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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볼 보헤미안 Dec 21. 2019

잊혀진 전설의 축구팀 벨파스트 셀틱

당신이 알아야 할 그랜드 올드 팀

현재 북아일랜드 리그 최다 우승팀 린필드의 옛 경기 모습 @풋볼 보헤미안

벨파스트는, 적어도 이방인 축구팬들에게는 굉장히 이상한 도시다. 곳곳에서 축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영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지만, 국제적으로 내세울 만한 축구 클럽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수도 런던만 하더라도 셀 수 없이 많은 축구 클럽이 있으며, 스코틀랜드의 중심부 글래스고는 ‘올드펌’이라 불리는 레인저스와 셀틱의 라이벌리로 유명하다. 웨일스의 카디프도 카디프 시티·스완지 시티라는 팀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축구팬들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벨파스트는? 정말 ‘하드코어’한 팬이 아니고서는 곧바로 입 밖에 나올 팀명이 아마 없지 싶다.      


물론 벨파스트에도 나름 뼈대 있는 역사를 가진 클럽이 존재한다. 린필드는 북아일랜드 최강의 축구 클럽으로 꼽히며, 글렌토란·크루세이더스가 경쟁한다. 인근 데리를 연고로 한 데리 시티 FC도 북아일랜드를 대표하는 팀이다. 이렇게 설명했지만 낯설기만 할 것이다. 아마도 북아일랜드 축구, 정확히는 클럽 축구에 대한 국제적 명성이 거의 없어서일 것이다. UEFA 챔피언스리그나 UEFA 유로파리그에서 본선은커녕 1·2차 예선 통과도 힘겨워하는 약체들이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이러지는 않았다. 역사에 만약은 부질없는 가정일 뿐이지만, 북아일랜드의 어두운 역사가 없었더라면 벨파스트에도 주목할 만한 명문 클럽이 있었을지 모른다. 지금 소개할 벨파스트 셀틱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벨파스트 셀틱 전성기 시절 선수들의 베스트 일레븐을 형상화한 그림 @풋볼 보헤미안

소개에 앞서 고백하자면, 사실 벨파스트 셀틱이라는 존재는 현지를 떠나기 하루 전 우연찮게 인터넷을 통해 알게 됐다. 최근 클럽의 부활을 꿈꾸는 몇몇 뜻있는 이들이 꾸려놓은 현지의 소박한 박물관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됐고,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를 이 도시를 떠나기 전 꼭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살펴보니, 이 팀은 실제로 ‘전설’이자 한 시대를 아울렀던 ‘강자’였기에 축구팬들에게 소개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벨파스트 셀틱이라는 클럽명에서 알 수 있듯, 우리가 잘 아는 스코틀랜드의 셀틱과 대단히 인연이 깊은 팀이다. 셀틱보다 4년 늦게 창단한 벨파스트 셀틱은 ‘형님’ 클럽의 명칭을 따라 붙였으며, 이후 구분을 위해 벨파스트라는 지역명을 앞에 붙인 것에 불과하다.     


참고로 셀틱이라는 팀 명칭은 종목을 망라하고 아일랜드인 혹은 이주민들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팀(셀틱, NBA 보스턴 셀틱스 등)들을 지칭한다고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벨파스트 셀틱 역시 북아일랜드 지역에서 거주하는 아일랜드인들을 중심으로 구축된 클럽이었다. 흥미로운 대목은 바다 건너 글래스고에 자리한 ‘형님’ 클럽 셀틱과 대단히 닮은 행보를 보였다는 점이다.


셀틱이 스코틀랜드 리그에서 영국 왕실을 추종하는 개신교도들의 클럽인 레인저스와 백 년이 넘는 라이벌리를 구축한 것처럼, 벨파스트 셀틱 역시 북아일랜드 리그에서 레인저스와 같은 영국 성공회와 왕당주의자라는 종교적·정치적 정체성을 가진 클럽인 린필드와 리그의 패권을 다퉜다.     


따라서 벨파스트와 글래스고의 팬심 혹은 팬 정체성 충돌은 어찌 보면 프로레슬링에서 볼 법한 태그 매치라고 표현해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 바로 ‘셀틱 & 벨파스트 셀틱 대 레인저스 & 린필드’로 펼쳐진다고 보면 정확하기 때문이다. 틱을 응원하는 이들은 덩달아 벨파스트 셀틱을 응원하는 일이 빚어지기도 했으며, 린필드의 팬들은 바다 건너 레인저스를 마치 자신의 팀처럼 응원한다.      


