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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볼 보헤미안 Nov 30. 2019

대영제국의 위대한 캡틴

런던 축구 동상 투어 ④

2002년의 여름은 우리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by phonet, CC BY CC0

2002 FIFA 한·일 월드컵은 우리에게는 잊을 수 없는 대회다. 월드컵 본선에서 1승도 올리지 못하던 팀이 감격적인 첫 승을 따내더니 내친김에 4강까지 날아갔다. 4강전서 독일을 물리치고 한 걸음만 더 뗐더라면 한국 축구가 황금빛 월드컵 트로피에 도전하는, 마치 게임에서나 떠올릴 법한 일이 현실이 됐을 수 있다.


당시 말년 병장이라는 비운의 신세였기에 전국을 붉게 물들인 모습을 직접 목도하진 못했어도, TV 브라운관을 통해 흘러나왔던 온 나라가 그렇게 흥겨움에 빠졌던 모습은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 절대라는 단서를 붙이진 못하겠지만, 살아생전 다시 그 장관을 볼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할 수 없다. 


사족을 좀 붙이자면, 그 모습을 실제로 접할 수 없었던 한이 월드컵 본선을 취재한 축구 기자가 되어야 한다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 한, 2014 FIFA 브라질 월드컵 본선 취재를 통해 풀었다. 그 경험, 지금 생각해도 어찌나 달콤했었는지….

잉글랜드인들이 결코 잊지 못하고 있는 최고의 대회는 바로 1966 FIFA 잉글랜드 월드컵이다. @풋볼 보헤미안

영국, 좀 더 정확히 잉글랜드인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추억이 있다. 바로 1966 FIFA 잉글랜드 월드컵 우승이다. 안방에서 연 월드컵에서 사상 최고의 성적을 낸 점은 우리와 꼭 닮았다. 뿐만 아니다. 우리처럼 이 대회 이전까지 월드컵 무대에 한을 품었었다는 점도 비슷하다. 우리처럼 본선 첫 승을 해야 한다는 절박함은 아니었다. 대신 크게 상처 입은 자존심을 회복해야 한다는 강한 동기 부여가 있었다. 


축구 종가이자 세계 최강이라는 자부심을 내세워 월드컵을 2류 팀들의 대회라고 얕잡아봤던 잉글랜드는 1950 FIFA 브라질 월드컵 때 처음으로 무대에 섰는데, 당시 최약체 중 하나였던 미국에 덜미가 잡히는 등 온갖 굴욕을 맛봐야 했다. 그랬던 그들이 종가의 자부심을 곧추 세웠던 계기가 바로 월드컵 우승이었다. 그리고 반세기가 훌쩍 넘은 지금까지 같은 결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선지 우리가 2002년 월드컵 선수들을 영웅으로 기억하듯, 잉글랜드도 1966 월드컵 우승과 당시 멤버들에게 짙은 향수를 느낀다.


그중 최고로 꼽히는 선수는 바로 ‘축구 성지’ 웸블리 스타디움 앞에 늠름한 모습으로 축구팬들을 맞이하고 있는 동상의 주인공인 보비 무어다. 팔짱을 끼고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발밑에 공을 두고 있는 이 동상을 지켜보면서 축구 선수가 아닌, 위인전에 나오는 위인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과장을 좀 보태자면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과 엇비슷한 위엄을 느끼게 해주는 동상이다. 

축구 성지 웸블리 스타디움 정문을 지키고 있는 보비 무어 동상 @풋볼 보헤미안

동상을 떠받치는 구조물 면에는 무어의 족적을 설명하는 작은 작품들도 붙어 있다. 정면에는 무어와 함께 뛴 동료들, 이를테면 제프 허스트·보비 찰튼·잭 찰튼·고든 뱅크스·노비 스타일스 등 당시 ‘삼사자 군단(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별칭)’ 베스트 일레븐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좌우에는 영국 전통 모자인 디어스토커가 붙어 있다. 


이 디어스토커의 창에는 무어가 출전했던 잉글랜드 월드컵 여섯 경기와 1970 FIFA 멕시코 월드컵 네 경기의 매치업 상대가 적혀 있다. 잉글랜드 축구의 최전성기를 이해할 때 그들이 어떤 선수를 내세워 어떤 팀을 상대했는지 무어의 동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무어의 절친한 친구였던 축구 기자 제프 파웰이 쓴 비문도 새겨져 있다. 파웰은 영화 기사 윌리엄에 나오는 제프리 초서처럼 최상의 찬사를 쏟아내어 무어를 다음과 같이 후세에 전했다. 


