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축구 기자가 꿈꿀 법한 롤 모델
도네걸 애비뉴에서 윈저 파크로 돌아와 사전에 예약한 북아일랜드축구협회(IFA)의 참관 프로그램을 돌아봤다. 윈저 파크 곳곳을 돌아봄과 동시에, 이곳에 사무실을 마련하고 있는 IFA의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접하고 실제로 체험하는 코스로 이루어졌다. 물론 박물관 관람도 포함되어 있다. 8.5파운드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팬들을 맞이하고 있으나, 방문한 날이 매치 데이가 아닌 평일이라 그런지 한산했다. 방문객이 혼자였다. 담당자 브라이언 씨는 참관인이 외국인, 그것도 혼자라는 사실에 처음에는 약간 당황하는 듯했다.
하지만 어색함도 금세 없어졌다. 축구라는 공통 관심사를 확인한 순간 이후 함께한 시간은 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적당히 친해지자 때마침 스타디움을 방문한 린필드 사령탑 데이비드 힐리 감독을 소개해주며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현역 시절 유로 2008 지역 예선에서 스페인에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북아일랜드에 3-2 승리를 안긴 공격수 아니냐는 나름의 습자지 지식을 얘기하니, 그 말을 기억하곤 때마침 스타디움 안에서 만난 힐리 감독을 내게 소개해 준 것이다.
참고로 힐리 감독은 풀럼 FC에서 설기현과도 한솥밥을 먹었던 선수로, 벨파스트에서는 조지 베스트 버금갈 만큼 벽화 모델로 많이 등장한다. 비록 지역 예선이라고는 해도, 그의 스페인전 해트트릭이 이 지역 축구팬들에게 얼마나 강한 인상을 남겼는지를 길거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실 북아일랜드 축구는 전 세계까지 갈 것 없이 영연방 4개국 중에서도 그리 내세울 게 별로 없다. 그들이 박물관에 내세우는 자랑거리는 1960년대 유럽 축구의 스타였던 조지 베스트, 세 차례의 월드컵 본선 진출, 그리고 지난 유로 2018에서 거둔 대회 16강 정도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성과를 낸 한국인의 시각에서는 사실 그리 대단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성과물이었다.
하지만 뭔가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라, 전시물 자체에 집중한다면 그들의 박물관을 돌아보는 시간은 매우 흥미로울 것이다. 쉽게 접할 수 없는 북아일랜드 축구의 과거와 오늘을 깔끔하게 전시해놓았으며, 옛 유물을 통해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의 오묘한 과거도 접할 수 있다. 그리 크진 않아도 체험형 공간까지 마련해놓는 등 제법 내용이 알차게 마련되어 있어서다.
그런데 전시물 자체보다 벽에 붙은 한 패널에 더 관심이 갔다. 브라이언 씨와 첫 만남에서 “한국에서 축구 전문 기자를 했다. 2014 FIFA 브라질 월드컵 현장 취재도 했었다”라고 자기소개를 했는데, 미디어 콘퍼런스 룸에 들어서자마자 브라이언 씨가 단상이 아닌 뒷면으로 데려갔다. 그곳에는 한 노신사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브라이언 씨는 “당신이 축구 기자라면 이 분이 당신에게 좋은 목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브라이언 씨가 소개한 사진 속 노신사는 지난 2013년에 향년 83세로 작고한 말콤 브로디라는 축구 전문 기자다. 1943년 벨파스트 최대 지역지인 <벨파스트 텔레그라프>에 입사해 1950년 체육부로 옮긴 후 41년간 활동했으며, 1991년 편집장에서 물러난 후 대기자로서 <벨파스트 텔레그라프>에서 정기적인 칼럼을 기고하며 왕성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브로디 기자의 ‘다운 메모리 레인(Down Memory Lane)’은 영국 내에서 최고 권위를 인정받았던 축구 칼럼이라 한다.
그의 사진과 설명을 보면서 가장 먼저 시선이 닿았던 건 하단에 자리한 월드컵 공식 포스터였다. 브로디 기자의 1954 FIFA 스위스 월드컵부터 2006 FIFA 독일 월드컵까지 14회 연속 월드컵 본선 현장 취재 이력을 설명한 것이다. 그러니까 말로만 들었던 스위스 월드컵의 ‘베른의 기적’부터 ‘축구 황제’ 펠레의 전성기, 요한 크루이프와 프란츠 베켄바워가 자아낸 세기의 라이벌전, 디에고 마라도나의 원맨쇼, 지네딘 지단이 펼쳐 보인 예술 축구를 현장에서 직접 지켜봤다는 뜻이다. 물론 ‘태극 전사’들의 4강 신화도 브래디 기자의 취재 대상이었다.
