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부처님[E.7 우아하게 받아주는 것](1)

인도 불교 유적 순례기 : 스라바스티 편(1)

by 노루



I never feel more given to
내가 당신과 함께하며 느끼는 이 즐거움을

Then when you take from me,
당신이 이해할 때

When you understand the joy I feel
나는 당신이 내게서 받아가는 것을 바라보면서

Caring for you.
무엇보다도, 언제보다도 주이짐을 느껴요

And you know my giving isn't done
당신도 알고 있어요,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주는 것이

To put you in my debt,
당신을 부담스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But because I want to live the love
내가 당신에게 느끼는 사랑을

I feel for you.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을요

To receive with grace
우아하게 받아주는 것이

May be the greatest giving.
최고로 잘 주는 것 아닐까요

There is no way I can separate the two.
그 둘을 절대 나눌 수는 없어요

When you give to me
당신에 나에게 줄 때

I give you my receiving
나는 당신에게 받음을 드려요

And when you take from me
그리고 당신이 내게서 받아갈 때

I feel so given to.
저는 정말 주어짐을 느낄 수 있어요

Ruth bebermyer 루스 베머마이어, Given to 주어진

스라바스티

2018.11.01~2018.11.05


가장 많은 가르침이 설해진 곳, 하지만 대중교통으로는 접근하기가 참 힘든 곳. 포카라에서 아무리 궁리를 해봐도, 이곳에 가지 않을 핑계를 찾기가 힘들었다.


쉬라바스티는 푸라세나짓트왕 치하에서 번영했던 코살라국의 수도로서, 그 명칭은 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전설적인 왕 쉬라바스티에서 연유한다고한다. 불교가 흥기하기 이전에 이 거리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는 알 수 없지만, 당시에는 아치라바티 강의 남쪽 강 언덕에 위치하여 남북 인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또는 상업 도시로서 많은 사람들이 각지로부터 모여들고 있었다.


불타의 세계, 나까무라 하지메




스라바스티는 어떻게 불교 교단의 중심지가 되었을까? 이 질문에 답에는 중요한 사람이 한 명 있다. 수닷타라는 사람이 바로 그 인물이다. 부처님 시대에는 라즈기르를 수도로 하는 마가다국과 스라바스티를 수도로하는 코살라국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두 국가 모두 아리아 인종을 대표했고, 지배 계층 사이의 혼인관계도 있었다고 하며, 정치적, 경제적 교류도 활발했다고 한다.


수닷타 부처님을 만나다


코살라국의 수도 슈라바스티에는 수닷타라고 하는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마가다국의 수도에 사는 큰 부자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맞았으므로, 장사차 라자그리하를 자주 방문했다. 이 부자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은 경전들도 있지만, 어떤 경전에는 호미, 울건, 조태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수닷타가 라자그리하에 와서 보니 처남은 여느 때처럼 반갑게 맞아 주지도 않고, 자기 집에서 묵는데도 별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분주하게 다니면서 손수 음식 장만하는 일을 돌보고 있었다. 수닷타는 전에 없던 처남의 태도를 보고 놀라기도 하고 마음속으로 불만을 품기도 했다.

‘이렇게 법석인 걸 보니 내일 결혼식이라도 있나. 그렇지 않으면 큰 공양을 하려는 것인가. 혹시 마가다의 국왕 빔비사라라도 초대할 참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처남이 일꾼들 감독을 끝내고 그제야 수닷타가 있는 곳으로 와서 인사를 했다. 수닷타는 처남에게 음식을 장만하는 까닭을 물었다. 처남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큰 공양을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야. 내일 부처님과 스님들을 우리 집에 초대하기로 했다네.”

“부처님이라고요?”

“그래, 부처님 말일세.”

“네엣, 부처님이라고요?”

“그래 부처님 말일세.”

“아니, 부처님이라고요?”

“허허, 그래 부처님이시라니까.”

세 번이나 되물어도 똑같은 대답을 들을 수닷타는 놀라면서 말했다.

