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일랜드 명문 클럽 린필드와 북아일랜드기 이야기
영연방 4개국은 저마다 국가대표팀 전용 스타디움을 보유하고 있다. 잉글랜드의 웸블리 스타디움은 ‘축구 종가의 성지’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잉글랜드와 백수십 년째 자존심 싸움을 벌이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햄던 파크 역시 성지로서 부족함이 없는 장소다. 웨일스는 카디프에 밀레니엄 스타디움을 가지고 있다. 1999년 개장한 이 경기장의 시설은 수용 규모면에서는 웸블리 못잖게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한다.
본토에 자리한 3개 연방국과 달리 아일랜드 섬 북부에 자리한 북아일랜드 역시 이런 경기장을 가지고 있다. 바로 윈저 파크다. 1905년에 개장되어 두 차례 개보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는 이 스타디움은 영연방 4개국 홈 스타디움 중 햄던 파크에 이어 두 번째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유서 깊은 경기장이다. 2018년 3월 A매치를 통해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도 방문한 바 있는 이 스타디움을 찾았다.
주황색 건물이 고즈넉이 늘어선 벨파스트 도네걸 애비뉴에 자리한 이 경기장은 다른 곳의 ‘국립경기장’에 비해 규모가 크거나 주변 시설이 대단하다는 점은 느낄 수는 없었다. 솔직히 공사장과 공장을 끼고 있는 동네 분위기 때문인지 공설운동장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주변을 좀 더 꼼꼼히 살피면, 그리고 그들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있다면 꽤나 흥미로운 장소다.
윈저 파크는 ‘국립 경기장’이긴 하다. 그러나 평상시에는 린필드의 홈으로 사용되고 있다. 웸블리·햄던 파크·밀레니엄 스타디움처럼 국가대표팀 전용 경기장은 아니라는 뜻이다. 국제적으로 덜 알려진 북아일랜드 리그임을 감안해 린필드에 짤막하게 설명하자면, 2017-2018시즌 기준으로 북아일랜드 리그에서 최다인 53회 우승을 차지하며 절대 강자로 군림한 클럽이다. 요컨대 북아일랜드 ‘넘버원’ 클럽이다.
린필드의 윈저 파크는 어쩌면 ‘국립 경기장’이라는 타이틀을 다른 스타디움에 빼앗길 수도 있었다. 이를테면 린필드와 극한 대립 끝에 역사 속으로 스스로 퇴장해버린 벨파스트 셀틱을 대신해 아일랜드계 클럽으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클럽으로 평가받는 글렌토란의 안방 더 오벌은 윈저 파크보다 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못잖은 관중 수용 규모를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윈저 파크가 ‘국립 경기장’이라는 타이틀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건, 백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주인인 린필드가 리그를 지배하면서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나 북아일랜드의 맹주 구실을 한 덕에 덩달아서 차곡차곡 ‘프리미엄 마일리지’를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지 싶다. 린필드가 잘하면 잘할수록 윈저 파크가 북아일랜드 축구를 대표하는 곳이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스타디움 자체보다 인근 거리인 도네걸 애비뉴를 함께 아울러본다면 린필드와 윈저 파크의 역사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도네걸 애비뉴를 비롯한 남서부 벨파스트 지역은 본토에서 넘어온 영국계 성공회 신자들이 주민층을 이룬다. 린필드가 마치 글래스고의 레인저스처럼 영국계를 대표하는 클럽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게 된 배경이다.
그런데 더 유명한 레인저스보다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더 서슴없이 드러내는 팀이라는 느낌을 가졌다. 아니, 비단 레인저스뿐만 아니라 전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이만큼 대놓고 ‘영국계 팀’이라는 정체성을 내세우는 클럽이 있나 싶다. 직접 본 비슷한 케이스는 세르비아의 츠르베나 즈베즈다 정도 이외에는 없는 듯하다.
‘그라피티의 도시’ 벨파스트답게 표현의 수단은 역시 벽화다. 린필드와 북아일랜드의 엠블럼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는 건 기본이다. 그런데 그 엠블럼 이면에는 ‘얼스터 배너’가 새겨져 있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비단 도네걸 애비뉴뿐만 아니라 시내 중심가인 샌즈 로우 거리에도 린필드와 북아일랜드 엠블럼 인근에는 꼭 ‘얼스터 배너’ 혹은 북아일랜드를 지칭하는 얼스터와 관련된 표식을 제법 많이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도네걸 애비뉴에서는 그 빈도가 더욱 많다.
이 ‘얼스터 배너’는 유로나 월드컵 유럽 예선 때 종종 만나볼 수 있는 북아일랜드 국기를 뜻한다. ‘성 조지 십자가기’인 잉글랜드 국기를 바탕으로 삼은 후 정중앙에는 1500년 동안이나 아일랜드의 지배 가문이었다는 오닐 가문의 문양인 ‘얼스터의 붉은 손’이 새겨져 있다. ‘얼스터의 붉은 손’은 북아일랜드 곳곳에서 살필 수 있는 꽤나 임팩트 있는 문양인데, 이를 잠깐 소개하자면 헤레몬 오닐이라는 가문의 창시자가 경쟁자와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자신의 오른손을 잘라 승리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얼스터의 붉은 손’ 주변에는 북아일랜드 6주를 뜻하는 육각성이 위치해 있으며, 그 육각성 위에 영국 국왕의 통치를 뜻하는 왕관이 자리해 있다. 아일랜드 전설을 활용하고, 영국의 지배를 받는 곳이라는 의미까지 부여한, 외부인의 눈에서는 제법 합리적인 디자인인 국기라 할 수 있다.
