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불교 유적지 순례기 : 포카라(휴식)(2)
타다파니로 가는 도중에 쿠말형을 만났다. 쿠말형은 5년 정도 한국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한국말을 어느정도 혔는데, 같이 타다파니까지 가며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한국에서 두 개의 회사에서 2년, 3년씩 총 5년을 일을 하셨다고 한다. 주 6일을 일했고, 월급은 220만원 플러스알파로 받았고, 밀린 적은 한번도 없었다고 한다. 정말 다행이었다. 나쁜 사장님을 만나는 경우도 많다고 하는데, 쿠말형은 운이 좋았다고 한다.
원래 돼지고기나 양고기를 많이 먹진 않았는데, 한국에서 돼지고기 맛을 알았다고 한다. 회식도 엄청 자주하고 소주 많이 드셨다며 웃으며 이야기하셨다.
돼지고기와 개고기에 대해서 물어봤는데, 돼지고기는 이슬람 사람들만 먹지 않는다고 하고, 개고기의 경우 딱히 종교적인 이유는 없지만 그냥 전통적으로 먹지 않는다고 하셨다.
네팔로 돌아온 지는 일 년 정도 되었고, 지금은 쉬면서 경비업을 배우고 있다고 하셨다. 한국에서 보안업이 인기 있는 것을 보고 경비회사에서 CCTV수리와 시스템을 배우고 있다고 하셨다. 언젠가는 자기 고향에서 보안경비업체를 차리고 싶다고 하셨다.
이야기를 하니, 피곤함도 덜하고, 시간도 금방 갔다. 타다파니에서 헤어지기전에 우리나라에 와서 일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니, 나에게도 이곳에 와서 고맙다고 해 주셨다.
쿠말형과는 타다파니에서 헤어졌다.
타다파니에서 보는 풍경은 정말 멋있었지만, 내가 누울 자리는 없었다. 결국에는 1시간이 걸리는 추일레까지 내려가야 했다. 이미 오후 5시 어두워지기 시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걸어 내려가다가 네팔 여행자 무리를 만나 추일레까지 동했다. 자기네 숙소를 예약까지 해주셔서 감사했다.
역시나 남는 방이 없다고 하여, 주방에서라도 자려고 했다. 하지만 예약한 중국인 손님이 오지 않아서 내가 그 방을 차지 할 수 있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바로 음식을 시키고 기다렸는데, 한국인 여행객 두 분이 들어오셨다. 아빠와 아들이 같이 트레킹을 온 것이었다. 인사를 드리고 국수와 계란을 시켰다.
하루가 너무 길었다. 목적지에 가지 못할까 점심도 먹지 못해,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거의 열 두 시간 만에 밥이었다. 내가 개걸스럽게 먹는 모습을 본 아저씨는 나를 불쌍하게 바라보셨다. 밥은 잘 먹고 다녔냐는 물음에, 아저씨가 남긴 밥을 먹어도 되겠냐고 답했다. 주신 밥을 국수 국물에 비벼서 배를 가득히 채웠다.
부자 분들과는 내일부터 동행을 하기로 했다. 이제 막 해병대에서 전역한 아들과 같이 이곳에 트레킹을 오셨다고 하는데, 혼자온 나를 신기하게 보시는 만큼, 아빠와 아들의 여행은 내게도 낯설었다. 재미있는 동행이 될 것 같았다.
짧은 대화를 마치고, 아스피린 한 알과 우비를 뒤집어쓰고 잠을 잤다.
[추일레-시누와]
아침 8시쯤 출발을 했다. 이제는 동행이 있어서 그런지 마음도 편했다. 길을 잃을 걱정은 없으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새벽 4시 30부터 시작되어 6시가 넘어서 끝난 산행은 너무 힘들었었다.