“부처님이라니, 세상에서는 부처님이란 말조차 듣기 힘든데......, 지금 곧 찾아가 뵙고 싶습니다.”

“지금은 찾아뵐 시간이 아니네. 내일 아침에 가도록 하게.”
...

날이 새길 기다린 수닷타는, 일어나자마자 부처님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부처님은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을 하고 계셨는데, 수닷타가 오는 것을 아시고 길가에 깔개를 깔고 앉아 계셨다.

수닷타가 가까이 오자 부처님이 말을 걸었다.

“어서 오너라, 수닷타여.”

수닷타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므로 기뻐서 부처님의 발 밑에 엎드려 예배했다.

부처님은 수닷타에게 남에게 주는 것과, 계율을 지키는 것에 대해 가르침을 주셨다. 또 베푼 공덕으로 천상에 태어남과, 사성제에 대해 가르침을 주셨다. 수닷타는 그 자리에서 부처님에게 귀의하고 평생 동안 재가 신자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수닷타는 부처님을 내일의 식사에 초대를 하고 부처님을 수락하셨다. 그 식사의 자리에서 부처님이 스라바스티에 와서 머무시길 청했다. 부처님의 승낙을 받은 수닷타는 스라바스티로 돌아가 승원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좋은 장소를 물색했다.

수닷타의 기원정사 프로젝트


슈라바스티의 집으로 돌아온 수닷타는 승원을 세우는데 적당한 장소를 찾아 나섰다. 거리에서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고, 가고 오는 데 불편이 없어야 하며, 더욱이 조용한 곳이 아니면 안 되었다. 수닷타는 여기저기를 물색하던 중 적당한 땅을 찾아냈다. 그곳은 프라세나짓왕의 태자 제타의 소유지였다.


“저 동산을 나한테 파십시오. 승원을 세우겠습니다.”

“안 되오.”

“팔아 주십시오.”

“안 된다니까요.”

“제발 팔아 주십시오.”

“당신이 동산 가득히 황금을 깔아 놓는다면 몰라도, 그러기 전에 팔 수 없소.”

이와 같이 서로 다투고도 팔지 않자. 마침내는 재판을 하기에 이르렀다.

재판관은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태자가 ‘동산 가득히 황금을 깔아 놓는다면 몰라도’라는 말을 했으니 팔아야 할 의무가 있소.

그러자 수닷타는 황금을 수레에 가득 싣고 가서 제타 태자의 동산에 빈틈없이 깔도록 했다. 그러나 황금은 겨우 동산 입구의 빈 터를 채우기에도 모자랐다. 수닷타는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시종들에게 말했다.

“자, 더 많이 실어 오너라. 이 동산에 가득 찰 때까지 황금을 가져오너라.”

이를 본 제타 태자는 매우 놀랐으며, 수닷타의 믿음이 그토록 굳은 것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그만두시오, 이 동산을 당신에게 드리겠소. 그러나 입구의 빈터만은 내게 돌려주시오. 나도 승단에 선물을 하고 싶소.”

수닷타는 생각했다.

‘제타 태자같이 세력 있는 사람이 불교 신앙에 들어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래서 그 빈터는 태자에게 돌려주었다. 태자는 그곳을 승원으로 정하기 위해 문을 만들고 부속 건물을 세우게 한 다음, 수닷타에게 필요한 재목까지 기증했다.

불타 석가모니, 와타나베 쇼코


이렇게 사원의 본래 이름은 기수급고독원인데 이를 줄여서 기원정사라고 불렀다. 이 이름은 수닷타와 제타 태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수닷타는 “아나타(의지할 데 없는 자) 핀다다(먹을 것을 주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급고독”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제타 태자도 한문으로 번역되면서 “기타”라고 쓰여 정사의 이름이 기수급고독원(제타바나 비하라)가 되었다고 한다.


