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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댄스댄스댄스 Jul 17. 2024

카뮈와 아버지와 나.


알베르 카뮈는 거창한 이름이다. ‘거창한’이란 표현에는 다소 부정적인 냄새가 묻어있지만, 나에겐 그렇다. 아마 철학자로서, 작가로서 그의 위상에 매료되어 그의 글을 탐미하려 했지만 번번이 실패해서 일거다. 내 개인적인 부족함이 원인이지만 남 탓을 하고 싶은 못난 심보다. 그가 노벨상을 받은 3년 뒤에 교통사고로 죽기 전까지 집필한 ‘최초의 인간’은 그러나, 순수하게 이야기라는 면에서 내가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이었다.


‘최초의 인간’은 카뮈가 자신을 투영한 자크 코르므리란 인물의 유년 시절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완성하지 못해 뒷이야기가 있지도, 굵직하고 탄탄한 스토리 라인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어린 시절 커다란 집, 학교, 마을에서-그땐 모든 것이 거대했다- 그가 겪은 작은 사건의 나열뿐이다. 아마도 그 이야기가 나의 관심을 끈 것은 글에서 묘사되는 어린 시절의 장면들이 내 유년시절의 풍경과 같은 냄새를 띄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인간’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글의 극 초반이다. 자크 코르므리가 태어나는 이야기가 끝난 후, 40대가 된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자신의 아버지가 묻힌 묘지를 찾는 장면이 나온다. 묘비에 새겨진 생몰년을 본 그는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20대 중반에 생을 마감한 어떤 청년을 마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 앳된 젊은이의 유골이 묻혔다는 사실은 그에게 탄생에 대한 거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고, 그렇게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추억하기 시작하며 글은 흘러간다.


언젠가 묘 앞에 선 자크 코르므리의 모습이 내게 겹쳐졌고, 나는 나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물론 우리 아버지가 20대 중반에 생을 마감하신 것은 아니다. 내가 결혼한 직후 아버지는 환갑을 맞으셨고 60대 중반인 지금도 정정하시다.) 아마 결혼 후 첫 설명절을 쇠러 고향을 방문했을 때였다. 총각 때 고향을 내려가면 2층에 있는 동생 방에서 함께 자곤 했는데, 결혼했다며 부모님께서는 무리를 해서 아래층 도배, 장판을 싹 하고 창문을 샷시로 바꾸셨다. 새색시인 아내를 생각해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내 나이와 같은 낡은 주택은 외풍을 제대로 막지는 못했다.


추위를 달래려 나는 어머니께서 새로 장만하신 초록 책장에서 이것저것 꺼내 훑어보았다. 어린 시절에 썼던 여름방학 일기, 어머니가 읽으셨던 책, 동생의 졸업앨범, 연습장 등이 빼곡히 칸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쓰셨던 가계부+일기도 몇 권 있었다. 그날 쇼핑한 식재료 목록이라던가, 어머니의 얼마 없던 일정 같은 것들이 익숙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때로는 이제는 흐릿하게 바래진 영수증이 꽂혀있기도 했다. IMF로 아버지가 실직하시고 어머니께서 억지로 떠밀려 일을 시작하신 것에 대한 불안과 떨림 같은 기록도 있었다.


그리고 카뮈의 ‘최초의 인간’을 떠올리게 만든 기록도 있었다.


2월 9일 차가 고장이 났다. 새벽 4시에 대구에 가서 사고가 나, 8시까지 기다리고 렉카 불러 구미에 왔는데, 고치는데 90만 원을 달랜다. 하는 말이 이제 장사도 안 하고 취직을 하겠단다. 정말 속상하다.
혼자서 기다리면서 많이 울었다고 한다. 정말 가슴이 아팠다. 그래요. 당신이 싫다면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마음이 조금은 편안한 모양이다. 내가 당신 마음을 알아주니까?
더 기쁜 것은 우리 아들이 OO에 합격을 했다. 서울로 보내야 한다. 많은 생각이... 어찌하면 좋을까.


실직하신 아버지는 한 동안 마음을 못 잡고 주식투자로 퇴직금을 잃기도, 기원에서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내기도 하셨다. 때로 문 앞에 먼지가 가득 쌓인 등산화가 보인 적도 있었다. 어느 날 낡디 낡은 중고 트럭을 구입해 채소장사를 시작하셨다. 새벽 일찍 고속도로를 타고 대구 도매시장에서 채소를 사 오셨고, 당시 동네에 물건 판매상들이 틀어놓은 방송을 켜 장사를 하신 모양이다. 어머니께서도 일을 거드셨다. 때로 저녁 늦게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트럭에 남은 채소를 정리하러 나가기도 하셨다.


