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Day 14 Calzadilla de la Cueza
1000년 된 건물에서 보낸 밤은 생각보다 포근했다. 아마 피곤했던 몸이 금방 잠에 들어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충전이 필요해진 핸드폰 이외에는 불편한 점이 거의 없었다.
알베르게의 아침 시간은 주로 7시 정도라서, 뜨거운 햇살을 피하러 일찍이 출발하는 순례자들의 시간과 맞지 않을 때가 있다. 그래서 오늘도 식사를 하지 않고 먼저 출발할 예정이었다. 메인 건물 옆 화장실 건물에서 채비를 마치고 출발하려는데, 메인 건물로 들어가던 이탈리아 아저씨가 다시 문을 열고 나왔다. 아침이 이제 막 다 준비되었으니 먹고 가라는 것이다. 사양하려는 찰나, 아저씨는 친근하고 퉁명스러운 말투로 들어와서 1분만 보고 가라고 말했다. (물론 모두 이탈리아어였기에 알아들었다기보다는 알아챘다에 가깝다.) 결국 다시 건물로 들어갔다. 어제저녁과 마찬가지로 테이블에는 촛불에 의지해 비춰지고 있는 음식들이 있었고, 갓 끓인 이탈리아식 모카커피와 빵, 잼이 소박하게 놓여있었다. 자리에 앉자 앞에 앉아있던 이탈리아 여사님께서 잔에 우유와 커피를 따라주셨다. 그냥 가려던 마음이 무색해지도록 나는 빵과 커피를 아주 맛있게 먹었고, 짧은 틈에 이탈리아 단어도 배웠다. 베니시모! very good! 베풀어주신 음식과 공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조금 더 기부금을 낸 뒤 다시 길을 나섰다. 계획과 다르게 이미 해가 뜬 이후 길을 나서게 되었지만, 이탈리아의 정을 내내 곱씹을 수 있었다.
오늘도 역시 길은 평온했다. 등 뒤에서 떠오르는 일출은 역시나 예뻤고, 기온은 걷기에 딱 적당했다. 펼쳐지는 밀밭과 해바라기밭에 종종 감탄하면서 이 길에 나름의 행복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별다르게 특별하지 않은 여정이었고, 큰 무리 없이 종종 평화로운 행복을 느꼈다. 이 평원 위에서는 조금 어색한 등산화가 발을 조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아직 내 발은 큰 통증 없이 이 길을 잘 걸어가고 있었고, 작게 생긴 물집은 아프지 않았다. 모든 게 마음에 들었다.
마을을 지나지 않은 채로 길을 꽤 오래 걸었다. 11시가 되기 좀 전이었을까, 베이커리가 있는 곳에 도착하여 바케트와 초콜릿 과자들을 샀다. 오는 내내 초콜릿이 들어간 과자가 너무 먹고 싶었고, 그 누구보다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상태였기에 마을이 나타나기만을 간절하게 기다리며 걸었다. 이런 소소한 것들에 보람과 행복을 느끼는 하루들이다.
오랜만에 팟캐스트를 들었다. 종종 관심 있어하던 스타트업의 소식이었는데, 창업자의 창업 이전 스토리부터 현재까지의 우여곡절들을 차분한 목소리로 들으며 걸으니 시간이 참 빨리 흘렀다. 나도 더 늦지 않은 시일 내에 나의 일을 시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호주에서 보냈던 시간들도 계속 떠올렸다. 내가 젊음을 바쳐해보고 싶은 일을 찾을 수 있을까. 어떤 일이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지금 듣고 있는 이 이야기가 멋지다는 것은 확실했다.
더위에 구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즘, 오후 2시가 되기 전에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입구부터 이곳저곳에 놓인 그림들과 물감, 기타가 주인의 취향과 취미를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짐을 풀고 잠시 로비로 나와 빵을 먹고 있었는데, 창 밖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던 주인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유명한 음악이었고, 귀에 익어있었다. 그녀가 혼자 보내는 오후가 참 아름다웠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된 한국인 순례자분이 있었다. 그는 아쉽게도 조금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노래를 함께 듣지는 못했는데, 구글 리뷰에 사람들이 주인장의 노래에 대해 남겨둔 이야기를 읽었던 바라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그분이 넌지시 이야기를 꺼낸 끝에 주인장은 우리에게 흔쾌히 노래를 불러주기 시작했고, 리뷰를 보고 당신의 노래를 기대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쑥스러워하시면서도 몇 곡을 더 불러주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참 아름다웠고, 순례길에 맞게 개사한 가사는 모두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참 따뜻했다. 마치 우리를 위한 그녀의 공연같았다.
하지만 나는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돈을 받고 노래를 불러주는 가수가 아니고, 그저 종종 자유롭게 자신이 부르고 싶은 순간을 즐기는 사람일 텐데, 왠지 모르게 우리가 부담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 나는 그 불편함에 대해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았고, 몇 곡을 더 불러준 뒤, 그녀는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나는 왜 당시를 즐기지 못하고, 상대의 불편함을 먼저 고민하고 되려 내가 더 불편해했을까. 때로는 단순하게 즐길 필요도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 이런 걱정은 내 영역 밖이라는 것. 그러니 조금만 생각하고 접어놓은 뒤, 그저 현실을 즐길 필요도 있다는 것. 그런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