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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록소록 May 09. 2024

그대의 밤이 평안하길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


  젊은 작가의 북토크에 참여했을 때다. 남다른 이력으로 분명한 생각을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젊은 작가는 인상적이었다. 일하는 주변 이웃들을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출간한 책을 소개했다. 응급실에서 일하는 청소 노동자, 농촌 버섯 재배자, 그리고 수선집 사장님 등, 그녀가 만나는 인물은 존재하지만 없는 듯, 무심하게 지나칠 수 있는 우리 이웃이다. 북토크가 마무리될 시점에 독자가 질문을 던졌다. 책 속의 인터뷰이들을 시간이 지난 지금 다시 만난다면 작가님은 어떤 질문을 하고 싶으세요? 작가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 생각에 잠기더니 대답했다. "요즘 밤에 잠은 잘 주무시나요?"


  짧은 대답은 인터뷰이를 향한 작가의 진심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들의 안녕을 묻는 한 마디가 '잠은 잘 주무시느냐'라는 말 외에 무엇을 더할 수 있을까.  번뇌와 통증, 그리고 크고 작은 불편함들이 한결같이 밤에 밀도를 더한다는 게 나이 들며 깨닫는 일이다. 낮 시간이 육체의 노동이었다면 밤 시간은 정신이 노동의 바턴을 이어받는다. 끝없는 터널의 밤이 지나면 새로운 빛으로 시작됨을 알면서도 어둠의 침묵은 숨어 있는 고요한 자아에 돌을 던진다.


  아일랜드 작가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밤잠의 안부를 묻고 싶은 주인공이 등장한다. 펄롱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하지만 불편한 일들에 무심할 수 없는 성정을 지녔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은 일들이 마음에 머물러 온전한 휴식을 누리지 못하게 훼방한다. '나는 왜 남들처럼 맥주 한 캔 마시며 쉴 수 없는 걸까.' 펄롱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딸들과 이룬 아늑한 가정이 있으며 넘치지는 않지만 절약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일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소박한 안락함에 시선을 머금고 살아가기에 그는 늘 공허하다. 유년 시절 받았던 따뜻한 호혜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녀 신분의 미혼모에게 태어난 펄롱은 대가 없이 보살펴주던 집주인 미시즈 윌슨의 사랑을 기억한다. 베푸는 마음의 행복을 경험한 그는 모든 일에 무심할 수 없는 촉수를 지녔다. 세상을 향한 다정함이 그를 잠 못 들게 한다. 


  1990년대 아일랜드에서 카톨릭 교회에서 운영한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이 공개되었다. 갈 곳 없는 미혼모 여성들과 아이들을 감금하여 강제 노역을 시켜왔으며 긴 기간 동안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다는 사실에 세상은 경악했다. 그 사건을 모티브로 소설은 전개된다. 작은 마을에서 석탄, 장작들을 팔며 생계를 유지하려면 교회와도 이웃과도 적절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펄롱은 잘 안다. 또한, 사랑스러운 딸들이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에 마음을 다해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가장이기도 하다. 그 앞에  자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불행을 떠안고 살아가야 할 소녀가 있다. 막강한 힘인 교회의 뜻을 거스르며 아이를 도와줄 수 있을까. 자기 보호 본능과 용기가 내면에서 싸우면서 번뇌는 시작된다. 


  불면의 밤이 시작된다. 크리스마스이브, 아내에게 줄 선물을 산 후 펄롱은 교회의 세탁소로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여자아이에게 그는 산타클로스가 되어 준다. 아이를 데리고 걸으며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했는가. 그 순간의 충만함을 '자신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는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아 평생 지고 살았을, 그래서 밤마다 괴로웠을 일을 그는 용기 내어 해낸다. 그 후에 닥쳐올 고난은 아이가 지금껏 받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신의 은총이 그의 마음에 내려앉은 크리스마스이브 밤이었다. 


  대학시절 친구의 자취방에서 내려다본 도시의 풍경이 떠오른다. 좁고 경사진 언덕에 수많은 다세대 주택이 오밀조밀 모여 있던 동네는 밤 정경이 아름다웠다. 구질구질한 세간의 어수선함은 모조리 감춘 채 작은 불빛으로 반짝이는 행성 같았다. 놀라운 건 셀 수 없이 많은 빨간 십자가였다. 작은 동네에 이토록 많은 교회가 존재하다니. 이처럼 신실한 이들이 모여 사는 동네라면 범죄는 물론이고 사랑이 넘쳐흐르는 마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모두들 십자가를 바라보느라 불편한 현실을 외면하고 사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주인공 펄롱 역시 가엾은 소녀의 시선을 외면한 채 크리스마스 미사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신을 향한 기도의 마음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강물처럼 왜 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못하는 것일까.


  주어진 일에 성실하게 사는 이들이 세상을 움직인다. 젊은 작가가 인터뷰한 노동자들처럼 말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펼친 노동이 세상을 부드럽게 한다. 나의 하루가 편안하게 유지되는 건 그들의 노고가 숨어 있음을 우린 쉬이 잊고 살았다. 심지어 펄롱의 말대로 세상에는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도 쉽게 일어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를 살만하게 하는 건 무엇일까. 언제든 만날 수 있는 불행과 불편함에 모른 척하지 않는 다정함이라고 믿는다. 사생아였던 자신을 자식처럼 안아주던 미시스 윌슨의 사랑이 펄롱을 건실한 아버지가 되게 했다. 구원의 눈길을 보내던 아이를 잊지 못해 다시 수도원을 찾아가는 마음이 세상에 생명을 불러일으켰다. 신의 뜻을 잘 알지 못한다. 짐작건대 우리 마음이 외면할 수 없는 곳에 신도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 삶의 의미가 살아가는 존재 그 자체에 있다면 내 하루를 돌아보듯 타인의 삶도 바라보는 게 인간의 작은 책무이다. 불편했던 순간을 떠올리며 잠 못 이루어 뒤척이는 모습이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누군가의 밤이 안녕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 괴로움을 이해하는 같은 나약한 인간으로서 건네는 최소한의 안부 인사이다. 작가 클레어 키건이 말하는 사소한 것들이 결코 사소하지 않음을 안다. 불편함을 외면하면서 우리의 영혼이 얼마나 가난해지는 지도 이제야 알겠다.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은 노동자의 지친 밤잠이, 그들의 안녕을 염원하는 작가의 다정함이 세상을 살만하게 한다. 그대의 밤에도 평화가 함께 하기를 기도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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