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부처님[E.8 걸어가야겠다.](2)

인도 불교 유적지 순례기 : 마지막 델리 편

by 노루

마지막 델리



1. 다시 델리, 마지막 델리


여행 중의 마지막, 4번째 델리 방문이었다. 델리와 가까워질수록 먼지의 맛은 더욱 진해졌다.


티벳탄 콜로니와 빠하르간지 둘 중을 고민하다가, 너무 늦어진 시간에 마지막은 인도방랑기의 숙소로 가기로했다. 돈이 조금 남기도 했다. 가격은 600루피였지만, 더운 물을 쓰지 않는 조건으로 500루피에 머물 수 있었다.


침낭을 깔고 누우니, 기분이 묘했다. 이제 하루를 더 머물고 비행기를 타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2. 해피 디왈리!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는 처음부터 정해져있었다. 델리박물관이었다. 델리 박물관에는 출처가 확실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있었다.


박물관까지는 걸어서 30분정도가 걸렸다. 릭샤를 탈 수 있었지만, 시간도 많았기 때문에 천천히 걸어 박물관을 향했다.


20분 정도를 걸어 인디아 게이트 근처에 갔을 때, 한 아저씨가 무단횡단을 해오시면서 나와 눈이 마주쳤다.


“해피 디왈리!” 지금은 디왈리 시즌이라는 것을 새삼 꺠달았다. 디왈리는 빛의 축제~. 나도 “해피 디왈리!”화답을 했다. 어디를 가냐고 묻는 아저씨에게 델리 박물관을 간다고 하니, 디왈리 시즌이기 떄문에 오후 2시가 되어야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 해주셨다. 그리고 CCA라는 곳을 가보라고 추천해주시며, 릭샤까지 싼 값에 잡아주셨다.


아직 2시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흔쾌히 아저씨의 조언을 따라 CCA라는 곳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CCA는 다름 아닌 빠하르간지였다. 숙소가 있는 부분은 거의 끝부분이었고, 릭샤가 내려준 곳은 시장의 입구였다. 시장 입구에서 10분정도를 걸어가면 인도방랑기가 나오니, 다시 돌아온 샘이었다.


시장 구경을 하고, 2시에 맞춰 박물관에 가봤지만, 경비아저씨는 오늘 문을 열지 않는다고 이야기 하셨다. 디왈리여서...빠트나에서도, 마 두르가 뿌자로 박물관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이번에도 신들의 축제가 박물관 입장을 막았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내일은 문을 연다는 소식이었다.





IMG_6793.JPG 빠트나 이후로, 또다시 철문 안에 있는 박물관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IMG_6800.JPG 아저씨가 원숭이를 이용해 돈을 벌고 계셨다.돈을 들고 있으면 원숭이가 돈을 받아갔다.





3. 기념품


남는 시간동안 기념품을 사려 빠하르간지를 돌아다녔다. 더 까페 근처에는 몇 개의 화장품 매장이 있었는데, 돌아다니면서 히말라야 립밤 가격을 조사해봤다.


4군데 정도를 돌아보고, 가장 싼 곳에 들어갔다. 기념품은 히말라야 립밤 밖에 듣지 못해서, 사장님께 한국인들이 오면 뭘 가장 많이 사가냐고 물었다. 사장님은 립밤과, 수분크림과, 풋크림을 소개해주셨다.


나도 내일 박물관과 공항, 점심 값만 딱 남겨두고, 나머지 돈을 기념품을 사는 데에 썼다. 립밤은 80개 정도를 샀고, 수분크림은 8개, 풋크림은 5개를 샀다. 립밤은 한 개에 5백원 정도 했으니, 이곳에서 6만원 정도는 썼을 것이다.


4. 손금


암베드카의 박사의 책을 하나 구하고 싶어 빠하라간지의 책방에 갔다. 더 까패 근처의 구둣방처럼 차려 놓은 책방이었는데, 주로 세계 각국의 언어로 만들어진 여행가이드 책을 팔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암베드카의 책이 있냐고 물으니, 한 아저씨가 창고에서 책 하나를 가져다 주셨다. 하지만 내가 찾는 책은 아니었다. 떠나려는 나에게 다른 아저씨가 명험 하나를 건내주셨다.