라즈기르의 죽림정사와 함께 유명한 2대 정사로, 30여 회의 우안거 중에서 19회를 이곳에서 머주셨던 만큼 중요한 교단의 중심지였다.



1. 토


길이 구불거리는 것을 알기에 아침은 아주 간단히 먹었다. 그러나 몇 회 연속인지 모르는 S자 내리막과 비포장의 콤비네이션에 결국 앞자리에 앉아 있던 꼬마 아이가 버스 바닥에 토를 했다.


사람들은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고 창문을 열었다. 나도 그랬다. 아이는 시원한 듯, 소매로 입을 닦았다. 닦을 것이 없어 보여서, 내 가방에 있던 휴지를 찢어서 주었다. 하지만 토의 양은 상당했다. 가지고 있던 휴지를 모두 주었다. 고락푸르에서 휴지를 팔지 않는 것을 알아 걱정되긴 했지만, 손비데가 있으니 그럭저럭 해결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서 온 차장은 다짜고짜 에어컨을 켰으니 창문을 닫으라고 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네가 그러면 토를 치우라고, 그러면 창문을 닫겠다고 했지만, 결국 토는 치워지지 않았다. 치울 만도 했는데...


창 밖에 얼굴을 살짝 내밀고, 다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스며오는 구수한 향기들이 아까 봤던, 바닥의 널브러진 토드를 계속 상기시켰다. 귀에 꽃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팟캐스트 속의 손석희 아나운서의 말들이 잘 들리지 않았다. 냄새가 소리에도 영향을 주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아이와 엄마는 토를 남겨 놓은 체, 맨 앞좌석으로 옮겨 갔다. 이것은 출발 한 시간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직 8시간은 더 가야만 했다.


2. 뜻밖의 동행


버스에서 내리니 네 시 정도가 되었다. 소나울리는 인도와 국경이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버스 정류장에서는 고락푸르까지 실어 나르는 택시들이 대기 중이었다. 나는 국경까지만이라도 택시를 타려고 계획했지만, 같은 버스에서 내린 인도 젊은 친구 세 명이 나를 그들의 무리에 껴주었다.


고락푸르까지 한 사람이 내야할 돈은 인도 루피로 350루피였는데, 버스로는 3시간 정도 걸릴 길이 2시간 정도에 갈 수 있었다. 택시는 룸비니 근처의 버스정류장에서 소나울리까지 우리를 데려다 주었고, 인도에 넘어와서는 다른 택시로 갈아탔다. 하지만 차가 10초 정도 움직이더니 갑자기 엔진이 꺼져버렸다.


약 30분 가량 근처의 모든 기사 아저씨들이 내가 타고 있는 택시의 보닛 앞에서 연구와 토론을 하셨다. 안에 있는 것이 답답하여, 밖에 나가서 구경을 했는데, 건들기만 하지 딱히 하시는 것은 없어 보였다. 차를 밀면서 시동도 걸어보았지만 걸리지 않았다. 더 이상 참지 못했던 친구 하나가 다른 택시를 구해오고 나서야, 새로운 택시를 빌려오고 나서야 시동은 걸렸다.


옮겨 타려고 하니, 기사 아저씨들이 대판 싸우셨다. 말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상황은 대충 짐작이 갔다. 차 시동이 걸렸으니, 원래 타려던 택시로 가야 한다는 파와, 새로운 택시로 가야한다는 파가 나뉘었는데, 새로온 아저씨가 불리해 보였다. 아저씨의 큰 눈 위에 눈물이 넘칠 듯 찰랑거렸다. 아저씨를 데려온 친구가, 나에게 짐을 가지고 오라고 이야기했다. 들어보니, 저 택시는 다시 고장 날 수도 있으니, 옮겨 타야 한다는 것이었다.


택시에 옮겨 타고 고락푸르로 출발했다. 아저씨가 기가 죽은 것 같아, 내가 옆에서 짤따 해~ 짤따 해(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하니 피식 웃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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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에 사람들이 더 많았다. 주변 아저씨들이 죄다 몰려와서 말다툼 속에 끼어들었다.



