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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볼 보헤미안 Dec 24. 2019

너희들의 추모에는  결코 동참할 수 없다

영국-북아일랜드의 어두운 역사, 그리고 맥클린의 소신

벨파스트 샌디 로우 지역에 새겨진 영국계 주민들의 현수막 @풋볼 보헤미안

나라를 지킨 호국영령을 향한 존경심은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드높다. 매년 11월 양귀비꽃 배지를 옷에 달고 생활하는 영국인들은 특히 그렇다. 지난 얘기에서 영국 축구계의 분위기 역시 추모 열기로 매우 뜨겁다고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모든 이들이 총탄에 쓰러진 군인들을 추모하는 건 아니다. 도리어 그들을 저주하며 양귀비꽃 배지를 비롯한 모든 추모 행위를 거부하는 이들도 있다.     


북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 출신 미드필더 제임스 맥클린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잉글랜드 EPL 챔피언십에 속한 스토크 시티에서 활약하고 있는 맥클린은 수년째 양귀비꽃 배지 부착을 거부하고 있다. 그리고 맥클린 이외에도 몇몇 아일랜드계 인사들이 마찬가지 행동을 하고 있다. 조국을 지킨 군인들에게 고개 숙여 감사함을 전하지 않겠다니, 평범한 영국인들의 시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일 것이다. 실제로 이들을 ‘매국노’로 지목하는 과격한 이들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벨파스트에 머물면서 다른 일정 때문에 약 2시간 정도 떨어진 데리 시티를 가지 못한 건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영국인들에게는 런던데리라 불리는 이 도시에서 수십 년 전 광주 민주화 운동에 비견되는 끔찍한 참상이 빚어졌다. 1972년 1월 전 세계를 놀라게 한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이 ‘피의 일요일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북아일랜드 내 아일랜드계 주민과 영국계 주민의 오랜 갈등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얼스터라고도 불리는 이 지역을 포함한 아일랜드 섬 전체가 영국 식민지였다는 건 많은 이들에게 유명하다.

아일랜드 독립은 무장 투쟁으로 이뤄졌다. @풋볼 보헤미안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는 어두운 역사로 점철된 한·일 관계의 유럽 버전이라 봐도, 아니 그보다 좀 더 심각하다고 여겨도 무방하다. 아일랜드가 영국에 식민 지배를 당한 시기만 800여 년이다. 아일랜드는 사실상 노예 취급을 받으며 지내다 20세기 초 무장 투쟁 끝에 겨우 독립을 얻어낸 바 있다. 그런데 아일랜드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북아일랜드 지역이 영국에 남아버렸다. 바다 건너 스코틀랜드에서 넘어온 이주민들의 비중이 높았던 지역이라 영국에서 이 지역을 놓지 않았고, 아일랜드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동의받기 위해 북아일랜드 지역을 사실상 포기해버렸다. 북아일랜드 지역은 아일랜드의 독립 이후 붕 뜬 지역이 됐다.     


영국 정부가 북아일랜드에 잔류하게 된 아일랜드계를 국민으로서 동등하게 대우했다면 이후 빚어진 분쟁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국 정부와 북아일랜드의 실질적 행정 권력을 쥔 영국계들은 아일랜드계를 온갖 방법으로 핍박했다. 영장을 제시하지 않은 경찰에게 폭력적인 불법 수색을 당하기도 했고, 집회 역시 허락받지 못했다.      


거의 모든 부분에서 차별당하고 있던 아일랜드계가 가장 크게 품고 있었던 불만은 바로 선거권이었다. 북아일랜드는 다른 영국 지역과 달리 1인 1투표제가 아닌, 1가구 1투표제로 선거가 치러졌다. 즉 한 세대당 한 표씩 행사하는 제도다.      


그런데 이 제도는 당시 북아일랜드 사회의 현실상 아일랜드계에 매우 불합리한 제도였다. 경제적으로 윤택했던 영국계들은 핵가족 소가구였던 것과 달리, 상대적으로 어려웠던 아일랜드계는 대가족을 이루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북아일랜드 정부는 주택 분양에도 관여해 본토에서 이주한 영국계를 우대하는 정책을 폈으며, 선거구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게리맨더링까지도 추진했다. 영국계가 선거에서 유리할 수 있도록 조직적으로 대응한 것이다.     