그러다 어느 겨울 새벽 부실한 트럭은 고속도로에서 퍼졌고, 나는 상상하기 힘든 두려움이 아버지를 덮쳐온 듯했다. 견인차를 기다리는 아버지는 어머니께 울먹이며 장사를 접자고 하셨고, 그냥 별 걱정 없이 취업을 하겠다고 하셨다. 어머니의 기록에는 아버지에 대한 위로와 내가 서울로 진학하게 되어 어떡해야 하냐는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 기록을 보며 이전에는 전혀 읽지 못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은 눈치챈 걸까? 당시에는 뿌연 막에 쌓여 우리 가족의 상황을 읽지도 못할 만큼 아둔했었는데. 뿌연 눈의 나는 아내에게 그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다 문뜩 내가 그때의 아버지 나이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손가락으로 어림잡아 계산해 보니 딱 그랬다. 저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했을지 상상이 안되었다. 막막했다. 답이 없었다. 용케 버티신 게 대단해 보였다.


그제야 아버지의 모습이 조금은 뚜렷이 보인 듯했다. 왜 그때 아버지가 공황장애로 약을 드셨으며 한 동안 운전을 힘들어하셨는지, 왜 장사를 그만두고 공장에서 일을 하셨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도, 그제 별세한 故현철의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 같은 곡을 좋아한 것도, 지금까지도 눈이 오면 운전 조심하라고 하는 잔소리의 이유도. 아버지로서 아버지가 아니라 한 중년 남자로서의 아버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어릴 때 본 아버지는 자신감에 넘쳤고,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거인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나처럼 불안하고, 좋은 일에 뿌듯해하며, 싫은 자리는 피하고 싶고,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에 힘겨워하는, 그런 인간이었다.


여전히 아버지와는 서먹하다. 아버지도 내게 무뚝뚝하시고, 나도 아버지께 무뚝뚝하다. 다만, 어린 손녀가 생긴 이후에는 영상통화를 자주 하려 노력하고, 시큰둥한 아이에게 할아버지께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드리도록 살살 구슬리기도 한다.


20여 년 전, 훈련소 퇴소하며 자대 배치로 막사를 떠나기 직전 상근 예비역들이 돌려받는 핸드폰을 사용해 집에 전화를 걸었다. 반가워하시는 어머니께는 건강히 잘 지내고 이제 자대로 간다고 씩씩하게 말씀드렸다. 그러나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때 왜 펑펑 울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간 길을 따라가다 보니 나보다 먼저 걸어간 이의 어깨가 축 쳐진 이유를 깨달아서이지 않았을까 싶다.


넥스트 - 아버지와 나 Part 1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16bLe-aYsSE

가사


아주 오래전 내가 올려다본 그의 어깨는 까마득한 산처럼 높았다.

그는 젊고 정열이 있었고 야심에 불타고 있었다.

나에게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었다.


내 키가 그보다 커진 것을 발견한 어느 날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서서히 그가 나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이 험한 세상에서 내가 살아 나갈 길은 강자가 되는 것뿐이라고 그는 얘기했다.


난, 창공을 날으는 새처럼 살 거라고 생각했다.

내 두 발로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라

내 날개 밑으로 스치는 바람 사이로 세상을 보리라 맹세했다.

내 남자로서의 생의 시작은 내 턱 밑의 수염이 나면서가 아니라

내 야망이, 내 자유가 꿈틀거림을 느끼면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기 걸어가는 사람을 보라 나의 아버지, 혹은 당신의 아버지인가?

가족에게 소외받고, 돈 벌어 오는 자의 비애와

거대한 짐승의 시체처럼 껍질만 남은 권위의 이름을 짊어지고 비틀거린다.

집안 어느 곳에서도 지금 그가 앉아 쉴 자리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내와 다 커버린 자식을 앞에서

무너져가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한 남은 방법이란 침묵뿐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은 아직 수줍다.

그들은 다정하게 뺨을 부비며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를 흉보던 그 모든 일들을 이제 내가 하고 있다.


스펀지에 잉크가 스며들 듯 그의 모습을 닮아 가는 나를 보며,

이미 내가 어른들의 나이가 되었음을 느낀다.

그러나 처음 둥지를 떠나는 어린 새처럼

나는 아직도 모든 것이 두렵다.


언젠가 내가 가장이 된다는 것.

내 아이들의 아버지가 된다는 것이 무섭다.

이제야 그 의미를 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그 두려움을 말해선 안 된다는 것이 가장 무섭다.

이제 당신이 자유롭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나였음을 알 것 같다.

이제, 나는 당신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랜 후에, 당신이 간 뒤에, 내 아들을 바라보게 될 쯤에야 이루어질까

오늘밤 나는 몇 년 만에 골목을 따라 당신을 마중 나갈 것이다.

할 말은 길어진 그림자 뒤로 묻어둔 채 우리 두 사람은

세월 속으로 같이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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