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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볼 보헤미안 Dec 03. 2019

벨파스트에서  조지 베스트를 걷다

베스트의 고향 벨파스트

벨파스트에 오다 @풋볼 보헤미안

영국 여행을 떠나는 한국인들에게 벨파스트는 사실 친근한 도시는 아니다. 자연이 빚은 환상적인 작품인 자이언트 코즈웨이 등 눈여겨 볼만 한 몇몇 관광지가 있어 최근에는 늘어나는 추세이긴 하다. 하지만 영국을 이루는 4 연방국 중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데다, 기후는 4 연방 중 가장 좋지 못하다고 해도 될 만치 우울하고 음침해 썩 매력적인 곳은 아니다. 게다가 20년 전만 하더라도 이 지역은 북아일랜드 내 신·구교 대립으로 걸핏하면 테러와 총격이 발생한 지역이라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곳이었다. 굿 프라이데이 협정 덕에 지금은 그런대로 지역 사회가 봉합된 상태이긴 해도, 수십 년간 긴장 상태에 놓였던 벨파스트의 이미지는 외지인들에게는 썩 좋지 못한 게 현실이다.


그럼에도 벨파스트를 행선지로 정한 이유가 있다. 어둡고 아픈 역사가 과거의 축구사, 그리고 현재의 선수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계 최고 축구 스타였던 조지 베스트의 고향이라는 점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의 이야기를 접하고 수차례 기사화했던 축구 전문 기자인 내게는 벨파스트가 너무도 매력적인 도시처럼 느껴졌다.


베스트는 1960년대를 수놓았던 축구 스타였다. 맷 버스비 감독의 지휘 하에 유럽을 정복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보비 찰턴·데니스 로와 더불어 그 유명한 ‘유나이티드 트리니티(United Trinity)’의 한 축을 맡았던 천재 공격수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상징적인 존재로 평가받는 등번호 7번 계보의 원점에 놓인 선수이며, 축구 선수가 마치 연예인처럼 수많은 팬을 몰고 다닐 수 있음을 증명한 ‘축구판 셀러브리티’의 원조였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내에서 얻은 스타덤과 훌륭했던 기량, 그리고 등번호 7번을 감안할 때 1960년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와 같은 존재가 바로 베스트였다. 비록 실제로 그의 플레이를 본 적이 없지만, 마치 전설처럼 내려오는 그의 필드 위 무용담을 누누이 들어온 터라 영국에 가면 꼭 베스트의 흔적을 뒤쫓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축구 선수의 이름이 헌정된 공항을 본 적이 있는가? @풋볼 보헤미안

오죽하면 일부러 조지 베스트 벨파스트 공항을 통해 북아일랜드 땅을 밟았을 정도였다. 런던에서 한 시간 30분가량 비행하면 도착할 수 있는 이 공항은 사실 벨파스트의 대표 관문이라고는 볼 수 없는 작은 공항이다. 진짜 관문은 벨파스트에서 버스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벨파스트 국제공항이다. 그래도 이 공항은 축구팬들에게 너무도 유명하다.


파리 샤를 드골 공항, 부다페스트 프란츠 리스트 공항 등 전 세계의 유명 공항에는 그 지역 혹은 국가가 배출한 세계적인 인물의 이름을 따는 경우가 많지만 축구 선수의 경우는 거의 없다. 전 세계를 통틀어 공항에 축구 선수 인명이 붙은 곳은 딱 두 군데밖에 없다. 포르투갈 마데이라 섬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공항, 그리고 바로 이곳 벨파스트의 조지 베스트 공항이다. 그러고 보니 베스트와 호날두는 40년이 넘는 세월을 뛰어넘어 닮은 구석이 정말 많은 듯하다.


그런데 조지 베스트 공항은 그저 시작일 뿐이다. 시내로 들어가면 더하다. 벨파스트의 명물 중 블랙 캡 투어가 있다. 이 블랙 캡 투어는 치안이 매우 좋지 못했던 과거 벨파스트를 찾은 외지인들이 현지 택시 기사의 안전한 가이드를 받으며 관광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관광 프로그램인데, 여러 프로그램 중 하나가 바로 또 베스트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주머니 사정 탓에 블랙 캡 투어는 포기해야 했지만, 이제는 타 도시와 별 다를 바 없는 평화가 찾아든 벨파스트의 분위기, 사전에 취합한 정보와 튼튼한 다리를 믿고 벨파스트 속 베스트를 찾아 나섰다.