시위에 참가한 아일랜드계 주민들을 체포하는 영국군. 벽화로 조성되어 있다. @풋볼 보헤미안

이에 아일랜드계들의 불만이 고조됐다. 1969년 북아일랜드 치안을 담당하는 왕립 얼스터 경찰대(RUC)가 영장 없이 아일랜드계 가구를 침입해 폭행하고 구속하는 일까지 벌어지자 분위기는 더욱 심각해졌다. 이런 가운데 아일랜드 내에서는 아일랜드계를 재판 없이 구금을 허용하는 정책 도입이 검토됐다. 심각한 차별 행위가 법적으로 용인될 수 있다는 얘기에 분노한 아일랜드계는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비폭력 평화 시위를 벌이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1972년 1월 30일, 데리 시티에서도 그런 시위가 벌어졌다. 그런데 이 집회는 끔찍한 비극이 되고 말았다. 시위대 중 일부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집회를 통제하기 위해 동원된 영국군에게 돌팔매질했고, 영국군이 이를 빌미로 시위대에 발포한 것이다. 이 사건이 ‘피의 일요일’ 사건이다. 이 자리에서 14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들은 당시 돌팔매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무고한 시민이었다. 설령 돌팔매질을 한 이들이었다고 해도 문제다. 군이 시민을 대상으로 발포했다는 점만으로도 능히 지탄받을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IRA는 Irish Republican Army의 약자다. 아일랜드 공화국 독립에도 기여했으며, 북아일랜드의 분쟁에도 영향력을 끼쳤다. @풋볼 보헤미안

뒷수습은 더 최악이었다. 영국 법원은 당시 시위에서 일어난 불상사의 책임을 집회를 평화적으로 관리하지 못한 시위대 수뇌진에게 물었고, 정작 발포한 영국군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자 아일랜드계는 평화적 시위를 포기하고 무장 투쟁 노선으로 선회했다. 그리고 아일랜드계 무장 단체인 IRA가 보복에 나섰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 있은 후 6개월 뒤, 벨파스트에서 차량 폭탄 테러를 일으켜 영국군 2명을 포함해 총 아홉 명이 죽고 130명의 시민이 다치는 테러가 빚어진 것이다. 이 사건은 금요일에 있었다고 하여 ‘피의 금요일 사건’으로 불린다. IRA가 준동하자, 영국계도 자신들을 지킨다는 이유로 UDA(얼스터 방위대)라는 무장 조직을 구성해 반격에 나섰다. 숫제 피와 살이 튀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아일랜드계 투쟁의 아이콘 바비 샌즈의 벽화. 벨파스트의 주요 관광 명소 중 하나다. @풋볼 보헤미안

아일랜드계는 폭력적 투쟁은 물론 선거제를 활용한 영국 의회 진출까지 도모하며 저항을 이어나갔다. 바비 샌즈라는 사내는 상징적인 인물이 됐다. IRA 대원으로 활동하다 체포된 샌즈는 영국 하원 의원 선거에 옥중 출마를 해 아일랜드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당선됐다. 샌즈는 당선 이후 자신을 테러범이 아닌 정치범으로 대우하길 요구했다.      


자신은 죄수가 아니라는 이유로 알몸에 모포를 두르는가 하면, 함께 수감된 IRA 대원과 함께 릴레이 단식 투쟁을 벌이며 영국 정부를 압박했다. 참고로 이 릴레이 단식 투쟁은 우리네 정치판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어설픈 정치적 쇼가 아니다. 단식을 시작한 이가 목숨을 잃으면 다음 순번이 단식을 똑같은 방식으로 이어나갔다. 워낙 파급력이 클 수밖에 없는 시위 방식이다 보니 영국 정부는 안팎으로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영국 정부 역시 독했다. 마가렛 대처 당시 영국 총리는 “한낱 테러범을 정치범으로 대우할 수 없으며, 샌즈가 굶어 죽겠다고 한 건 그가 스스로 내린 결정에 불과하다”라고 잘라 말하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샌즈는 66일간 물 한 모금 먹지 않고 단식하다 목숨을 잃었고, 그의 뒤를 따라 아홉 명이 더 같은 방식으로 굶어 죽었다. 이들의 죽음은 아일랜드계를 더욱 격분시키는 사건이 됐음은 당연하다.     

영국계와 아일랜드계의 분쟁이 한창 심할 때 벨파스트 주민들의 통행 모습. 벽화로 남아있다. @풋볼 보헤미안

이런 ‘미치광이 갈등’이 30년 넘게 지속되다 보니 북아일랜드 전역이 사실상 내전 상태에 빠져들었고, 벨파스트는 분쟁의 중심지가 됐다. 특히 지근거리에 붙어 있는 폴스 로드와 샨킬 로드의 분위기는 마치 적성국을 대하는 듯한 주민들의 갈등으로 악명이 높았다.