3. 고락푸르 맛집 AFC


고락푸르는 일곱 시가 넘어서 어둑해져서야 도착했다. 확실히 인도 안으로 들어오니 인도의 먼지 맛이 느껴졌다. 기사님에게 돈을 드린 뒤, 동행한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고 저번에 머물렀던 도미토리에 갔다. 하지만 오늘은 자리가 없었다. 네 군데를 돌아봤지만, 역시나 없었다. 결국엔 500루피를 주고 싱글룸 하나를 구했다.


이태까지, 먹은 음식은 물 뿐이었다. 장시간 차를 탈 것은 대비해서 아침은 간단하게, 점심은 아예 먹지 않았었다. 배가 무척 고팠다. 저번에 먹었던 햄버거가 생각났다. 포카라에서 돈까스 맛을 제대로 보고난 후부터, 여전히 고기가 먹고 싶었다.


10분 정도를 걸어 햄버거 집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주문을 하고 벽을 보고 앉았다. 밖을 보고 앉으면, 뭔가 부끄러웠다. 이 가게 옆에는 빈민촌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곳의 아이들이 내가 먹는 모습을 볼 것 같았다.


음식이 나오고, 허겁지겁 콜라, 감자튀김, 햄버거, 치킨으로 배를 채웠다.


포만감을 느끼며 문을 열고 나가자, 가게 오른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아이 둘이 나에게 따라 붙었다. 주머니에는 분명 돈이 있었다, 잔돈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큰돈도 아니었다. 하지만 주기가 싫었다.


다가오는 아이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경보를 하듯이 숙소를 향해 걸어갔다. 애들 보다 큰 키와, 치킨을 먹고 난 힘으로 빠르게 아이들과 멀어졌다. 그리고 아이들도 이내 쫓아오길 그만 두었다.


침낭 위에 누우니,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냥 100루피짜리라도 줘버릴걸 후회를 했다. 무엇이 낫든, 옳든 “주기 싫은 나”와 마주하는 것은 정말 싫었다. 다음부터는 정신건강을 위해 꼭 잔돈이라도 챙겨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4. 메 곤다 자나 헤(저 곤다에 가요)


마지막 목적지인 스라바스티로 가기 위해서는 조금 복잡한 경로를 거쳐야 했다. 먼저, 고락푸르에서 파이자바드로, 파이자바드에서 곤다로, 곤다에서 발람푸르로, 발람푸르에서 스라바스티로 총 4번의 환승이 필요했다.


아침 8시쯤 숙소에서 나와 소나울리로 가는 버스를 탔었던 버스정류장으로 움직였다. 고락푸르에서 곤다로 가는 기차편도 있었지만, 버스로 접근하기가 더 편해 보여서였다. 버스정류장 입구에서부터 “곤다! 곤다!”를 외쳐댔다. 아저씨들은 내 목소리를 듣고 한 버스를 가리켰다. 차장에게 “메 곤다 자나 해”라고 하자, 아저씨는 고개를 흔드셨다.(타라는 뜻)


곤다로 직행하는 버스인줄 알았지만, 버스는 먼저 파이자바드로 향했다. 원래는 직행버스가 있다고 가이드 북에서 확인했는데, 차장이 인원을 채우려 속인 것인지, 아니면 환승하는 것이 더 빠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차피 오늘 하루는 이동을 위해 쓰는 시간이었다. 무사히 데려만 주신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고락프르에서 파이자바드의 버스 가격은 155루피였고, 파이바자드에서 곤다로 가는 버스가 가격은 75루피였다. 곤다에서 발람푸르로 가는 가격은 50~100루피 사이였는데, 버스표를 잃어버려 정확한 가격은 모르겠다.