자신을 유명한 손금쟁이라고 소개하며, 나에게 한 번 보라며 제안을 하셨다. 얼마냐고 물으니 20분에 300루피를 부르셨다. 나도 할 일이 없었기에, 50루피에 5분으로 퉁을 치고 아저씨를 따라 창고로 향했다. 아저씨는 나를 앉히시고, 자기가 유명한 사람이라며 유튜브 영상을 보여주셨다. 별로 그 영상이 신빙성을 높여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기삘이 강하게 느껴졌다.


오른쪽 손을 보시더니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셨다. 역시나 다소 중의적이고, 해석 가능한 말만을 거의 하셨다.


아저씨의 말을 요약 하자면, 손금이 말하기를 나는 감성적인 성향이 강하고 지난 3년간 가장 힘든 시기였고, 뭐든지 내 힘으로 하려고 하고, 내년부터는 좋은 운이 들어올 것이라고 했고, 이야기하셨다. 다만 준비를 잘하고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또 나중에 2남 1녀를 낳을 거라고 예상을 하셨다. 마지막엔 생각좀 그만하라고 덧붙여주셨다.


동의 할 수 없는 말들이 많았지만, 50루피로 재미있는 기억을 만든 것 같아 아깝지 않은 50루피였다.


5. 운명과 유서


손금, 별자리, 사주팔자와 같은 것을 보러가는 것은 참 매력적이다. 다가오지 않은 미래의 내 모습을 알 수 있다거나, 과거의 일어났던 일들을 알 수 있다는 것은 귀가 얇은 나를 자꾸 흔들리게 했다. 내가 스스로 답을 내리는 것보다는, 누군가가 준 답을 믿어 버리는 것이 내겐 더욱 쉬웠다.


하지만 과거의 일을 맞췄다고, 미래의 일을 정확히 안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었다. 내가 운명을 믿는다면, 이렇게 알고 있다는 사실까지 포함돼야만 하기에, 결국 미래의 모습을 앎으로써 바뀌는 것은 없다. 좋지 않은 일을 피하기 위해 알아야 한다는 말도 어패가 있다. 운명을 믿는 한,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언어적으로 운명이란 단어는 모순적이다. 운명을 말하기 위해서는 이어지지 않는 한 사건이 완전히 마무리 되어야 하는데, 한 사람의 인생으로 그 사건을 최소화 하더라도, 그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결말을 보지 못한다.


더 나아가, 한 사람의 인생을 독립적으로 볼 수조차 없다. 한 사람의 아이를 키우기 위해 마을 하나가 필요하듯이, 한 사람의 인생이 사람들 속에서 의미를 갖는 한, 운명은 수평적으로 독립적일 수 없다. 또한, 역사 이후 지식과 전통이 전승되어 왔듯이 한 사람의 죽음 이후에, 그 사람이 남긴 이야기는 다음 세대로 계속 이어져 나간다. 이 점에서 운명은 수직적으로도 독립적일 수 없다.


수직적으로도 수평적으로도 더 이상 아무것도 이어지지 않을 때 나는 운명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운명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점과, 확실하게 나는 죽을 것이라는 것뿐이다.


이제 운명이 있다고 말한다면, 기꺼이 그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운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내가 아니라면, 그리고 내 옆의 있는 사람들도 아니라면, 나는 그 심판자에게 좋은 판단을 받기 위해 그가 좋아할만한 일들을 해 나가기만 하면 된다. 좋은 결과를 받기 위해, 좋은 원인을 심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운명이 없다고 말한다면,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그 결과를 위한 원인이 되는 일만을 하면 된다. 운명 따위가 없다면, 지금 당장 좋지 않은 결과가 오더라도, 원인이 충분히 만족된다면 그에 따른 결과는 발생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족들이나, 친구들이 이 글을 본다면 이 부분을 나의 유서로 받아줬으면 좋겠다. 나에게 죽음이라는 결과는 반드시 올 것이다. 그리고 그 죽음이 왔을 때, 사람들은 나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나의 죽음이 운명이든 운명이지 않든, 나라는 사람으로서 표현되야할 원인들이 다 사라졌기 때문에 죽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슬퍼해선 안된다. “나”는 할 일을 다 했을 뿐이니.


6. 여행자들


손금을 분후 인도방랑기로 향했다. 음료수는 시키지 않았지만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서 밀린 일기를 채워가고 있었다.