참고로 폴스 로드에는 아일랜드계가, 샨킬 로드에는 영국계 주민이 거주한다. 지금도 두 지역 사이에는 마치 휴전선 철책선을 떠올릴 법한 거대한 철문이 놓여 있으며, 아일랜드 삼색기와 유니온 잭이 저마다 펄럭이고 있다. 지금이야 왕래가 가능하다지만 과거에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아일랜드계와 영국계의 갈등은 극심했다.     

지금도 폴스 로드와 샨킬 로드를 가르는 철책문이 존재한다. @풋볼 보헤미안

양 측의 갈등은 1999년 영국 정부와 아일랜드 정부가 중재자로 나선 가운데, 격렬하게 싸웠던 영국계와 아일랜드계가 한자리에 모여 맺은 굿 프라이데이 평화 협정 후에 겨우 가라앉을 수 있었다. 영국은 피의 일요일 사건 당시 발포 등 과잉 진압한 영국군의 잘못을 인정했으며, 지난 2010년에는 데이비드 캐머런 당시 영국 총리가 재차 공식 사과다. 아일랜드는 북아일랜드 역시 자신들의 영토라고 명기해놓았던 헌법 조항을 폐기하면서 한발 물러났다.


북아일랜드 내 아일랜드계와 영국계는 ‘모국’이 최대한의 양보를 하는 자세를 취하자 더는 총을 들 수 없었다. 일단 갈등은 봉합됐다. 이 평화가 현재 20년째 유지되고 있다.

지금도 몇몇 아일랜드계들이 품은 원한은 매우 심하다. @풋볼 보헤미안

그러나 지금도 벨파스트에서는 당시 분쟁의 흔적을 살필 수 있다. 관광객들에게 ‘평화의 벽(Peace Wall)’로 불리는 지역은 지금이야 관광 상품으로 포장되어 소개된다. 앞서 소개한 샌즈의 벽화는 벨파스트의 주요 관광 핫스팟 중 하나일 정도다. 하지만 잠잠해졌을 뿐 이후 조금이라도 불똥이 튄다면 얼마든지 다시 폭발할 가능성이 높은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폴스 로드를 걸으면서 ‘BRIT OUT(영국인들은 나가)’라는 낙서를 수없이 발견할 수 있었다.     


축구와 관계없는 듯한 이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어놓은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서두에 소개한 맥클린의 고향이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난 데리 시티다. 영국군이 나라와 세계를 구했다고 한들, 맥클린의 눈에는 자신들의 고향 사람에게 총부리를 겨눈 무도한 집단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맥클린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실제로 아일랜드계에게 당시의 사건은 씻을 수 없는 아픔이다. 이유야 어쨌든 그들을 위해 도저히 추모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내막을 알게 되면 남들이 다하는 추모를 하지 않으려는 맥클린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지금의 축구 팬들에게 가장 큰 관심을 모으는 분쟁 지역인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 이상으로 아일랜드계와 영국계의 다툼이 심각했음을 알리기 위함이다. 이들의 분쟁은 축구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아일랜드계를 대표했던 ‘그랜드 올드 팀’ 벨파스트 셀틱이 차별에 분노해 팀을 스스로 해체하는 일도 있었다.      

바다 건너 글래스고에서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올드펌’ 더비의 역사적 배경이 되기도 했다. 참고로 글래스고의 올드펌은 벨파스트와는 완전히 반대 구도로 진행된다. 벨파스트가 바다 건너 많은 글래스고에서 넘어온 스코틀랜드인들이 정착하는 바람에 문제가 됐다면, 글래스고는 반대로 벨파스트를 출발한 아일랜드계들이 정착하며 지역 사회 분위기를 반으로 갈랐다.


때문에 그들에게 지난 100년간 벨파스트나 글래스고에서 벌어진 축구 경기는 단순히 스포츠가 아니라 ‘대리전’일 수밖에 없었다. 총탄이 빗발치고 폭탄이 터지는 무시무시한 분위기 속에서 적대감을 키웠으니, 그들에게 축구는 한낱 공놀이가 아니었던 셈이다.     

아일랜드계의 투쟁은 남자들의 몫이 아니었다. 여성들도 총을 들고 영국군과 전투를 벌였다. @풋볼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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