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축구 동상 투어 ③
EPL의 소문난 부자구단 첼시는 한국 축구팬들에게 정말 유명한 인기 클럽이다. 유럽 축구 중계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2000년대 들어 브라운관을 통해 한국 축구팬들과 가장 많이 만난 팀이기도 하다. 사실 EPL의 유구한 역사를 감안할 때 첼시가 반짝거렸던 시대는 그리 많지는 않았는데, 구단 창단 후 최전성기에 돌입한 직후와 한국 내 유럽 축구 중계 보급 시기가 기막히게 맞아떨어지면서 ‘빅 클럽’ 중 하나라는 인식을 한국 축구팬들에게 심어줄 수 있었다. 정말 절묘한 타이밍이었던 셈이다.
그래선지 런던 풀럼 브로드웨이에 자리한 첼시의 홈구장 스탬포드 브리지에선 한국 축구팬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경기 관람은 물론이며 첼시의 스타디움 투어를 즐기기 위해 유서 깊은 경기장인 스탬퍼드 브리지를 찾는 이들이 많다.
경기장 서남부 외곽을 둘러싼 셰드 월 주변에 새겨진 잔프랑코 촐라·존 테리·페트르 체흐·디디에르 드로그바, 그리고 현재 첼시 선수들을 지휘하고 있는 프랭크 램파드 등 첼시의 올 타임 레전드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 들뜬 심정으로 현장을 찾았을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 벽을 훑고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블루스’의 일원이 된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첼시 팬이라면 꼭 방문해야 할 핫 스폿이다.
그런데 첼시 현지 팬들이 여기는 최고의 스타는 따로 있다. 바로 스탬퍼드 브리지 정문에 우뚝 서 있는 동상의 주인공 피터 오스굿이다. 요즘을 살아가는 팬들에게는 너무도 생소한 이름 일터다. 그래서 소개하고자 한다.
오스굿은 1964년 첼시에서 데뷔해 1974년까지 스탬포드 브리지의 간판스타로 맹활약했던 공격수였다. 오스굿이 활약하던 시기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리버풀 등 절대 강자로 군림하던 때라 첼시가 지금처럼 강팀으로 평가받진 못했었다. 그래도 1969-1970시즌 FA컵 우승, 1970-1971 UEFA 컵 위너스컵 정상 등극 등 꽤 굵직한 성과를 내기도 했었다.
이때 오스굿이 눈부신 활약을 펼쳤었다. 특히 매 라운드 골을 몰아쳤던 1969-1970시즌 활약상은 머리가 희끗한 올드 팬들에게는 전설처럼 회자하는 일화다. 첼시에 몸담으면서 남긴 개인 기록은 380경기 출전 150골, 이중 득점 기록은 현재 역대 5위 기록에 해당한다. 다만 잉글랜드 국가대표 커리어는 초라하다는 게 아쉽다. 보비 찰턴·보비 무어 등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선수들에 비해 국제적 명성이 적은 인물이 된 이유기도 하다.
단순히 골을 많이 넣는 선수가 아니라, 동시대에 활약한 조지 베스트처럼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낸 선수기도 했다. 당시 언론의 표현을 빌자면 ‘다섯 번째 비틀스 멤버’가 맨체스터를 주름잡을 때 런던에서는 ‘오즈의 마법사’가 위세를 떨쳤다는데, 이 오즈의 마법사가 바로 오스굿이다. 탄탄한 체격과 더불어 환상적인 개인기를 활용한 플레이가 마치 마법과 같다 하여 그의 이름을 차용한 오즈의 마법사가 별명으로 붙여졌다. 심지어 훗날에는 ‘스탬퍼드 브리지의 왕’이라는 숭상에 가까운 극찬이 뒤따르기도 했다.