벽 앞의 맨 구석 자리였는데, 옆에 테이블과 내 앞에 앉으신 테이블에 앉으신 분이 이런저런 여행 얘기를 하고 계셨다. 재미있는 이야기에 본의 아니게 귀동냥을 하면서 여행이야기를 들었다.


한 팀이 자리를 떠나고, 내 옆 테이블의 여행자 분이 나에게 말을 걸어 주셨다.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맥주 얘기를 하시길레, 킹피셔 맛이 카스랑 그렇게 다르냐고 내가 물었다. 그 분은 놀라시면서 나에게 술을 먹지 않냐고 물었다. 여행을 하면서 2달 동안 술을 먹지 않(못)했었다. 굳이 먹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먹을 사람도, 기회도 없었다. 지금은 먹고는 싶었지만, 기념품을 산 후, 이제 쓸 수 있는 돈은 내일 박물관에 간 후, 점심을 먹고, 공항에 갈 돈 밖에 남지 않았었다.


그 여행자분께서 나에게 술을 사시겠다며 자기 테이블로 넘어오길 권하셨다. 그 분은 인도에서 1년 정도를 생활하신다고 하셨는데, 자신도 처음에 인도에 와서 3달 만에 처음 먹는 소주 맛이 그렇게 기억에 남는다며, 나에게도 그 경험을 주고 싶다고 하셨다. 나도 감사히 자리를 옮겼다. 두 달 동안 먹지 못했던 술이였다. 가슴이 조금 두근 거렸다.


첫잔에서는 소주 맛이 전혀 쓰지 않았다. 쓰기는커녕 약간 단맛이 느껴졌다. 정말 신기했다. 몇 잔을 나누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7. 게임


지역전문가와 주재원에 관한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1년 정도의 지역 전문가 과정을 거치고 주재원이 된다고 한다. 많은 기업들이 13억의 인도 시장을 노리고 준비 중이라고 한다. 인도는 위험 국가로 분류되어 위험수당도 나온다고 한다.


그 형은 지금 지역전문가 과정에 있다고 하셨다.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곳이지만 이곳에 와서 보면서 직접 느끼는 것들은 누구한테 들어서 얻은 것과는 게임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을 알려주셨다. “절대 모르는 게임은 하지말라.” 장사는, 사업이든 결국엔 정보 싸움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회사가 이렇게 지역전문가와 주재원을 일부로 파견하면서까지 이곳을 경험하게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인공지능이 사람과 같이 사고 할 수 있지 않은 한, 실제 서비스나 물품을 이용할 사람만이 두 문화를 잘 엮어내고 그들이 지금 필요로 하지 않지만, 원하게 될 아이템을 발견할 사람을 기르는 것이 주재원과 지역전문가를 기르는 목적이라고도 부연설명해주셨다.


인도라는 시장이 매력적인 것은 분명하다고 나도 생각했다. 중국의 경제성장으로 인해서, 중국의 구매력이 전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만큼, 인도도 인도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세계속의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8. MEEF, 현지 친구


그 형은 바베쉬라는 인도 친구와 같이 있었다. MEEF라는 어플을 통해서 만난 친구라는데, 한국 여행자들과 현지 친구들을 이어주는 어플로 보였다. 두분은 어플로 만나서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하셨다. 바베쉬는 인도어, 프랑스어, 한국어를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친구였는데, 구글에서 번역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하셨다.


많은 사람을 만났고, 또 현지인들을 만났지만 나는 쉽게 마음을 줄 순 없었다. 어찌 보면 나는 그들에게 도움만 챙겨간 나쁜놈이었다. 번호는 줬지만, 먼저 메시지를 보내거나, 대화를 이어나간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도움이 필요할 떄 받긴 했지만, 나는 나의 여행을 감당하기도 벅쳤고, 딱히 어떤 주제로 그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지 도 않았다.


친구라는 것이 나에겐 그렇다. 어색함 없이, 미안함 없이 도와달라는 말에 계산 없이 선뜻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나를 친구라고 불렀지만, 나는 그들을 친구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도 같은 이유였다.