5. 아주머니 둘


이 버스 앞에는 동양인 아주머니 두 분이 더 계셨다. 두 분은 친구셨는데, 한 분은 중국, 한 분은 대만 분이셨다. 반가운 마음에 어디를 가냐고 물으니, 아주머니들의 최종 목적지도 스라바스티였다. 나와 같이 성지를 순례하시고 계시는 것처럼 보였다. 같이 가자고 내가 물으니,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두분도, 숙소는 코리안 템플에 가신다고 하셨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료집에서도 한국 절이 괜찮다고 나와 있어 그곳으로 가기로 결정했다고 하셨다.


내가 더 챙겨 드려야 할 아주머니 두 분이셨지만, 처음 가는 길에 동행이 생기니 마음이 정말 편했다. 특히, 화장실을 가야할 때, 두 분한테 짐을 맡기고 갈 수 있었는데, 좁은 화장실 안에서 침낭과 같이 들어가 있다가 혼자 화장실을 쓰니 정말 넓게 느껴졌다.


다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음에 어딘가에 가야할 때는 꼭 동행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기를 쓸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장소에 대한 감상보다도,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일들이 더욱 많았다.


일기를 다시 보고 있는 지금도 갔던 장소 속의 사람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어디를 가봤다.”는 생각보다, “거기에서 누구를 만났지“라는 기억이 더 먼저 떠오르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스라바스티로 들어가는 길이 길고 힘들었던 만큼, 아주머니들과 별 얘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스라바스티를 기억할 때, 항상 제일 먼저 생각나는 장면에는 아주머니들이 계셨다. 안녕히 계시려나.



6. 버스 위에서


인도에서 느낀 것 중 하나가 위계질서가 정말 강하다는 것인데, 공권력이나,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아무 싫은 소리도 하지 못하는 장면을 많이 보았다. 말이 좋아 참고 기다리는 거지, 힘이 없어서 아무말도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차나 버스 안에서도, 티켓을 관리하는 사람(Ticket Checker)의 힘은 막강한데, 보통 나는 “써(Sir)”를 붙이며 아저씨들에게 아부를 떨었었다.


발람푸르를 향하는 버스가 출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차장은 앞에서부터 돈을 걷고 있었다. 나는 거의 끝에 앉아 있었는데, 중간쯤 왔을 때 앞에서 차장과 노인 한분이 실랑이를 버리고 계셨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분명히 노인에게 차에서 내리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돈이 문제인가 싶었지만, 내 앞에 앉아 계셨던 아주머니 두분이 돈을 대신 내주려 건넨 돈도 티켓 아저씨는 받아주지 않으셨다. 결국에 노인은 차에서 쫓겨났다.


노인이 내리는 것을 바라보면서 티켓 아저씨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옆머리를 가리키며 빙빙 돌리시면서 미친 사람을 뜻하는 손짓을 보이셨다. 정신이 이상한 노인이었나? 목적지와 다른 버스를 타신 것인가? 뭔가 얼떨떨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7. 강아지처럼


버스나 기차 위에 있다 보면, 차가 정차 잠시 정차하거나, 휴게소에 들릴 때 많은 장사꾼들이 버스 위로 올라왔다. 그 중에는 어린 아이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망이나 양동이에 물, 음료수, 땅콩 등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올라와 버스 앞에서 뒤로 움직이며 물건들을 팔았다.


발람푸르로 향하는 버스 위에서는 특히 많은 아이들이 버스를 오르고 내렸는데, 그걸 보다 못한 차장이 한 아이에 손찌검을 하였다. 사람들의 발길질을 피하는 거리위에 개들처럼 아이는 목을 잔뜩 낮춘체 버스 밖으로 걸어 나갔다. 터벅터벅 걷는 아이의 꼴이 바라나시에서 본 거리위의 강아지가 생각났다.


아이들을 보며 대단하다는 생각에 뒤이어, 그래도 내가 저 아이들 보다는 나은 생활을 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었다. 그런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분명 나의 나쁜 습관이었다. 습관적으로 그런 장면을 보면, 나의 뇌는 그런 생각을 만들고 있었다. 더 낫기는 개뿔, 머릿속으로 혼자 부끄러워하며 눈을 감았다.