3일 째 산을 타다보니 초반의 체력관리의 중요함을 느꼈다. 경주처럼 빨리 걷는 게 아니라 속도를 조절해보면서 나에게 알맞은 속도를 찾아갔다. 때로는 빠르게 걷다가 때로는 느리게 걷는다. 일부로 이 등산을 경주화 시킬 필요는 없었다. 힘들지 않도록, 지치지 않도록 걷는 것이 힘든 일로 다가오지 않도록 욕심내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보다 빠르게, 누구보다 먼저라는 수식어가 붙고 나면 욕심이 생기고 그리곤 힘이 많이 들었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자꾸 그렇게 돼서 짜증이 났다. 결국엔 이렇게 속으로 선언해야했다. “이 등산에서, 주인공인 선수와 심판 모두 나다. 그러니까 편파판정을 해야겠다. 지금이 아주 좋다고”.
이곳의 아이들은 춥지 않다. 열을 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 끊임없이 뛰돌아 놀면서 나오는 체열은 멈추는 새가 없었다.
부자 분들이 먼저 만난 동행 분들이 계셨다. 그분들은 대학 산악 동아리에서의 인연이 40년 넘게 이어져, 안나푸르나 등반까지 오신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었다. 젊은 나보다도 산을 더 잘 타시는 모습에 감탄도 했지만, 그 셋 사이에 엄연히 존재하는 막내와 큰형이라는 관계가 정말 귀여웠다.
[시누와-데우랄리]
시누와 데우랄리 구간도 오르막이 많다. 계속 오르막만 나오면 싫고, 또 내리막도 처음엔 좋더라도 다시 올라와야 하니 힘들었다. 7시쯤 출발해 오후 3시 정도에 끝이 났다.
힘든 것은 둘 째 치고, 데우랄리의 롯지에는 햇빛이 들지 않아 오후에도 상당히 추웠다. 추운 곳에서 한 번 겪었던 것이 트라우마가 된 이후로 추운 것은 잘 참지 못했다. 남들이 느끼는 추위보다 훨씬 더 추위에 예민했다. 마지막 목적지인 ABC를 앞두고, 남은 시간 동안 믹마와 룩뚝과 이야기를 나눴다.
믹마와 룩뚝은 어르신들의 포터와 가이드였다. 둘은 형제였는데, 같이 포터와 가이드를 하고 있었다. 어르신들을 쫓아다니면서, 가이드가 없는 나에게도 믹마와 룩뚝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곳에서 나도 1000루피를 꺼내 몰래 드렸다. 더 드리고 싶었지만 예산이 초과되었다.
믹마에게 윤동주의 서시를 가르쳐주었다. 믹마는 한글을 읽을 수는 있지만 많이 서툴렀다. 종이 위에 한글로 시를 옮겨주면서, 다음에 같이 오는 한국인들에게 ABC에서 서시를 읽어주라고 하였다. 그래서 최초로 ABC에서 서시를 읽어주는 가이드가 돼보라고 조언을 해줬다. 믹마는 알겠다며 안주머니에 종이를 챙겼다. 영화 같은 일이겠지만, 부디 그 시를 외워서 유명한 가이드가 되어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같이 온 부자 분들은 약간의 두통을 느끼셨다. 데우랄리는 약 3,800m 정도여서 고산 증상이 일어날 수 있었다. 고산병은 원인이 불명이라고 하지만 3000m 이상에서의 신체의 이상반응은 당연했다.
가장 주요한 요인 산소와 온도 일 것이다. 하지만 온도는 계절에 의해 항상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옅어진 산소 농도에 대한 몸의 예민한 반응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했다. 낮아지는 산소 농도는 사람의 호흡 습관과 체질에 따라 다른 흡수율을 보일 것이고, 그 차이는 고도가 올라갈수록 심해질 것이다. 또 한 날마다 바뀌는 컨디션과 적혈구의 양과 같은 변수로 인해 고산병은 질병보다는 감기와 같은 증상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증상에 대한 대처이다. 여러 사람, 여러 변수들이 동시한다는 것은 여러 곳의 체크포인트가 존재한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 말은 스스로 점검하면 할수록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약이란 것도 있지만 몸의 증상에 대한 빠른 대처와 위험구간에서의 완충시간을 늘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나도 위험구간(2800~3000이상)에서 속도를 아주 늦췄다. 다행히 고산증상이라 할 것까지는 없었지만 햇볕에 그을려서 그런지 열이 나는 것처럼 얼굴이 달아오른 적이 있었다. 그것 말고는 특별하게 아팠던 적은 없었다. 부모님께 감사했다.