내 무언가를 그들에게 주기엔 아직 겁이 많이 났다. 믿음을 주긴 했지만 내가 그들을 마음을 다해서 믿기엔 위험 부담이 컸다. 이미 델리에 도착했을 때, 위쳇은 지워버렸다. 읽지 않은 메시지 들은 그렇게 사라졌다. 어찌보면 영영 보지 못할, 아직도 친구를 사귀는 것은 어려운 것 같다.


9. 왜 밖으로 나가지 않아?


바베쉬에게 왜 인도에서 일하냐고 물었다. 그렇게 능숙하게 프랑스어와 한국어를 할 수 있으면, 밖에서 일하는 것이 돈을 벌고 노는 것에는 더 좋지 않겠냐고 질문했다. 이에 대한 바베쉬의 답은 인상적이었다.


자신은 인도 밖으로는 나가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얼마전에 자신의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하지만 작은 아버지의 큰 아들이 미국에서 일을 하고 있어, 아들이 올 때까지 장례를 치루지 못했다고 하셨다. 3일 동안 돌아가신 자리의 침대 위에서 장남이 올 때까지 그대로 내버려둬야 하는 모습이 너무 슬펐다고 이야기했다. 자신도 장남이기에,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바베쉬의 눈에 눈물이 찰랑거리는 것을 봤다. 그 눈을 보니, 돈과 경험을 왜 쫓지 않냐는 나의 질문 자체가 괜히 부끄러웠다.



10. 발자국


이곳을 떠나는 날이 되어서야 델리 박물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델리 박물관의 입장료는 600루피로, 다른 박물관에 비해서는 상당히 비쌌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인도의 수도에 있는 박물관인 만큼 다양한 자료, 인도에 대한 방대하고 다양한 자료와 유물들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물론 역사 자체를 공부하지 못해 다 볼 순 없었지만, 이 곳에 남겨있는 하나 하나의 물건들은 탄생부터 이곳에 와서 전시되는 순간까지의 역사를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이해할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분명히 있었다.


델리 박물관에 온 목적인 부처님의 진신사리 앞을 보기 전, 기분이 정말 묘했다. 사리란 것이 어떻게 보면 그저 뼈조각이고, 화장의 부산물이긴 하다. 하지만, 이 작은 사리들이 룸비니에서 태어난 싯다르타 태자로부터 쿠시나가라에서 열반한 부처님으로부터 만들어져 2,500년의 시간이 지나오면서 결국엔 이곳까지 왔다.


이미 사라져버린 부처님의 발자국 끝에 사리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발자국을 따라 58일의 여행이 끝나는 날, 그 사리 앞에는 내가 있었다. 부처님의 발자국을 찾아왔지만, 그 발자국들이 이어지는 곳은 결국에는 나라는 사람의 발 아래였다.


이제 이 발자국은 어디로 이어질까.

일단 걸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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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리 박물관이다. 무척 크다. 수도 박물관 클라스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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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만색 돌로 만들어진 석상이다. 어두웠지만,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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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다. 유리창 3겹에 둘러싸여 있는데, 너무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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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에는 부처님의 생애가 새겨져 있었다. 어마어마하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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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자이나교의 보드게임이라고 한다. 오른쪽은 힌두교의 신 중 하나인 가루다이다.






11. 변한 것은


박물관에서 돌아와, 짐을 싸고 다시 인도방랑기에서 일기를 썼다. 짐을 들고 뉴델리 역으로 돌아가기 전 빠하르 간지 거리를 돌아봤다. 처음 이곳에 왔던 날 보았던 충격적인 인상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인도는 바뀐 것이 없었지만, 처음의 인도와 마지막의 인도의 인상은 분명히 달랐다. 이곳에 처음 왔던 날, 식은 땀을 흘리며 와우카페를 찾아가던 나의 모습과, 지금의 나의 모습이 교차했다.


여전히 여행자에게 위험한 것과 상황들은 있을 수 있지만, 이제 더 그저 두려운 것들은 없었다. 위험한 것과 무서워야 해야할 것은 분명히 달랐으므로, 그리고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란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오후 3시 쯤, 지하철을 타고 공항으로 떠났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 40루피 밖에 들지 않았다. 이제 남은 돈은 30루피, 공항의 자판기에서 30루피자리 자몽음료수를 사먹고 잔돈을 털었다.


빨리 가고 싶은데, 시간이 더뎠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갔다. 모니터에 내가 타는 비행기가 수화물을 받는 것이 떴다. 냉큼 짐을 맡겼다.