8. 스라바스티로


발람푸르에는 5시가 넘어서 도착했다. 8시부터 시작한 여행의 끝이 드디어 보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릭샤나 지프를 타고 스라바스티로만 이동하면 되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릭샤 꾼들이 외국인인 우리에게 다가왔다. 스라바스티를 말하니 1000부터 500루피까지 다양하게 부르셨다. 발람푸르에서 스라바스티까지는 차로 약 15분 20분 정도였는데, 아무리 많게 줘도 한 사람당 70~80루피 정도면 갈 수 있어 보였다.


다행히, 아주머니들도 더 싼 릭샤를 찾으려는 나를 따라와 주셨다. 버스 정류장에서 스라바스티 방향으로 10분 정도를 걸어 나갔지만, 이상하게 대기중인 지프나 릭샤를 발견할 수 없었다. 해가 거의 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아까 그 곳으로 돌아가서라도 지프를 타야했나 싶었다.


그러던 중에, 지프차 하나가 우리 옆에 섰다. “스라바스티 자나 헤!” “하우 머치” 묻는 나에게 눈치를 슥 보시더니 300루피를 부르셨다. “쓰리피플 쓰리 헌드레드. 원 피플 원 헌드레드 오케이?” 두 번을 확인 한 뒤에, 아주머니들에게 여쭤보니 그냥 타자고 하셨다. 아주머니들도 지치신 듯 보였다.


스라바스티로 가는 길은 그래도 도로가 좋았다. 큰 도로와 연결되는 작은 도로 중 하나였는데, 그 길이 스라바스티를 지나가고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주변의 건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허허 벌판이었다.


그렇게 20분 정도를 달려서, 드디어 스라바스티의 한국 절, 천축선원에 도착했다.


9. 한국절 천축선원


절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선원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선원 내에는 숙박시설과, 지역의 초등학교가 같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한국의 한 초등학교의 후원으로 지어진 학교로 보였다. 정문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부처님의 짦은 가르침들이 영어와, 한국어로 쓰여 있었다.


숙소 근처로 가니, 젊은 매니저 한 분과 아저씨 매니저 한 분이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주셨다. 짐을 풀고, 바로 저녁 식사를 했는데 정말정말 맛있는 식사였다.


이곳은 정해진 금액이 아니라, 기부제로 운영되고 있었고 숙박시설도 최신식으로 지어진 곳도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순례객도 많이 머누는 것처럼 보였다.


저녁 식사를 한 뒤엔, 아주머니들과 천축선원 앞에 티벳사원의 축제에 참여했다. 운이 좋게도, 내가 머무는 3일 동안 4박 5일간의 티벳, 인도, 네팔의 불교신자와 스님들이 모여 법회를 열고 문화행사를 하고 있었다.


내가 간 날은 두 번째 날로, 라다크 지방 사람의 문화 행사를 볼 수 있었는데 춤이 아기자기하고 귀엽다는 느낌이 들었다. 옷의 색상과 음색이 그렇게 이질감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왠지 우리나라의 색동저고리가 생각이 나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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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축선원은 학교와, 숙소, 사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왼쪽의 벽에는 법구경의 여러 가르침이 적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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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날이 장날이라, 불교 축제가 진행 중이었다. 라다크에서 오신 분들이 전통 춤을 추셨다. 손을 오므렸다 폈다하는 것이 아기자기 귀여웠다.



10. 아침예불


룸비니와 같이 아침예불을 드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새벽 4시 목탁소리에 잠시 깻을 뿐 일어나지는 못했다. 아니 않았다. 스라바스티까지 오기 힘들었었던 만큼 뭔가 여행이 마무리 된다는 느낌에 긴장이 풀어져 버린 것일까? 나를 원래대로 돌아가게 한 걸까?