“결점 없는 축구 선수. 제국의 수비수. 1966년의 불멸의 영웅. 월드컵 트로피를 처음 들어 올릴 잉글랜드인. 런던 이스트 엔드의 아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최고의 전설. 국보. 웸블리의 주인. 게임의 지배자. 대단한 주장. 모든 시대를 아우르는 신사(Immaculate footballer. Imperial defender. Immortal hero of 1966. First Englishman to raise the World Cup aloft. Favourite son of London's East End. Finest legend of West Ham United. National Treasure. Master of Wembley. Lord of the game. Captain extraordinary. Gentleman of all time)”


지난 2003년 조각가 필립 잭슨의 작품인 이 동상은 축구 관련 동상이 흔하디 흔한 잉글랜드 내에서도 특히 상징성을 지니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당대 세계 최강의 수비수였던 무어가 잉글랜드를 세계 최정상으로 이끌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후세 사람들이 그에게 투영한 이미지를 보면 그게 전부는 아닌 듯했다. 


투어 프로그램을 통해 웸블리 스타디움을 방문해 경기장 내부에 자리해 있던 ‘보비 무어 클럽’을 접했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보비 무어 클럽은 웸블리 스타디움을 럭셔리하게 즐길 수 있는 멤버십 서비스인데, 사실상 이 클럽은 영국 내 사회 지도자층의 사교 모임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이 클럽이 무어의 이름을 딴 이유는, 현역 시절 무어가 잉글랜드 대표팀과 웨스트햄에서 보였던 특출 난 리더십을 흠모하고 표방하기 위해서다. 경기 중 무어는 끊임없이 독려하며 동료들을 이끌었고, 상대의 공세가 아무리 거세도 절대 흔들림 없는 중심축 구실을 했다. 잉글랜드인들은 그런 무어의 플레이를 보며 리더는 바로 저래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아무리 힘든 순간이 와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리더의 모습을 무어를 통해 봤다. 때문에 무어는 비단 축구계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로 꾸준히 거론되는 인물 중 하나다. 보비 무어 클럽의 멤버들은 ‘리더십의 표상’으로서 자리매김한 무어를 롤모델로 삼고 있는 것이다.

하단 우측 무어가 줄리메컵을 들어올리는 모습은 잉글랜드인들이 월드컵 우승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거론하는 명장면이다. 이 장면을 동상으로 작품화했다. @풋볼 보헤미안

웸블리 스타디움은 한국 축구팬들도 적잖이 방문하는 곳이기에, 정문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이 동상에 대한 감상은 이쯤에서 마치고자 한다. 대신 무어의 동상이 이 웸블리 한 곳에만 있지 않다는 점을 소개하고 싶다. 언급했듯이 무어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가 배출한 역대 최고의 스타였다. 당연히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도 동상을 통해 따로 무어를 챙겼다. 


과거 웨스트햄 홈구장이 자리했던 업튼 파크의 교차로에는 ‘월드컵 동상’이 존재한다. 축구 영화 ‘그린 스트리트 훌리건스’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팬과 밀월 팬들의 싸움을 그린 그 영화다. 한국에서는 ‘훌리건스’라는 이름으로 개봉된 이 영화를 기억하는 이들을 위해 부연하자면,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웨스트햄 팬들이 주름잡고 있는 동네 ‘그린 스트리트’에 바로 그 월드컵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이 동상은 웸블리의 그것에 비교해 전혀 부족하지 않은 멋진 작품인데, 바로 1966 잉글랜드 월드컵 우승 당시 웨스트햄 선수였던 무어·제프 허스트·마틴 피터스 그리고 에버턴에 소속되었던 레이 윌슨이 주인공이다. 이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이가 또 무어다. 1966 잉글랜드 월드컵 우승 직후 선수들의 무등을 타고 줄리메컵을 높이 든 무어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월드컵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장면이기도 한데, 바로 이를 모티브로 동상을 만들었다.


웸블리와 동런던 지역을 바삐 오가면서 무어의 위상은 소속팀은 물론 대표팀에서도 여타 잉글랜드 전설과는 확연히 도드라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인적 감상이지만,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레전드 보비 찰턴보다도 그 위상이 드높다는 느낌이다. 무어에게 잉글랜드인들이 생각하는 역대 최고 선수라는 표현을 붙여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맨체스터에 자리한 내셔널 풋볼 뮤지엄 앞 길에 새겨진 명예의 전당에는 무어 역시 자리하고 있다. @풋볼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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