철벽 수비수로 유명했던 론 해리스처럼 그보다 더 많은 경기를 뛴 선수도 존재했고, 먼 훗날 프랭크 램파드처럼 그보다 더 많은 골을 넣은 선수도 나타났음에도 오스굿이 왜 최고의 선수라고 평가받을지에 대해 궁금했다. 그의 동상을 바라보면서 두 가지 이유를 추측했다. 첫째는 언급했듯이 ‘마법사’라 불릴 정도로 최정상급 기량을 갖춘 선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언급할 두 번째 이유 때문이지 싶다. 바로 ‘첼시밖에 모르는 바보’ 였다는 점일 것이다.
보통 유럽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레전드 조지 베스트를 축구계 최초의 ‘셀러브리티’로 평가한다. 베스트에게는 심지어 ‘비틀스의 다섯 번째 멤버’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였고, 축구 외적 생활에 대한 팬들과 미디어의 관심이 집중됐었다. 베스트와 동시대를 누볐던 오스굿이 바로 ‘첼시의 베스트’였다. 마치 록 스타와 같은 느낌을 주는 오스굿의 외모는 눈부신 기량과 어우러져 수많은 여성팬들을 스탬퍼드 브리지로 몰려들게 했다. 심지어 1970년대 초 미국 할리우드를 주름잡았던 여배우 라켈 웰치가 스탬퍼드 브리지를 찾아 오스굿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응원과 추파를 던진 이야기는 매우 유명한 일화다.
어쩌면 술과 방탕한 생활에 빠져든 베스트처럼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날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스굿은 그러지 않았다. 물론 축구장 밖에서 즐거운 장외 인생을 살기는 했다. 이를테면, 첼시의 대표 응원가인 ‘블루 이즈 더 컬러(Blue is the colour)’가 대중화된 것도 오스굿이 한몫했다. 당시 팀 동료들과 함께 첼시 응원가를 담은 음반을 낸 것이다. 이 음반은 당시 UK 앨범 차트 8위에 오를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현재 전 세계적으로 응원가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모델로도 활동하기도 했으며, 영화에도 출연했다. 첼시의 팬덤이 비약적으로 클 수 있었던 원동력을 불어넣은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오스굿이다.
그러면서도 공사가 확실했다. 앞서 언급한 웰치가 터치라인까지 내려와 응원하고 유혹했을 때 오스굿의 반응은 특히 흥미롭다. 최고의 축구스타와 미녀 여배우의 염문설은 예나 지금이나 최고의 이슈인데, 오스굿은 시큰둥했다고 한다. 훗날 오스굿은 자서전을 통해 “그녀는 축구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내가 베스트였다면 그녀의 전화번호나 땄을 것”이라며 당시를 돌아보기도 했는데, 그의 인생에는 축구 그리고 첼시가 미녀보다는 우선순위였던 듯하다. 덕분에 오스굿은 선수 시절 말미에 크게 망가졌던 베스트와 달리 올곧은 모습으로 필드를 떠날 수 있었다.
은퇴 후에도 그런 생활을 이어갔다. 오스굿은 은퇴 후 지도자가 되지 않고 그대로 축구계를 떠났다. 스탬퍼드 브리지 인근에 펍을 열고 첼시 팬들이 모일 수 있는 커뮤니티를 제공했으며, 런던 사교 클럽에도 모범적인 생활을 하며 한 명의 첼시 팬이자 지역민으로서 사람들과 어울렸다. 스타가 동경인 대상인 이유는 마치 별처럼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기 때문인데, 오스굿은 그 누구와도 거리낌 없이 어울리는 별이었던 셈이다.
오스굿은 만 59세였던 2006년 3월 1일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었다. 오스굿의 유해는 화장되어 스탬퍼드 브리지의 페널티 스폿 아래에 묻혔다고 한다. 그는 목숨이 다한 지금까지도 첼시 팬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인생을 첼시와 함께 한 선수였다. 이게 바로 첼시 팬들에게 오스굿이 다른 레전드에 비해 더 특별한 존재로 느끼는 이유이지 싶다. 오즈의 마법사가 스탬퍼드 브리지의 왕이 되어 지금은 수호신이 됐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