실제 여행은 두 달이지만, 한 달간 준비하고, 이제 돌아가서 2달 3달은 여행을 정리하는데 시간을 쓸 생각이었다. 진짜 여행이 끝나는 때는 아마, 나의 일기와, 자료와, 사진들의 정리가 다 끝나는 날일 것이다. 그렇게 끝내야만, 마지막까지 좋은 여행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11. 최고의 플레이


이 곳 공양은 최고다. 아침에는 죽과 김치 그리고 국이 나오고, 점심과 저녁에는 국, 밥, 김치, 감자요리가 나왔다. 어떻게 김치 맛을 냈는지 모르겠지만, 집에서 먹는 맛이랑 매우 흡사했다. 미역국과 된장국도 바로 그 맛이었다. 밥을 두 번, 세 번 받아서 먹었다.


맛있게 밥을 먹으면서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인도에 와서 가장 크고 빠른 변화를 느꼈던 것이 소변과 대변이었다. 물이 나는 곳, 음식들이 길러지고 키워지는 땅이 바뀌니, 그 음식을 먹고 뱉는 배설물들도 자연스럽게 바뀌었다.


몸의 세포도 주기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세포로 바뀐다, 근 두 달 동안 나의 몸도 어느정도 인도의 것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렇게 여기에서 살며 계속 인도의 음식을 먹으면 정말 인도사람의 몸처럼 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의 말마따나, 결국 내 눈 앞에 먹는 것들이 자기 자신이 되는 꼴이었다.


내가 먹는 것이 나를 이루듯, 듣는 것, 보는 것, 피부로 느끼는 것, 냄새를 맡는 것, 생각하는 것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한국 사람을 단순히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한국인의 “얼”이나 “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쩌면 우리나라의 땅에서, 보고, 먹고, 맡고, 느끼며, 우리말로 생각할 수 있어야만 만들어지고 가질 수 있는 것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제시대에 우리말 금지와, 창씨개명이 가장 효과적으로 민족성을 지울 수 있는 방법이었을려나. 외국에 나가면 다 애국자가 된다는데, 김치를 먹다가 일제시대까지 같으니 정말 그런 것 같다. 이 정도면 스라바스티의 최고의 플레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의 김치였다.



12. 마법사


이 음식을 해 주신 매니저 아저씨가 설거지도 해주셨다. 죄송한 마음에 내가 한다고 우겨도 봤지만, 꼭 해주신다고 하셔서 어쩔 수 없이 내려놓고 자리를 떠났다. 얼마를 기부할지도, 어쩌면 한 푼도 돈을 놓고 가지 않을 수 있는 나에게 너무나 잘해주시는 것이 정말 황송했다.


숫자적으로 보면 아주 적을 수도 있는 아저씨에의 감사한 대접을 받고 생각이 들었다. 만 원짜리 하나가 나에게 다르고 이재용 회장에게 다르듯이, 사람 사이의 배려가 주는 감사함의 크기 역시 아주 달랐다. 아저씨가 만들어내는 작은 배려들은, 나에게는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


윈드풀에서도 느꼈지만, 먼저 자신의 것을 남에게 최선을 다해 주시는 시도들이 나의 마음에 만드는 감사함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주셨다. 이 큰 공간을 보고 나서야, 나의 쪼잔한 마음도 내려던 것보다 많은 돈을 드리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시작했다.


마법이 있다면, 그것은 반드시 남을 이해하려는 시도 속에 있을 것이라는 영화 속의 대사처럼, 매니저 아저씨도 윈드풀의 사장님과 사모님도 마법을 부리는 마법사가 아닐까? 최소한 연금술사이신 것은 확실했다. 그분들의 의도가 어찌됐든 간에, 나를 향한 아주 사소한 배려들이 조금 더 많은 기부금과, 돈까스 4인분을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이였으니 말이다.