입맛이 떨어졌던 적도 없었다. 데우랄리에서는 절정으로 배가 고팠다. 밥을 먹고도 배가 고파서 초콜릿을 계속 먹었다. 물과 밥을 초과해서 먹어서인지, 매일 새벽바다 화장실을 가야했다.
또 이상했던 것은 방구였다. 그것도 엄청난 방구. 감자를 많이 먹긴 했지만, 아무래도 방구가 너무 많이 나왔다. 심할 때는 5분에 한 번씩은 낀 것 같아, 뒤따라오시는 분들에게 죄송했다. 갑자기 푹하고 나올 때는 지린줄 알고 깜짝 놀랐다.
요상하게, 고도를 내려오니 방구가 멎었다. 이것도 고산병 증상이냐고 묻는 나의 질문에 사장님은 폭소하셨다.
데우랄리에서 ABC를 찍고 바로 내려갈 계획을 세웠다. 돈도 돈이었지만, 너무 추웠다. 그리고 돈까스가 먹고 싶었다. 내려가면 돈까스로 삼시세끼를 먹길 다짐했다. 같은 숙소에 머문 네팔 친구들은 왜 ABC에서 머물지 않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그곳에서 일출과 일몰과 별들이 많아서 아주 재미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나도 핑계를 댔다. 돈도 없고, 추워서라고 대답하기는 좀 그랬다. 그래서 별들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 있는 척을 하며 말했다. 이 되지도 않는 말에, 그 친구들은 멋진 말이라며 화답해줬다. 괜히 머쓱했다.
하늘에는 보이지 않는 별들이 훨씬 많다는데, 나는 눈이 좋지 않아, 남들이 보는 별도 잘 보지 못한다. 하지만 이 하늘이 별로 가득 차 있음을 확실히 믿고 있다. 별들은 항상 떠 있다. 다만 내 시력으로는 볼 수 없는 것뿐이다.
우리 집에서 보는 하늘에서도 나의 하늘엔 별들이 가득하다. 오글거리지만 나도 별의 일부분이 확실하다. 대폭발에서 만들어진 성분들이 이리저리 조합되어 내가 되었으니 나 역시도 별의 일부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별의 일부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초신성으로부터의 만들어진 나의 신성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 스스로도 별임을 믿지 못하고 하늘 위에 별들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보였다.
말만 번지르르게하는 위선자인가?
[데우랄리-ABC-데우랄리-시누와-지누단다]
데우랄리에서 ABC까지는 약 2시간 반이 걸렸다. ABC는 정상이 아니라 정상을 오르기 위한 베이스 켐프였다. 분지 형태였는데, 주위에 여러 꼭대기들로 둘러 쌓여 있었다. 안나푸르나 생츄어리라고도 불리는데, 정말 이름값을 하였다. 산들이 이곳을 지켜보고 있는 듯, 봉우리에서부터 녹은 물이 이곳으로 모여 강이 되었다.
만약 용이 있다면, 볕이 잘 드는 이곳은 분명 용의 둥지가 있는 곳일 것이다. 용들은 없었지만, 용들의 아이들, 사람들은 이곳에 와서 웃으며 뛰어 놀고 있다. 나도 기쁘다. 이곳을 보아서 기쁘고, 타협이라는 포기 없이 처음 세운 목적지를 왔기 때문이다.
목적지가 생긴 순간 또한 가야함과 그곳으로부터 내려와야 함이 동시한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왔는데라는 생각이 스친다. 더 남아서 이곳을 눈에 담아야 하지 않을까? 저기 저 곳까지 가봐야 하지 않을까? 괜히 미련이 생겼다.
돈까스와 온천을 생각하며 미련을 지웠다. 하산을 시작했다. 이내 아쉬웠던 마음도 일기장 위에만 남았다. 뇌가 멍청해서 다행이었다.
동행이 없이 혼자 걸을 때는 점심을 먹지 않았다. 배는 고팠지만 그렇게 고프지 않았고, 더 많이 내려가기 위해서는 시간도 줄여야할 필요가 있었다. 워낙 비싼 것도 한 목했다.
