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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아나할미 Sep 23. 2024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순례길 독일 10대 Ver)

순례길 Day 30 Palas de Rei

새로운 이와 함께 걷는 것은 순례길에서 가장 흥미로운 이벤트이다. 오늘은 어제저녁을 함께 한 독일 소녀와 아침에 함께 길을 나서기로 했기에 부지런히 시간에 맞추어 방을 나섰다. 그녀와의 대화는 참 신선했다. 올해 초 한국을 떠나 내내 서양권 국가에 머물며 경험하지 못했던 질문들이 그녀로부터 던져졌기 때문이다. 반대로 말하면 그녀의 질문은 한국에서 아주 흔하게 자주 들을 수 있었던 질문이었다. 가령 나의 직업은 무엇인지, 대학에서는 어떤 공부를 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한국말로는 수도 없이 답했던 질문이지만, 막상 영어로 답변하는 것은 그리 익숙하지 않았기에 참 새로웠다. 그 의도가 어찌 되었든, 그곳이 한국이든 스페인이든 이런 답변을 하다 보면 스스로의 결정과 시간들에 대해 다시 곱씹어보게 되곤 한다. 매번 답해도 항상 쉽지 않은 질문이지만,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얻는 것도 나름 있기에 피하고 싶은 질문은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는 어둠 속 길을 걸었고,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각자의 우비를 꺼내 입은 뒤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는 비포장길을 계속 이어갔다. 이야기를 이어가다 종종 발걸음 소리만이 울리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그녀가 던진 또 다른 질문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What do your parents do for a living?" 순간 설마 정말 나의 부모님 직업을 묻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질문을 되물었다. 그녀는 다시 내게 설명했다. 정확히 나의 부모님이 어떤 일을 하는지 묻는 것이라고 말이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당황하지 않은 척하는 웃음이 튀어나왔을 뿐. 이제는 한국에서도 듣기 힘든 질문을 순례길 한복판에서, 그것도 18살 독일 사람에게 듣다니. 나의 모든 고정관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동안 이런 종류의 질문들은 오로지 한국 혹은 동아시아의 문화라고 생각했었다. 적지 않은 순간 당황스러움을 불러일으키는 그 질문들은 다행스럽게도 이제 점점 사라지고 있고, 그런 것들이 상대에게 무례한 행동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 사회적인 공감대가 조금씩 생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올해 호주에서 생활을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식적으로 자신을 소개하는 자리에서도 자신의 직업과 대학 전공보다는 다른 것들로 서로를 소개하는 것이 크게 어색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내게 바로 그런 것들을 묻지는 않았다. 나는 그 문화가 좋았고, 그런 습관들이 한국의 사회적 압박을 줄이는 것에 좋은 키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의 질문은 이런 내게 큰 충격이었다. 아마도 막연하게 내 안에 깔려 있던 사대주의를 들켜버린 것이었을까! 한국은 참 살기 어려워, 한국은 사회적 압박이 너무 커, 한국은... 하며 인터넷에 흔히 떠도는 그 불평들이 어쩌면 모두 실체 없는 불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동안 그 질문을 계속 곱씹게 되었다.

그녀와는 그 아침 이후로 각자의 속도에 맞추어 걷게 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게 큰 인상을 남긴 그녀였기에 순례길에서 만난 그 어떤 이들보다 기억에 오래 남을 듯하다. 무엇보다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의 초입에 있는 그녀에게 조금은 낯설고 두려울 수 있을 순례길이 부디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길을 걸을수록 비가 거세게 내렸다. 굵어지는 빗줄기는 판초우의에 참 잘 어울렸다. 한국에서 가끔 쓰게 되었던 비닐 우비에는 없는 그 아늑함과 안정감이 참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판초우의와 함께라면 비 오는 순례길도 오히려 좋은 풍경이 된다. 어쩌면 순례길을 걸으며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즐겨볼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길을 걷다가 운치 있는 알베르게를 발견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아직 조금 더 남았기에 적당히 음료를 한잔 마시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바에 들어갔다. 사진에도 찍히는 굵은 빗방울이 처마에 부딪혀 떨어지며 추적추적 소리를 내었다. 바에서 보이는 알베르게의 정갈한 창문과 마당이 참 마음에 들어서, 언젠가 이런 집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 따위를 하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이어지는 비를 뚫고 오늘의 목적지인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며칠 전 큰 슈퍼에서 우연히 발견하여 가방에 저장해 둔 중국 라면을 꺼냈다. 그다지 기대되는 맛은 아니었지만 그저 아시안 라면이라는 이유로 우중 걷기를 위로하기에 충분했다.

몸이 더 늘어지기 전에 다 먹은 그릇들을 치우고 마트로 행했다. 이 날은 내내 찍어두고 싶었던 사진이 있었기에 마트 안에서도 바로 그곳을 향해 걸었다. 바로 각종 잼과 소스들이 있는 코너였다. 프랑스에 도착하고 나서 내게 가장 놀라웠던 것은 바로 이 잼 용기였다. 동그랗고 깔끔한 엉덩이에 넓게 딱 떨어지는 유리, 넓은 윗부분을 적절하게 마감해 주는 고무 뚜껑. 처음에 이 잼을 보았을 때, 나는 설마 하는 의문을 가졌다. "이 잼 다 쓰면 컵으로도 쓸 수 있겠는 데?" 한국은 물론이고, 온갖 친환경 소재가 넘쳐나는 호주에서도 이런 용기는 본 적이 없었다. 이후 순례길을 걸으며 머문 크고 작은 알베르게에는 익숙한 모양의 컵들을 볼 수 있었다. 크기와 모양이 딱! 이 잼 용기였다. 아니, 이런 방법이 있는데 도대체 왜 나는 여태 울퉁불퉁 다시 쓰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들만 봐왔던 걸까. 각종 잼을 만드는 제조회사들에게 어떤 속사정이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직도 왜 이런 방법이 한국에서 보편화되지 않은 것인지 조금은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마트 구경을 마치고, 저녁을 만들 재료를 사서 알베르게로 왔다. 오늘의 메뉴는 특별히 고기도 빵도 아닌 조개탕 & 봉골레 파스타였다. 냉동고에서 우연히 마주친 태평양 조개는 겉모양이 모시조개와 비슷했고, 딱 파스타를 해 먹기 적당한 크기로 소분되어 저렴한 가격에 판매되고 있었다. 비 오는 날, '시원한' 국물이 간절했던 한국인에게 한줄기 빛 같은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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