물론 약간 차이점도 있다. 글래스고의 셀틱이 온전히 아일랜드 이주민 출신 팬들에게만 지지를 받았다면 벨파스트 셀틱은 팬층의 약 10%는 바로 영국 출신 성공회 신도들이 차지한다. 이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정체성을 억누르며 벨파스트 셀틱을 응원하는 이유 말이다.     

벨파스트 셀틱 박물관의 진열장 @풋볼 보헤미안

이유는 간단하다. 벨파스트 셀틱이 축구를 정말 잘하는 팀이었기 때문이다. 벨파스트 셀틱은 1891년 창단한 후 북아일랜드를 열네 차례나 휩쓸었으며, 1935-1936시즌부터 1939-1940시즌까지 내리 5년간 리그 최정상을 지켰을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특히 클럽의 황금기였던 1935-1936시즌부터는 ‘형님’ 셀틱보다 뛰어난 동생이라는 평가를 받아도 될 만치 강력했다. 북아일랜드 최강 클럽하면 벨파스트 셀틱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당대에 명성이 자자했다. 그리고 그 위세는 스코틀랜드는 물론 잉글랜드에도 전해졌다고 한다.     


그랬던 팀이 1948-1949시즌을 끝으로 돌연 사라졌다. 영국을 제외한 국가들이 벨파스트 셀틱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런데 팀이 문 닫을 때 흔히 접할 수 있는 징계나 파산 등의 이유가 아니었다. 그들은 스스로 축구판을 홀연히 떠났다. 여기에는 씁쓸한 사연이 있다.     


라이벌 린필드전에서 벌어진 관중 소요 사태에 둘러싼 영국 경찰의 대응이다. 글래스고가 그러하듯, 벨파스트 셀틱과 린필드의 대결은 ‘벨파스트판 올드펌’이었다. 벨파스트 셀틱이 활동하던 시기는 아일랜드인과 영국인간 증오가 극에 달해있던 때였기에, 두 팀의 대결은 늘 위험천만한 상태에서 치러졌다.      


그런데 1948년 박싱 데이에 벌어진 린필드전에서는 영국 축구 사상 최악의 관중 난동 사건 리스트에 들어갈 만한 일이 벌어졌다. 경기 종료 직전 극적 동점골로 잔뜩 흥분한 린필드 팬들이 경기장에 난입하더니 벨파스트 셀틱 선수 일곱 명을 구타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벨파스트 셀틱 공격수 지미 존스는 린필드 팬들의 공격에 다리가 부러져 의식을 잃기도 했다.      


린필드는 경기 후 곧장 성명을 발표하면서 관중 난동의 책임을 벨파스트 셀틱에게 돌렸다. 적반하장이었다. 그런데 벨파스트 셀틱은 다른 자세를 취했다. 선수를 때린 린필드 팬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대신, 사태를 수습해야 할 경찰들이 선수들이 얻어맞는 모습을 보고도 수수방관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린필드 팬들이 영국 정부에 우호적이라는 이유로, 영국 경찰이 린필드 팬들의 폭력을 묵인했다고 여긴 것이다. 단순한 경기장 내 소동은 급기야 충격적인 발표로 이어졌다. 벨파스트 셀틱은 북아일랜드축구협회(IFA)에 1948-1949시즌을 끝으로 리그 탈퇴 및 팀 해산하겠다고 통보했다.     


벨파스트 셀틱은 이 사건이 단순히 축구 경기에서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고 여겼다. 민족 차별 등으로 탄압받는 지금의 여건에서 축구단을 존속시키고, 나아가 축구를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봤다. 즉, 벨파스트 셀틱은 이러한 갈등이 영국계와 아일랜드계가 뒤엉켜 싸웠던 북아일랜드의 어두운 역사 문제에 기인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마지막 미국 투어 당시 촬영된 벨파스트 셀틱 최후의 베스트 일레븐,  스코틀랜드전 2-0 승리 기록도 남겨져 있다.  @풋볼 보헤미안

재밌는 점은 벨파스트 셀틱은 승자의 모습으로 축구판을 떠났다는 점이다. 해체되는 그 순간까지 엄청난 존재감을 뿜어냈다. 1948-1949시즌 리그 마지막 경기를 치른 후, 벨파스트 셀틱은 미국 투어를 준비했다. 당시 벨파스트 셀틱은 리그컵 준결승 경기도 치러야 했는데, 투어 일정과 겹치자 깔끔하게 경기를 포기하고 미국으로 떠나기로 했다. 정규 대회 대신 친선 경기인 미국 투어에 전념한 건 자신들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긴 북아일랜드 축구계와 영국 정부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미국 투어에서 스코틀랜드 A대표팀 1군을 상대해 2-0으로 승리하는 기염을 토했다. 참고로 당시 스코틀랜드는 영국 내 절대 강자로 통하던 팀이었다. 그 시절 영연방 4개국은 아마추어리즘을 내세우며 ‘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FIFA 월드컵 참가를 거부하고 있었다.