정식 국기는 아니긴 해도(注: 정식 국기는 엄연히 유니온 잭이다), IFA를 비롯한 몇몇 북아일랜드 내 단체들이 여전히 이 기를 내세우고 있다. 린필드 팬들이 ‘얼스터 배너’를 내세우며 영국의 혈통을 자랑스럽게 아기고, 영국의 통치를 환영하고 있다. 물론 아일랜드계가 이 기를 좋아하지도, 받아들이지도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윈저 파크 인근에는 얼스터 배너와 함께 하는 엠블럼은 당연하고, 성 조지 십자가기, 심지어 스코틀랜드의 상징인 성 안드레아기와 성 패트릭기까지 내세워 이 세 국기의 조합인 유니온 잭의 구성을 설명하는 큰 벽화도 새겨져 있다. 그중에서 꽤나 흥미로웠던 점이 있다. 400년대에 활동했다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종교 성인인 성 패트릭에 관한 서로 다른 시선이다. 사실 성 패트릭은 아일랜드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본래 영국 태생인 성 패트릭은 어렸을 적 해적에 잡혀 아일랜드로 끌려가 6년간 노예 생활을 하다 겨우 탈출했다고 한다. 이후 사제의 길을 걸은 후 아일랜드에 복음을 전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다시 바다를 건넜으며, 성실한 전도를 통해 이전까지 드루이드교 등 토착 신앙에 의지하고 있던 아일랜드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했다.
세 잎 클로버가 아일랜드의 상징이 된 것 역시 성 패트릭의 설교가 유래다. 가톨릭의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론을 아일랜드인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성부·성자·성령은 바로 세 잎이 붙어 있는 클로버와 같다”라고 말한 것이 아일랜드인들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고 한다. 즉, 성 패트릭은 지금 아일랜드의 종교적 정체성을 만든 인물이다. 아일랜드가 성 패트릭이 선종한 3월 17일을 국경일로 기념하는 이유기도 하다. 그런데 영국 혈통 린필드 진영에서 ‘아일랜드 수호성인’ 성 패트릭을 내세우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서부터는 나름의 정보를 바탕으로 한 개인적인 해석이다. 아일랜드인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성 패트릭이 본래 영국 태생이라는 걸 강조하려는 심산도 있겠으나, 그보다 더 깊은 노림수가 있다 여겼다.
잉글랜드 국기인 성 조지 십자가기가 가톨릭 성인 성 조지를 상징하는 깃발이듯, 성 패트릭에게도 상징하는 기가 있으니 바로 ‘성 패트릭 십자가기’다. 이 기를 설명하자면 영국 국기 유니온 잭 속 붉은색 X 표식이다.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성 패트릭 십자가 기는 흰 바탕에 붉은색 X선이 그려진 깃발이다.
도네걸 애비뉴의 그 설명문에 따르면, 성 패트릭 십자가 기는 1783년 당시 영국 국왕이었던 조지 3세가 윤허해 이 지역을 뜻하는 정식 기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기가 아일랜드가 독립한 1922년까지 아일랜드 섬 전체를 가리켰다고 한다. 제법 오랫동안 아일랜드기로 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기가 영국 국기 유니온 잭의 일부로 쓰였으며, 지금도 쓰이고 있다. 이를 통해 바라본다면, 아일랜드는 연합 왕국 영국의 일부라고 해석할 수 있다.
심지어 이 기의 주인공이 아일랜드인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성 패트릭이다. 북아일랜드 내 아일랜드계들에겐, 아일랜드 수호성인 상징인 성 패트릭 십자가 기를 거부해서는 되겠느냐는 영국계의 무언의 압박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선지 분리 독립을 원하는 강성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은, 성 패트릭 십자가기가 ‘영국 왕’이 허락해서 공식 사용된 깃발인 만큼 영국의 아일랜드 식민 지배를 상징한다고 강하게 거부하고 있다.
당연하겠지만, 아일랜드계들은 아일랜드 삼색기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내세우고 있다. 아일랜드 섬 남녘에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아일랜드 공화국의 공식 국기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얼스터 배너든 성 패트릭 십자가기든 가당찮다고 여길 수밖에 없다. 영국의 통치도, 심지어 북아일랜드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는다. 아일랜드 섬은 온전히 아일랜드인들의 것이라 믿고 있다. 린필드 팬들의 근거지인 윈저 파크 인근은 아일랜드계가 내심 분노할 수밖에 없는 장소다.
곱씹을수록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아일랜드계가 질색할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 가득한 거리를 걷다 한 교차로에 닿았을 무렵, 어느 골목으로 빠지려던 내 팔을 한 현지인이 위험하다며 잡아챘다. 알고 보니 아일랜드계의 근거지인 폴스 로드로 빠지는 길이었다. 직접 왕래가 가능할 정도로 분위기가 유해졌다고는 하지만, 현지인들의 긴장 관계는 여전히 유효했다. 등 뒤를 돌아봤다. 걸어왔던 거리에는 집집마다 유니온 잭이 나부끼고 있었다. 어쩌면 무심결에 적성국과 적성국을 오갔던 게 아닐까 하며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