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40.
나이가 40이 넘어가서야 내 삶의 바이오리듬? 생애 주기? 의 규칙 같은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었다. 한동안은 균형감과 고양감이 샘솟는 때가 있다. 이럴 때에는 아침에 가볍게 몸을 일으키고, 무언가에 몰입하고, 꾸준히 운동하고, 어느 날 조용한 복도를 걸으며 피식 웃는 나를 발견한다. 이는 대략 두세 달 정도 유지되는 듯하다. 그러다 곧 침잠하는 때가 온다.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쑤시고, 아무것도 하기 싫으며, 스마트폰에서 도파민을 갈구하고, 결국에는 자신의 감정을 해치기도 한다. 그리고 꽤나 뿌옇고 메말라가는 감각 속에서 이런 시기가 도래했다는 것을 겨우 깨닫는다. 먹먹한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한 의지를 다지기는 쉽지 않다.
아마 7월, 여름방학이 오기 전이었을 것이다. 규칙적으로 달리기를 하였고, 매달리기와 팔 굽혀 펴기 등의 멘몸운동을 조금씩 시작하였다. 역량기반 교육에 대한 문헌 조사를 하며 오랜만에 논문을 훑었다. 교육을 모든 문제의 열쇠로 삼는 사회현상에 관한 다소 어두컴컴한 글도 상당히 구체적으로 구상하였다. 꾸준히 읽던 두꺼운 책들도 하나하나 덮었다. 예전에 읽었던, 그리고 아직 펴지 않은 책 표지를 새로 열며 독서량을 늘렸다. 단순히 지식을 갈구하거나 문학을 탐미하기 위한 독서는 아니었다. 인내를 시험하며, 적당한 정도의 고통을 감수하는 수양이나 채찍질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여름방학을 시작하며 명상을 시작했다. 사실, 지금까지 삶에서 마주하는 많은 스트레스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곤 하였다. 나름 논리적 인체, 합리적 인체, 유식한 체 하며 사회적 구조의 문제라느니, 진화의 과정에서 파생한 유전적 결과라느니, 운 이라느니 하며 혼자 지껄였다. 때로는 저명한 학자나 어려운 이론의 이름, 통계 같은 것도 어쭙잖게 언급하기도 하면서. 그러나 이런 논리는 스스로를 위로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역시나 40이 넘어서야 입바른 소리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의 문제였다. 모두가 아는 정답이었으나 새삼 새로운. 어떻게 마음먹을지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명상이 떠올랐다. 마음을 들여다 보기에 명상은 나쁘지 않은 시도였다. 몇 년 전 한 후배의 추천으로 읽었던 명상에 관한 책을 꺼내들었다. 명상이란 행위에 대한 종교적, 신비주의적 편견 때문이었을까. 그때는 고개만 끄덕이고 넘어갔었다. 하지만 이번엔 긍정적인 바이오리듬을 타고 있어서였는지, 40이 넘으며 무언갈 깨달아서인지. 마음이 닿았다.