이런 이력 덕에 브로디 기자는 생전인 2004년 FIFA로부터 특별 공로상인 줄리메상을 거머쥐며 세계 최고의 축구 전문 기자로서 공인받기도 했다. 최고(最高)든 최고(最古)든, 그 평가가 아주 온당해 보이는 언론인이었기에 가능한 상이었다. FIFA뿐만 아니라 영국 왕실에서도 그는 특별한 존재로 인정받았다. 1979년, 3등급(MBE) 대영 제국 훈장을 받았다. 북아일랜드뿐만 아니라 ‘축구 종가’ 영국 전체에서 추앙받는 기자라 할 수 있다. 작고한 후에는 알렉스 퍼거슨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을 비롯한 영국 전역의 축구인들이 추모를 하기도 했다. IFA도 브로디를 레전드 선수 못잖게 챙기고 있다. 윈저 파크 미디어 콘퍼런스 룸의 정식 명칭이 바로 ‘더 말콤 브로디 미디어 센터’이니 말 다했다.
브로디 기자를 활용해 꾸며놓은 기자실이 유달리 특별하게 느껴졌던 이유가 있다. 축구나 축구 선수가 아닌, 축구 기자가 이토록 뜨거운 찬사를 받는 경우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사실 축구 기자는 축구 산업에서 정말 필요한 존재이긴 하다. 그들이 있어야 축구계 이슈들이 팬들에게 전달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축구 산업이 커질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축구 기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전 세계 어딜 가든 그리 곱지 못하다. 몇몇 축구인들은 미디어에 대단히 적대적인 스탠스를 취하며, 한국에서는 흔한 표현이 되어버린 ‘기레기’라는 단어가 말해주듯 팬들도 꽤나 사납게 바라본다. 한국만 그런 게 아니라 전 세계가 다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로디 기자는 실로 찬사를 받는 축구 언론인이었다. 중앙 메이저 언론사가 아닌 북아일랜드의 지방지에 몸담고 있다는 악조건은 아무런 제약이 되지 않았다. 반세기가 가까운 시간 동안 기꺼이 취재 현장을 뛰어다니며 영국 내에서 ‘참’ 축구 언론인의 아이콘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니, 한국에서 이게 가능할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브로디 기자의 얘기를 접하며 또 한 명의 기자가 떠올랐다. 개인적으로 브라질 월드컵 취재 현장에서 만났던, 노트북이 아닌 수첩에 직접 필기로 기사를 작성하던 백발의 동양인 노기자가 떠오른다. 2014년 FIFA 발롱도르 시상식에서 제프 블라터 당시 FIFA 회장으로부터 FIFA 회장상을 받았던 카가와 히로시 기자다. 그 역시 1952년부터 축구 전문 기자로 활동해 스위스 월드컵부터 대회 현장을 누인 브래디 기자 못잖은 커리어를 가진 대기자다. 아니, 카가와 기자는 현재도 생존해 프리랜서 기자로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니 어찌 보면 더 대단한 노익장을 발휘하고 있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카가와 기자는 구순이 다 되어 가는 현재 일본축구협회(JFA)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일본 축구사에 대한 아카이브를 만드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축구박물관 내에 위치한 일본 축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그는 자국 내에서 축구 언론인을 넘어 축구 원로로 대우받고 있다. 브로디 기자처럼 온 나라의 축구 기자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최고의 기자라는 인정을 받은 것만으로도 크게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인 이야기이나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간단히 말해 반성문이다. 2006년부터 기자라는 직함을 달고 현장을 누볐었다. 햇수로는 14년이라는 적잖은 시간을 축구 경기장에서 보냈다. 늘 행복했던 곳에 질리기 시작했고, 매일 쳇바퀴 굴러가듯 흐르는 일상에 지쳐버렸었다. 축구 기자로서 늘 가슴에 품었던 목표였던 월드컵 현장 취재도 2014년 브라질 대회를 통해 이뤘으며, 월드컵 이외에도 남들이 부러워할 법한 경험을 많이 했다. 그래선지 언제부턴가 할 만큼 하지 않았느냐는 생각을 가졌다.
길고도 긴 유럽 축구 여행을 떠나게 된 가장 주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입때껏 쌓은 나름의 잔재주를 통해 비석 하나 세운다는 마음이 컸고, 어쩌면 ‘좋아하는 것’을 위한 마지막 일탈이라는 생각에 마음껏 즐기고 싶다는 마음이 부풀어 올랐다. 첫 도착지 독일 땅에 발을 디뎠을 때 허둥대면서도 그저 기뻤던 것도 그런 해방감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영면한 브로디 기자의 이야기를 접한 후, 어쩌면 지난 수년간 머릿속을 괴롭혔던 그 생각이 팔자 좋은 나약한 태도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은 부끄러워졌다. 곰곰 생각해보면 이곳 벨파스트에서 만날 수 있는 브로디 기자까지 찾지 않더라도, 한국에서도 여전히 열정적으로 현장을 뛰어다니는 선배 기자들을 만나볼 수 있다. 어쩌면 내가 유럽에서 느꼈던 해방감은 실은 삶에서 도피하는 데 성공했다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브로디 기자의 일생은, 더는 경험할 게 없다고 엄청나게 착각했던 내게는 머리를 강하게 한 대 때리는 듯한 일침처럼 느껴졌다. 조금은 돌아가고 싶어졌다. 다시 축구 취재 현장으로 복귀한 이유기도 하다. 이역만리에서 얼굴도 몰랐던 대선배에게서 큰 걸 배운 것 같다. 인생이라는 측면에서 특히. 그래선지 브로디 기자를 소개해 준 브라이언 씨에게도 정말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