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길 Day 15 Calzadilla de la Cueza
순례길은 마치 살아가는 여행 같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조금씩 다른 변주의 재미를 느낀다. 오늘도 비슷한 하루의 시작이었다.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별을 보며 길을 걷기 시작하면 등 뒤에서 일출이 뜬다. 호주에서 매일 보던 일몰 대신, 이곳에서는 매일 아침 해를 맞이한다. 하루하루가 참 명료하고 자연스럽다.
문득 지도를 보니 내가 있는 이곳이 정말 평원인 것이 실감 났다. 시야를 가리는 것은 종종 있는 나무들 뿐이었고, 밀밭과 해바라기밭이 끝없이 펼쳐졌다. 참 이색적인 풍경의 연속이다.
걷기 시작한 지 한 시간 정도 되었을까, 제법 큰 마을이 눈에 들어왔고 그곳의 규모에 비해서는 큰 성당을 발견했다. 테이블에 앉아 마시는 커피는 그다지 훌륭하지 않아도 참 맛있었다. 역시 아침엔 카페 콘 레체!
라테를 부르는 이들의 이름이 있는 것이 종종 신기하곤 하다. 근대의 문물을 외래어 자체로 받아들인 우리와 달리 그들은 그 역사를 함께했기 때문일까. 적극적이지는 못한 지적호기심은 거기까지였지만, 직접 경험하며 얻게 되는 생각들은 참 소중했다.
빛이 바랜 카미노 푯말이 누렇게 마른 밀밭과 잘 어울렸다. 그렇게 또 넓게 펼쳐진 마른땅을 보며 걷다가 슈퍼에서 화이트 와인을 사버렸다! 아마 메말라버린 땅이 충동적인 구매에 큰 기여를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문득문득 예상치 못하게 마주치는 건물들이 나를 놀라게 했다. 뜨거운 햇살에 나뭇잎은 더 빛났다. 도처에 아름다운 것들이 넘쳐나는 순례길이다.
길이 얼마 남지 않았다. 벌써 이 긴 길의 중간에 와 있다. 하루하루 걷는 길은 참 길어 보이는데, 돌아보니 시간이 참 빠르다.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수영장에 발을 담그고 하늘을 보고 누웠다. 오늘따라 얇고 예쁜 구름에 하늘이 돋보였다. 찰방찰방 물결에 흔들리는 내 다리의 감각이 참 좋았다. 내내 뜨거운 길을 걷다가 수영을 하며 마치는 하루라니,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행복하다고 느낄 수 있는 것도 어쩌면 큰 능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