마음 챙김(mindfulness). 용어 자체에서 새롭지만 익숙한, 그리고 강렬하지 않으면서도 따뜻하고 믿을만한 냄새가 풍겼다. 이 책은 마음 챙김 명상의 효과와 필요성에 대해 불필요하게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마치 책 자체가 명상을 하듯 담담하고 차분하게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해결하려고 하는 본능이 있다. 유목 채집의 시기 이는 생존을 위해 적절한 본능이었다. 맹수를 피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력으로 도망을 쳐 생존을 도모했다. 치타를 피해 달리는 가젤처럼. 이 상황이 해결되면 가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한가롭게 풀을 뜯을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부딪히는 일터에서의 문제, 관계에서의 문제, 정신적 문제는 즉각적으로 해결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 현재의 우리는 가젤처럼 문제를 재빨리 해결하고 한가롭게 풀을 뜯기가 어려워졌다. 그러나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이런 만성 스트레스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그 스트레스와 감정에 더 몰입하게 된다. 이 몰입이 방아쇠가 되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고통의 소용돌이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내가 아니다. 생각의 소용돌이에 갇히는 이 몰입(doing mode)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늘에 두둥실 떠서 나와 내 감정을 분리해 관조(being mode)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때, 호흡에서 시작해 내 몸을 샅샅이 훑어보는 명상은 신체가 현재 있는 그대로 존재함을 깨닫게 하고 나의 감정과 생각을 분리하는 첫걸음이 된다. 요즘 여기저기서 많이 쓰이는 ‘톺아본다’는 동사가 적절한 표현일까. 정수리에서부터 힘이 들어간 미간과 볼, 입술과 턱을 거쳐 목과 어깨, 날개뼈의 은근한 통증을 깨닫는다. 들숨과 날숨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과 배의 움직임, 두 팔과 손, 엉덩이와 허벅지를 거쳐 종아리와 발목, 그리고 발끝까지. 호흡 속에서 내 신체 곳곳의 감각을 느껴나가는 약 10분 정도의 시간은 그렇게 강렬하거나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40 평생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드라마틱한 변화는 없었다. 만성적으로 달고 사는 두통을 해결해 주거나 소화불량을 해결해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처음 명상을 한 후에 확연히 줄어든 목과 날개뼈의 통증만으로 충분했다. 이 작은 진통 효과가 지난 두 달여간 내가 명상을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또 다른 효과는 나의 바이오리듬이 침잠하기 시작한 최근에 나타났다. 운동을 거른 날이 늘고 있고, 살이 찌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커졌고,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짜증 내는 횟수가 늘었고, 스마트폰 의존증이 심해졌다. 그리고 고질병인 비교에서 오는 질투와 자괴감이 강렬해졌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좀 우스운 표현인데, 인간은 최강의 비교행위자(super comparing machine)다. 요즘 학교에서는 새 교육과정에 맞춰 교과서 선정 작업이 한창이다. 주변 지인 중에 집필자로 참여한 이들이 여럿 있어 이들을 질투‘했‘다. 석사과정을 함께 한 이들 중 유학을 선택한 이들의 연구업적이 부러’웠‘다. 얼마 전에는 이름만 알던 누군가의 글을 우연히 브런치에서 발견하였는데, 그가 출간 제안을 여러 번 받았다고 하여 자괴감이 들’었‘다.
이 모든 비교의 동사를 과거형으로 쓴 이유는,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소멸했거나 적어도 나를 더는 고통스럽게 하지 않을 정도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아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남을 질투하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나’도 있지만, 이제는 이를 관조하며 중재해 주는 ‘나’도 꽤 성장했다. 명상을 하며 내 안의 자아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좀 더 분명히 느끼고 있다. 관조하는 나를 앞으로 끄집어내어 스스로를 아프게 하는 나를 제지하고, 통증을 느끼는 나를 어루만져준다. 이게 명상 덕분인지, 나이가 40을 넘겼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원인 분석일랑 짚어치우자.
요즘 아이는 역할놀이에 푹 빠졌다. 상당히 진심이라 때로는 맞춰주기 힘에 부치기도 한다. 아이는 인어공주가 되기도 하고, 그냥 공주가 되기도 한다. 왕관과 귀걸이, 반지를 착용하고 드레스를 입어 샤랄라 한 바퀴 돈다. 아이가 공주가 되면 나는 왕이 되어 종이 왕관을 쓰고 목소리를 깔아야 한다. 때로는 아기토끼가 되어 앞니를 입술 밖으로 내고 당근을 찾는다. 자기 위해 굴을 판다. 그래서 당근 먹이기가 수월해졌다. 오늘 아이는 어린이집 선생님이 되었고 나를 아이로 만들었다. 선생님이 된 아이는 나를 재우기도 하고, 장난감 놀이도 시켜주고, 혼내기도 하고, 스마트폰으로 사진도 찍어주고, 간식도 주었다. 이렇게 아이도 커가며 여러 자아를 만들어 간다. 스스로 상처 입히는 나도, 남과 비교하기 경쟁에 빠지는 나도, 고통에 몸부림치는 나도 분명 생길 거다. 그러나 상처를 버티는 인내심 있는 나도, 스트레스에 강건한 나도,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나도 생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