호스텔에 있던 베스트의 벽화 @풋볼 보헤미안

‘벽화의 도시’로 유명한 벨파스트 곳곳을 돌아다니며 베스트를 다룬 작품, 혹은 베스트의 추억이 깃든 곳을 찾아다녔다. 거리에 자리한 상점에는 심심찮게 베스트의 현역 시절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심지어 머물렀던 숙소 벽화에도 베스트의 얼굴이 대문짝만 하게 새겨져 있었다. 현지인들이 얼마나 베스트를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샌디 로우 거리에 자리한 베스트 벽화는 벨파스트의 명물 중 하나다. 에릭 칸토나를 비롯한 수많은 유명 인사는 물론 벨파스트를 찾는 축구팬들이 반드시 찾는 명소로 유명하다. 전 세계에서 네 번째로 축구 협회를 창설했다는 북아일랜드축구협회의 구 건물 근처에 자리하고 있으며, 데이비드 힐리 등 또 다른 북아일랜드 축구 스타의 벽화도 인근에서 만날 수 있다.


그라피티의 도시 벨파스트 @풋볼 보헤미안

벨파스트 남동부 지역에 자리한 크레가 로드는 현지인들에게는 일종의 성지다. 베스트의 어린 시절 추억이 그대로 보존된 생가가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1963년 베스트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떠나기 전까지 거주지였다고 하며, 현재는 관광객들을 위한 숙박시설로 개조되어 쓰이고 있다. 좀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베스트가 머물렀던 생가 시설을 최대한 보존시켜 외지인들이 그의 어린 시절을 경험하게끔 하는 시설인 셈이다.


다만 암스테르담에 자리한 요한 크루이프의 생가에 비해 건물을 찾기가 매우 힘들다는 점이다. 크루이프의 생가는 외벽에 크루이프의 어린 시절 모습이 새겨져 있어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었지만, 베스트의 생가는 현지인들의 주택과 별 다를 바 없이 생겨 구분하기 매우 힘들었다. 현지인들의 도움으로 생가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표식은 그저 베스트의 생가였다는 글귀가 새겨진 자그마한 푸른색 동판 하나뿐이었다.


때문에 현지를 찾는 이들에게는 어쩌면 조금은 실망스럽거나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그 생가 앞에는 어린 베스트가 축구를 익혔다는 드넓은 잔디밭과 운동장이 있다. 다소 공허한 공터처럼 비칠 수도 있으나, 이곳에는 놀라운 일화가 있다.


“천재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곳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스카우트였던 밥 비숍이 베스트를 발견했던 곳이다. 이후 베스트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함께 썼던 성공 신화를 떠올리면, 이곳은 역사를 바꾼 곳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은 말일 것이다.


베스트의 생가, 그리고 그의 유년 시절 추억이 깃든 벨파스트 크레가 로드 @풋볼 보헤미안

가장 인상적인 점은 후세 사람들의 베스트를 향한 추모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벨파스트 시청 뒤에 자리한 조지 베스트 호텔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훗날 벨파스트의 랜드마크가 될 것이라 본다. 이 호텔은 엄청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호텔 지붕에 조지 베스트의 동상을 올리는 것이다. 현지 보도에 따르면 호텔 지붕에서 베스트가 벨파스트를 위엄 있게 내려다보는 모습의 동상이 올려질 계획이다.


이 동상의 건립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숨어져 있다. 본래 조지 베스트의 동상은 현재 북아일랜드 대표팀의 홈구장인 윈저 파크 인근에 조성될 예정이었으나, 모종의 이유로 건립이 취소되었다. 심지어 윈저 파크 인근 외벽에 그려져 있던 유명한 베스트의 벽화마저 지워지고,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벽화가 대체되는 일도 있었다. 이에 벨파스트 사람들의 민심이 꽤나 나빠졌다는데, 시그네쳐 리빙 호텔 그룹과 베스트의 유족이 뜻을 모아 호텔 지붕에다 동상을 건립하기로 한 것이다.

조지 베스트의 명물이 될 법한 조지 베스트 호텔 입간판 @풋볼 보헤미안
“베스트가 벨파스트 시청과 도네갈 광장을 내려다보는 동상은 이 도시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그가 벨파스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표현한다” - 로렌스 켄라이트 시그네쳐 리빙 호텔 그룹 회장, 북아일랜드 지역지 <벨파스트 텔레그라프>와 인터뷰에서


참고로 시그네쳐 리빙 호텔 그룹은 리버풀 레전드 감독 빌 샹클리의 이름을 딴 빌 샹클리 호텔, 에버턴의 전설적 공격수였던 딕시 딘의 이름을 활용한 딕시 딘 호텔도 운영하고 있다. 즉, 조지 베스트 호텔 역시 위대한 축구 전설에 대한 헌정도 있겠으나, 베스트의 이름을 빌어 돈을 벌려는 의도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건립 비용 중 일부는 벨파스트 인들의 크라우딩 펀드로 조성된 터라 단순히 돈을 벌려는 목적이라고 폄훼할 수는 없다. 베스트를 향한 벨파스트 인들의 변치 않는 애정 역시 동상에 녹아들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디에고 마라도나와 펠레를 그저 좋은 선수로, 대신 베스트를 최고라고(Maradona Good, Pele Better, George Best) 목소리를 높이는 벨파스트 사람들에게 베스트는 여전히 영원불멸한 신이었다.

Belfast is Best @풋볼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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