한국 물가에 비교하면 그렇게 비싸다고 보기 어렵지만, 나에게는 비쌌다. 최대한 군것질을 줄이고 감자 같은 양이 많은 것을 위주로 먹으면 음식을 해결했다. 그나마 감자가 가장 쌌다. 배고픈 것도 절정을 넘어가면 그렇게 배고프지는 않았다.
여섯시부터 시작한 산행은 지누단다에 여섯시 반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시누와 이후로는 내리막길뿐이었지만, 오히려 계속 되는 내리막길에 무릎이 아팠다.
간신히 지누단다의 끝자락에 도착했을 때, 더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난 롯지로 바로 들어가서, 스파게티를 시켰다. 끝났다는 안도감에 한 번도 주문하지 않았던 레몬차도 두 번이나 먹었다.
데우랄리에서 ABC를 거쳐 지누단다까지, 온전히 12시간을 계속 움직였었다. 5박 6일의 산행 중, 이 날이 가장 힘들었었다. 샤워도 할까 생각 했지만, 하루 더 참기로 했다. 내일은 이곳에서 유명한 온천을 갈 것이다.
[지누단다-포카라]
온천욕을 할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6일 동안 한 번도 씻지 못해서 몸이 근질 거렸다. 지누단다의 노천탕 같은 곳은 처음 가보았다. 남탕과 여탕이 멀찍이 분리되어 있었고 입장료는 100루피였다. 옆에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또 다른 분들이 쓰다 남은 비누도 있어서 인공 온천 폭포수로 샤워도 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목욕탕 같이 엄청 따뜻한 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충분히는 따듯했다. 2시간 정도 온천욕을 하고 올라가는 길에 한국 가족 분들을 만났다. 뒤에 내려오시는 분들에게 “여기 엄청 좋아요! 얼른 가보세요“ 라고 말하니 아주머니가 답하시는 말이 자신은 어제 여기에 와봤다고 하신다. 그리고는 나에게 방콕 어디에 있는 온천이 더 좋으니 그곳으로 가라고 하신다.
순간 씁쓸해져 인사를 드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사람들은 그렇게 평생을 더 좋은 곳 찾다가 마지막에는 가장 좋은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일까?
온천욕을 마치고, 포카라로 가는 버스가 있는 나야폴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래로만 가면 되겠지, 하고 나섰던 하산 길에서 결국 길을 잃었다.
지누단다에서 쭉 내려와서, 다리를 건너 왼쪽 방향으로 향했어야 했지만, 그놈의 촉을 따라 다시 고라파니 쪽으로 30분 정도를 올라갔다. 역시나 뭔가 쌔해서, 나무를 지고 오시는 아저씨게 물어보니, 나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아저씨는 본인이 다니는 지름길을 알려주시면, 길이 험하니 조심히 내려가라고 당부하셨다. 알려주시고도 걱정이 되시는지, 내가 내려가는 길 내내 나를 지켜봐주셨다.
아저씨가 가르쳐준 길을 따라서 내려가니, 금방 제대로 된 길에 들어갈 수 있었다. 포카라를 향하는 다른 친구들도 만날 수 있었고, 그 친구들을 따라서 무사히 나야폴에 도착했다.
버스는 비정기적으로 온다는 것 같았지만,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비록 자리가 없어서, 땅바닥에 앉아 가긴 했지만, 내려갈 수만 있다면 상관 없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지프를 이용하기도 한다고 한다.
버스는 포카라 외곽에 내려줘서, 한시간 정도를 포카라 시내까지 걸어가야 했다.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다. 작은 도시 한 켠이 거의 차이나 타운처럼 중국 간판으로 채워진 것은 인상 깊었다. 그렇게 걸어 윈드풀 게스트 하우스로 향했다.
두 번 길을 잃었다. 타다파니로 가는 길과 , 나야풀로 돌아가는 길에서. 두 번 모두 그냥 맞겠지 하는 생각으로 무작정 걸어서 생긴 일이었다. 이 길 밖에 보이지 않았으니 이것이 맞겠지 혼자 오해 하면서 길을 잃었다.
내가 결정해 놓은, 내가 보려고만 하는 나의 길은 목적지까지 훨씬 나를 오래 걸리게 하였다. 그렇다고 남들 모두 가는 길에 끝내 내가 원하는 것이, 찾아야 하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말이다.
