기꾼’이란 뜻을 가진 이 단어가 붙은 증후군. ‘가면증후군’이란 심리학적 개념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가면 증후군(임포스터 증후군, Impostor syndrome)’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자신이 뛰어나지 않다고 여기며 불안감을 느끼는 마음으로, 언젠가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다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현상이다.

출처: https://kpmg.com/kr/ko/home/newsletter-channel/202302/mind-care.html


혹시나 채점에서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지. 아니면 여기 면접을 봤던 교수님 중 누군가가 면접심사지에 점수를 잘못 기입하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교육청 담당 장학사가 무언가 실수로 명단에 내 이름을 추가했을 수도 있다. 그런 실수가 쌓여서 어울리지도 않는 나를 여기 이곳에 데려다 넣은 건 아닐까. 수업을 들으며, 이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나며 그런 감정이 꾸준히 들었다. 물론 꾸역꾸역 나름 열심히 과제를 하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언젠가 나의 이 무능이 탄로 나서 중간에 탈락하고 손가락질을 받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몇 번 있었다. 임용이 된 첫 해 첫 학교에서 공강 시간에 복도를 지나다가 교실 안 수업하는 다른 선생님과 학생들을 보면 위화감이 들었다. 얘들이 나 같은 놈한테 수업을 받아도 되나. 아이들 쓰기 평가를 채점하거나 시험문제를 내면서 내가 이런 걸 채점하고 출제해도 되나. 혹시 자격이 부족한 나 때문에 어떤 피해가 발생하는 건 아닌가 느꼈다. 계급이 오르고 분대장을 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군대에서도 그랬다. 내가 이런 초록 견장을 어깨에 달고 분대를 인솔해도 되나. 이들의 휴가나 외박에 대해 간부들과 대화를 나눠도 되나 하는.


그래서였을까. 나는 겸손함을 넘어 자기 비하, 자기혐오라 여겨질 만큼 스스로를 낮추는 경우가 많았다. 누군가 칭찬을 하면 손사래를 치고, 나의 장점을 들으면 아니라고 변명하기에 바빴다. 실제 그런 성향은 여기 이곳에 글을 쓰면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물론 잘난 척한 적도 가끔 있지만, 스스로에 대해 부족하다거나 모자라다거나 별거 없다거나 하는 평가가 담긴 글이 더 많다. 누군가는 겸손이 힘들다고 하지만, 나에겐 겸손은 너무 쉬웠다. 가면 증후군이 원인인지, 애초에 겸손하려는 성향이 내재해 있는지, 아니면 어릴 때의 경험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나는 스스로를 부족하고 어리석게 여겼다. 슬프게도.


그리고 최근에 인터넷을 기웃거리다 나의 폐부를 푹 찌르는 문구를 마주쳤다.


지나친 자기혐오는 지나친 자기애에서 비롯된다.


스스로를 모자라게 여기고 싫어하는 이유가 스스로를 너무 사랑해서라는 이야기에 발가벗겨지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보통의 나는 겸손하지만, 깊은 밤 혼자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방구석에서, 공강시간에 아무도 없는 교무실에서 때로 나는 자뻑에 빠진다. 내가 작곡하고 미디로 녹음한 곡을 수십 번, 수백 번 돌려 들으며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탄성을 지르기도 하고. 촬영한 기타 연주나 드럼 연주 영상을 돌려 보며 이 정도면 꽤 잘 치는 거 아냐 피식 웃기도 한다. 때로는 아내나 가까운 친구 몇 앞에서 나는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잘난 체하기도 한다.


나의 실패나 결함을 들킬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공간 속에서, 안전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나는 덜 겸손해진다. 내가 심할 정도로 머리를 낮추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혹시나 실패할 경우, 타인으로부터 받을지도 모를 손가락질과 비난에 상처받을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기제였다. 나약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미리 밑밥을 까는 행위였다. 작은 실수를 했을 때 멋쩍게 웃으며 여기저기 떠벌리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군생활에서 선임들의 책망이 두려웠고, 혹시나 수업할 때나 시험문제에서 오류가 생기는 게 무서웠다. 대학원 수업을 못 따라갈지 모를까 하는 불안해했던 이유도 유약한 내 자아를 너무 사랑해 보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법을 잘 모른다. 그래서 타인에게든 스스로에게든 잘못된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며 상처 입힌다. 아내나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그들을 구속하고 의심한다. 자식의 안녕을 위해 과잉 보호하거나 요구를 모두 들어주다 육아에 실패하기도 한다. 때로는 공감능력을 잃고 나르시시스트가 되어 타인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을 너무 학대하고 혐오하면서 사랑하는 스스로를 보호하기도 한다. 마치 나처럼.


가끔은 나 자신에게 채찍질 당해 여기저기 누더기가 된 내 자아를 좀 토닥여줘야겠다. 잘난 체와 겸양 사이의 균형감을 잡기는 어려울 테지만, 너무 주눅 들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너무 과시하는 꼴불견도 보이고 싶지는 않다. 항상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며 너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지 않기를 바란다. 마음이 건강했으면 한다. 올해 새해 소망을 빌자면, 대충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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