나도 마법사로 전직을 하고 싶다. 마법이라는 기적을 만들고 싶다. 지팡이도 없는 머글 이지만, 마법의 조건을 이제야 알았다. 첫째는 주기 전에 받을 것을 계산하지 않을 것, 두 번 째는 최선을 다해 나의 모든 것을 줄 것, 세 번 째는 나에게 무엇인가 주어질 때, 최대한 우아하게 그것을 받아 다시 받아 줌을 상대방에게 줄 것.


13. 샤캬족 매니져


아침을 먹은 뒤, 천축선원의 버단 샤캬(Verdean Shakya)라는 이름의 젊은 매니저와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샤캬라는 성을 듣고 혹시나 해서 물어봤는데, 자신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후손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조금 놀라웠다.


인간인 이상 대부분의 유전자는 거진 다 비슷하겠지만, 머나먼 부처님의 피를 잊고 있다고 생각하니 신기했다. 석가모니라는 이름 속의 석가라는 가문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19세기 전에 지금처럼 구체적인 유적지가 나오기 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야기 역시, 그저 신화 속의 인물 중 하나로만 평가됐다고도 하는데, 이렇게 카필라성의 석가족의 피를 잇고 있는 사람이 버젓이 있으니 사람 자체가 역사의 증거이기도 했다.


자세히는 듣지는 못했지만, 대학을 마친 뒤에 이곳으로 와서 한국 스님 밑에서 일을 돕는 것처럼 보였다. 한국 스님은 주기적으로 이곳에 오시는데, 나랑 마주쳤을 때에는 일일보고를 하기 위해 컴퓨터를 사용하러 가는 중이었다. 따라가서 보니, 하루에 몇 명이 왔고, 어느 나라 손님이 오고, 얼마가 기부됐는지 보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침의 천축 선원은 바빠 보였다. 3일간 머물면서 보니, 학교 관계자, 숙소 관계자 분들이 모여서 매일 아침마다 회의를 하시는 것 같았다.


밖에 나와서 앉아 있으니, 이번에 아저씨 매니저께서 나를 부르시면 차를 마시라고 테이블에 짜이와 비스켓을 차려주셨다. 나에게 같이온 아주머니들도 모셔오라고 했지만, 아주머니들은 아침일찍 기원정사 유적지에 나가셨었다.





IMG_6663.JPG 이 친구가 버단샤캬이다. 이름을 알고 난 뒤, 왠지 연예인과 사진 찍는 기분이었다.



14. 견원지간


나보다 먼저 이곳에 와 계셨던 노스님이 계셨다. 노스님의 복장은 스님 같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대머리이시기도 하고 스스로도 스님이 아니라고 말하시지 않으셔서 그냥 스님이라고 불렀다.


그 분도 곧 내 앞의 자리에 앉으셨다. 총 4잔의 짜이가 있었지만, 2잔의 커피에는 주인이 없었다. 어색하게 인사를 드린 후, 짜이만 홀짝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주변에 있던 원숭이들이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원숭이들은 때로 몰려 다녔는데, 과자 때문인지, 짜이 때문인지 대 여섯 마리가 단체로 내가 있는 쪽으로 뛰어 오고 있었다. 별일이 있을까, 가만히 있었는데 한 원숭이가 갑자기 테이블 위로 떨어지면서 위에 있던 비스켓과 그리고 책상을 엎어 버리고 떨어진 비스켓을 훔쳐 달아났다.


큰 소리가 나자, 주변에 있던 개들이 이곳을 봤다. 그리고 개들이 달려와 원숭이들을 쫓아냈다. 견원지간이라는 단어가 딱 맞는 상황이었다. 매니저 아저씨가 나와서 정리를 도와주셨다. 그리고 책상을 지붕 아래로 옮겨서 과자와 차를 다시 준비해주셨다.


정리가 대충 끝나니, 개 한 마리가 테이블 앞에 다소곳이 앉았다. 멀뚱히 앉아 있는 개의 입에서는 침이 떨어졌다. 원숭이와는 다르게 과자를 기다리는 모습이 기특하여, 과자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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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다소곳하니 모으고 내 앞에 앉아있다. 침을 뚝뚝 떨어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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