내가 나에게 묻듯이, 의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묻는 것도 중요했다. 그 갈림길에서 내가 지나가는 아무에게라도 한번이라도 이 길이 맞는 길인지 물었다면, 그 고생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어봐야 한다. 혼자 고민해도 나오지 않는 답들도 많고, 오히려 잘못된 길로 끌고 갈 수 있음을 인정해야한다.
저 길의 끝에서 울고 싶지 않으면, 물어야 할 때, 질문해야한다.
사장님과 사모님은 7박 8일의 일정으로 올라간 내가, 5박 6일만에 내려 온 것을 보고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셨다. 여차저차 해서 이렇게 내려왔다고 설명을 드리고, 짐정리를 시작했다. 빌린 옷은 사장님께서 추천해 주신 세탁소에서 모두 깨끗이 빨았다. 장비들과 옷들을 반납하면서, 다시 싸고 갈 배낭을 정리하면서 고민이 생겼다. 원래 있던 옷을 가지고 갈까? 말까? 마음속에서 밀당이 시작됐다.
산을 오르기전 새로 산 자켓 때문이었다. 기존의 자켓 하나가 딱히 필요는 없었지만, 왠지 너무 아까웠다. 욕심인 걸 알면서도 아까운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 입지도 못할 꺼면서.
차분히 이 것을 놓고 갈 이유와 가져갈 이유를 비교해 보았다. 가지고 가면, 그래도 이래저래 쓸 것만 같았다. 부피도 작아서 그렇게 짐에 영향도 주지 않았었다. 고민을 하면서, 빌린 옷들을 다시 윈드풀 하우스의 공용 보관함에 가져다 놓았다.
생각해보니, 이번 산행에서 나는 거의 내 옷을 입지 않았었다. 심지어 팬티도 없었으니, 나는 누군가가 놓고 간 것을 빌려 입은 것이었다. 참 사람의 찌질함을 버리긴 힘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이 도와준 것은 생각도 안한 이 찌질 함을 보고나서야, 누군가 이렇게 놓고간 옷의 감사함을 알 수 있었다.
또, 나에게 이렇게 필요한 옷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 줄 수 있음을 생각하며 옷을 나눔 함에 넣었다. 꾸질꾸질한 옷 한 벌가지고 너무 많은 고민을 한 것 같았다. 으휴 못난 놈.
포카라는 떠나기 아쉬운 곳이다. 바라나시랑은 또 다른 분위기. 더 볼 곳도, 볼 마음도 없는데 좀 더 있고 싶은 곳이다. 앞에는 페와호수가 있고, 먹고 싶은 음식들이 많이 있는 곳. 그리고 나와 같은 처지의 여행자, 한국인들이 많은 곳. 더 머물고 싶은 곳이었다.
이건 욕심이었다. 속에서는 그냥 쉬다가 귀국 하자고 계속 속삭였다. 이정도 여행 했으면 좀 쉬어도 되지 않냐고 나에게 따졌지만, 하루를 푹 쉬는 것으로 컨디션은 충분히 회복 되었다. 이제 다시 이동해야할 때이다.
맘에 드는 선물을 찾는 것은 힘이 든다.
내 눈에도 이쁘고
내가 생각하는 사람과 그 선물이 같이 있을 때도 이쁘고
그 사람 눈에도 이쁘며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도 이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리고 그것을 내 호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그 물건
그것이 내가 찾는 선물의 조건이다.
찾기 너무 힘들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알아보니, 소나울리로 향하는 버스표는 800~1000정도 였다. 윈드풀 사장님께 여쭤보니 900을 부르신다. 필요했던 큰 가방까지 사모님께 얻을 수 있을 것 같고, 아침밥도 공짜로 얻어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쳐 사장님께 티켓을 부탁드렸다.
사장님은 웃으시며 나에게 가방과 아침을 주셨는데, 바쁘게 계산하고 있던 것은 나 혼자였는 듯하다. 나의 계산은 +가 났다며 홀로 좋아한다. 곧 또 숫자 속에서 슬퍼 할 것이다 분명.