대신 세계 최고의 대회로 자신들만의 대회인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을 내세웠다. 1949년 당시 스코틀랜드는 무려 9만 8,188명이 운집한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잉글랜드를 꺾고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정상에 오른 팀이었다. 그 스코틀랜드가 일개 클럽인 벨파스트 셀틱에 0-2 완패를 당한 것이다.      


벨파스트 셀틱의 퇴장은 당시 영국 언론들의 커다란 이슈였다. @풋볼 보헤미안

스코틀랜드전 여파는 매우 컸다. 이 경기를 끝으로 문을 닫게 된 벨파스트 셀틱을 향한 찬사도 대단했다. 자존심 드높기로 유명한 영국 언론들이 당시 식민지 팀 혹은 아일랜드인의 팀이라고 깔봤던 벨파스트 셀틱에 ‘그랜드 올드 팀’이라는 찬사를 보냈을 정도이며, 이 그랜드 올드 팀은 지금도 벨파스트 셀틱을 뜻하는 이명으로 통한다.    


결코 쫓겨나는 게 아닌, 최강자의 위용을 뽐내며 축구판을 떠나는 드라마틱한 모양새였기에 더욱 신격화될 수밖에 없는 팀이었다. 그러나 벨파스트 셀틱이 이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남긴 어둠도 존재한다. 일단 벨파스트 셀틱이 사라지면서 린필드와 치열하게 싸웠던 ‘벨파스트판 올드펌’도 그대로 끝났다. 글래스고의 올드펌이 백 년이 넘도록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흥행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벨파스트 셀틱이 존재했더라면 북아일랜드 프리미어리그 역시 마찬가지 효과를 누렸을 가능성이 크다.     


아쉬운 점은 또 있다. 아일랜드계 사람들의 응원 클럽이 사라진 것이다. 유럽의 축구팀은 단순히 경기에서 이기고 대회에서 우승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 클럽의 정체성은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룬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벨파스트 셀틱은 ‘형님’인 글래스고 셀틱과 마찬가지로 정체성이 매우 뚜렷한 팀이었다. 당연히 수많은 아일랜드계 사람들의 응원을 받고 있었는데, 팀이 없어지면서 이들 역시 증발해버리고 말았다.     


현재는 크루세이더스가 아일랜드계 팀임을 표방하고 있으나 아일랜드계 사람들의 호응은 뜨뜻미지근하다. 따라서 아일랜드계 사람들의 팀이라 불리기엔 모자란 감이 매우 많다. 후계자를 자처하는 팀으로는 도네걸 셀틱 FC라는 팀이 존재하지만 하부리그를 전전하는 팀이라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아일랜드계 축구팬으로 이뤄진 벨파스트 셀틱 소사이어티라는 공동체는 이어져오고 있다는 점은 다행스럽다. 사라진 벨파스트 셀틱을 기리는 박물관이 존재하는 이유이며, 그 덕분에 이렇게 한국에도 벨파스트 셀틱의 역사를 소개할 수 있었다.     

벨파스트 셀틱 박물관을 조성한 벨파스트 셀틱 소사이어티, 박물관이 조그마한 상가 내에 있어 찾기 쉽지 않다. @풋볼 보헤미안

최근 벨파스트 셀틱 팬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 있다. 벨파스트 셀틱 부활 프로젝트가 현지에서 추진되고 있어서다. 스포츠 앤 레저 스위프트라는 중견 기업을 이끌고 있는 짐 길런 회장을 비롯하여 벨파스트 아일랜드계 기업가들이 벨파스트 셀틱 부활 프로젝트를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프로팀 창단에는 많은 자금이 들어가야 하며, 벨파스트 셀틱의 과거 명성에 필적할 만한 팀을 만들려면 그 돈은 굉장히 많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벨파스트 셀틱이라는 팀명을 그대로 물려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행정적 문제도 존재한다. 후계자를 자처하며 1970년에 등장한 도네걸 셀틱 역시 벨파스트 셀틱의 이름을 물려받지 못한 사례가 있다. 이 문제는 북아이랜드축구협회의 전적인 소관이라 투자자와 팀 성립 여부와는 무관하다. 어쨌든 ‘전설의 팀’을 부활시키려는 벨파스트 지역 내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당장은 아닐지라도 이들의 노력이 먼 훗날 벨파스트 셀틱의 황금기를 재현할지도 모를 일이다.

엘리샤 스콧은 축구 초창기 세계 최고의 골키퍼 중 하나로 통한다. 그 스콧이 뛴 팀 중 하나가 벨파스트 셀틱이다. @풋볼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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