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Day12 Hornillos del Camino
프랑스 길로 돌아온 첫날, 도심에 온 것을 기념하여 전날 타파스를 실컷 먹고 느지막이 잠에 들었기에 부르고스에서 출발하는 아침에는 여유를 부렸다. 덕분에 밝은 부르고스의 모습을 한 번 더 볼 수 있었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나의 작은 배낭도 한번 정비를 하고, 예쁜 성당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어주었다.
돌아온 프랑스 길은 생장부터 걸었던 3일 동안의 첫 구간과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끝없는 평원이 펼쳐졌고, 오르막길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해바라기 밭. 넓은 평원 자체도 나에게 너무나 이국적인 풍경인데, 그곳이 모두 해바라기로 가득 차 있었다. 입을 벌리고 한동안 감탄하느라 길을 걸을 수 없을 정도였다.
왜 아무도 순례길을 걸으며 해바라기 밭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지 않은 거지?! 정말 기대해보지 않았던,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엄청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렇게 해바라기를 보며 걷다가, 프랑스 길로 돌아오기로 한 결정이 옳았음을 되새기다가, 또 걷다가 보니 금방 목적지인 오늘의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오늘 알베르게를 선택한 기준은 바로 빠에야였다. 알베르게 주인이 매일 저녁 빠에야를 만들어주는 곳이었다. 큰 도시를 지나며 식당을 들를때 마다 빠에야를 먹어볼까 시도했지만, 무려 2인분 60달러(1인분은 팔지도 않는다)라는 거금을 빠에야에 투자하고 싶지는 않았던 터라, 15불도 안 되는 가격에 빠에야를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매력적인 옵션이었다.
기대한 만큼 빠에야는 정말 맛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 2시간 전부터 커다란 빠에야에 전용 화구를 사용해 조리를 시작한 주인장은 시간에 딱 맞추어 10인분은 족히 넘는 빠에야를 완성해 냈다.
그리고 빠에야를 만드는 솜씨만큼 그 주인장의 야무진 성격도 돋보였다. 마을에는 적지 않은 수의 알베르게들이 있었고, 이곳은 유일하게 수영장이 있는 곳이었다. 아주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지만 더위를 식히기에 충분한 수영장은 얼마 전 설치된 듯했다. 더위에 지친 순례자들에게 우선순위가 되기 좋은 옵션이었다. 빠에야처럼 말이다!! 그 밖에도 그녀의 야무짐은 공간 곳곳에서 묻어났다. 단백질 섭취가 절실한 이들을 위해 계란을 삶을 수 있는 기계가 있었고, 빨래하는 곳에는 손빨래에 특화된 싱크가 마련되어 있었다. 리셉션 한구석에서는 많은 종류의 음료를 판매하고 있었고, 외부 음료 취식 불가 안내판이 붙어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알베르게에서 지켜야 할 것들을 단호하게 알려주면서도 곳곳에 순례자들의 편의를 위한 것들을 꼼꼼하게 챙겨두었다.
야무진 주인장과 맛있는 빠에야 덕에 많은 순례자들과 둘러앉아 풍족한 저녁식사를 즐겼다.
왠지 처음부터 영국사람 같지는 않았던 영국분은 역시나 호주에서 2년 동안 워홀을 하다 온 사람이었다. 식사 시간 뿐만 아니라 그 곳이 머무는 내내 순례자들의 안위를 살폈고, 그 속에서 밝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연인 사이인지 헷갈릴 정도로 다정하던 두 사람은 모자였고, 영어가 서툰 아들은 종종 무표정이다가 어머니께는 자주 애교 섞인 장난을 치곤 했다. 어머니는 그런 다정한 아들을 둘 만큼 멋지고 밝은 사람 같아 보였다.
닮고 싶은 사람들을 많이 만난 알베르게, 프랑스 길로 돌아온 첫째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