12. 청바지, 사리 그리고 인도의 혁명


비행기를 타는 입구 옆의 의자에서 앉아 있다가, 한 분의 선생님을 만났다. 내 옆에 앉아 계시던 분들이었는데, 내가 인사를 드리니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어디를 다녀오시냐고 물으니, 자신의 친구과 친구의 동생과 바라나시와 네팔 트레킹을 다녀오셨다고 했다.

선생님의 인도에 대한 감상을 들었는데, 선생님은 인도도 곧 큰 변화가 올 것이라고 하셨다.


나도 그 변화에 동의는 했지만 속도와 양상은 사뭇 우리나라와 많이 다를 것이라고 의견을 더했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한국의 변화를 겪으셨기에, 그 과도기적 분위기를 잘 읽으실 수 있겠지만, 내가 느끼기에 우리나라 같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인도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오는 길, 엄청나게 화려한 사리를 입고 공항으로 가는 인도의 여성들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신기하게 보는 것은 나밖에 없었는데, 인도에서는 그져 그런 일이었다. 인도는 그런 곳이었다.


부자일수록, 돈이 많을수록, 더 비싸고 더 예쁜 사리를 입은 여자가 자연스럽게 지하철을 타고 공항으로 가더라도, 전혀 튀는 것이나 특이한 것이 아닌 그저 하나의 아름다움으로 인정되는 곳이 인도이다. 우리나라의 한복과는 사뭇 다르지 않은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엄청난 변화 속에서, 전통과 과거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고 생각이 들었다.


인도에도 많은 자본들이 들어오고, 생활은 서구화 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단순히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다른 나라와 같은 변화를 보일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인도는 어떤 변화를 보여줄까?



13. 공무원 준비해!


아직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까지는 한 시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여행 사진도 보여주셨다. 그리고 내 출신과 학교를 물으셨다.


내 답을 들으신 선생님께서 짧게 대답을 해주셨다. “그러면 공무원 준비나 해!” 그 정도의 학교와 과로는 좋은 곳을 가기 힘들 것이니, 9급이나 7급 공무원을 빨리 준비하라고 이야기 하셨다.


내 걱정을 해주시면 조언을 주시는 것이기에 정말 감사했지만, 선생님 입에서 나온 “내”가 아닌 우리나라의 젊은 사람에 대한 진단은 참 씁쓸했다. 어른들 역시, “나로 보여지는 우리나라의 청년”들의 미래에 대한 진단은 공무원이 최고였다. 그 진단과 처방이 지금 우리나라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처방이 맞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내게 찍혀 있는 도장들이 나는 아니다. 내게 찍혀진 도장들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보여준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고도로 전문화된 시대에 검증된 자격은 필수적이지만, 어떤 일을 해낸 다는 것에 역량이 필요한 것이지, 자격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이 특별한 도장이라면, 내가 어른들로부터 듣고 싶었던 말은 나만의 도장을 팔 능력을 키우라는 응원이었지, 가서 더 좋은, 안정된 도장에 찍힐 준비를 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답정너라고 불려도 할말이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밖에 봐주지 않는다면 나는 항상 불쌍하고 슬픈 사람이 될 수 밖에 없을 것 같았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걱정하며 응원하지만, 대부분의 응원 속 깔려 있는 짙은 인식은 나를 정말 불쌍하고, 슬픈 사람으로 만들 때가 있었다. 그 선생님의 응원도 감사하지만, 그런 응원이라면 정중히 사양하고 싶었다.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듣고 있지 않았다. 나는 불쌍한 사람이 아닌데, 나보고 불쌍하다고 하는 사람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4. 이륙


비행기에 타라는 안내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나도 작은 가방을 다시 메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어젯밤 밤늦게 까지 먹었던 술 덕분인지, 정말 집에 돌아간다는 생각에 긴장이 확 풀려서인지 첫 번째 기내식을 먹자마자 졸음이 몰려왔다.


눈을 감고, 58일간의 여행을 돌아보았다. 집, 인천공항, 빠하르간지, 아우랑가바드, 아잔타, 엘로라, 뿌리, 부바네스와르, 마날리, 다람살라, 보팔.. 차례대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A.E.1. 첫 번쨰 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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