한국에서 같이 여행을 하기로 약속하고 인천에서 원묵이형을 만났었다. 인도를 같이 둘러보기로 했지만, 결국 인도가 아닌 네팔에 와서야 만날 수 있었다. 윈드풀로 왔지만 방이 없어서, 내일 비워지는 내 방에서 같이 머물기로 했다. 원묵이형은 나보다는 한 살이 많았고, 사회복지와 관련된 일을 하다가 세계여행을 목표로 여행을 계획하시던 분이었다. 좋은 형이다. 네팔에서 하루 밖에 같이 보내지 못했지만, 이 곳에서 하루라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저녁에는 형이 여행을 하다 만났던 사람들과 윈드풀의 투숙객들과 모여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여행을 시작하신지, 오래되는 듯, 이런 만남에 익숙하신 듯 보였다. 식당에서는 5명 모두 돈까스를 시켰다. 이 곳 돈까스는 실패하는 법이 없었다. 몇몇은 서로를 알고 있고, 몇몇은 그렇지 않았다. 배가 불러져, 분위기가 포근해졌다.
“준호씨는 이제 돌아가면, 다시 취업전선으로 돌아가야겠네?” 라는 원묵이형의 말에 잠깐 멈칫했다.
취업전선이라는 단어에서, “전선”을 다시 곱씹었다. 그렇다면 나는 휴가를 나온 것일까? 그 전쟁터로부터? 여행이라는 휴전선언이 끝나고 전쟁터로 돌아가야 한다면,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이라면, 나는 그저 이곳으로 도망쳐온 것 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도망자일까? 머리는 그렇지 않다고 우기지만 꼴은 도망자 꼴이 맞았다. 형의 물음에는 대꾸는 하지 못하고 “허허” 웃었다. 괜한 핑계만이 입에서 나올 것 같았다. 이제 나에게는 되야 할 꿈이 없는데, 총을 쥐어줘도 그 전쟁에서 쏘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 전쟁터에서는 남의 총에 맞아 죽거나, 내가 남을 죽여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그럴 자신은 여전히 없고, 그 마음을 갖기 위해 노력조차 하기 싫었다.
나 스스로에게 총을 쏴야 할까? 그렇게 하고 싶진 않다. 그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스스로 이 여행이 전쟁으로부터의 휴가임을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니까.
떠오르는 단 한가지의 해결책은, 살리고자 하는 대상을 바꾸는 것이다. 이 전장에서 내 목숨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목숨을 살리고자 한다면, 나는 죽이기 위한 게임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목적이 남을 살리는 것이라면, 나의 생명도 살려질 수밖에 없었다.
원묵이형의 한마디에 너무 오버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무슨 취업하는 것이 전쟁이냐, 남을 살리는 게임을 해야 한다“.라는 일기 장에 써 놓은 글들이 오글거리게도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내가 느껴지는 단어의 무거움은 다수결로 정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여행을 도피로 바라보고 싶지 않다. 그뿐이다. 여행은 한 사람의 삶의 축제여야하고, 소풍이 되어야만 한다. 무언가로부터의 치료가 아닌 축복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바른 것이라고.
헤어짐은 언제나 아쉽다. 사장님과 사모님, 원묵이 형과 가벼운 포응을 나누고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는 소나울리로 가기 위해서 처음 도착했던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뒤에 탄 다른 여행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여행을 마치고, 카트만두에서 한국으로 돌아가신다고 하셨다. 화장품 회사에 다니시다, 퇴사를 하고 여행을 왔다고 하셨다. 화장품 회사들이, 중국의 관광금지 이후로 좋지 않아졌다는 소식을 들었었는데. 그 분도 중국 화장품 회사들의 성장으로 한국 화장품 시장이 많이 어려워졌다고 이야기 하셨다.
얼마간 이야기를 나눈 사이 정류장에 도착했다. 버스를 찾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려고 했지만, 결국엔 찾지 못해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내 버스를 찾은 후 그 분은 찾을 수 없었다. 나중이란 단어는 정말로 없는 단어인 것 같았다.
포카라와의 나중은 있을까? 룸비니행 버스 창틀에 기대어 생각했다. 이제 다시 인도로 가야하는데, 막연한 거부감이 피어올랐다.
-E7. 우아하게 받아주는 것[스라바스티]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