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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풋볼 보헤미안 Dec 22. 2019

축구 선수, 전쟁 영웅이 되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축구 선수들

매년 11월 영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귀비꽃 @풋볼 보헤미안

매년 11월 11일,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일(Remembrance Day)을 맞아 전국이 추모 열기에 빠져든다. 영국인들은 브리튼 섬은 물론이며 유럽과 세계를 지킨 영국 군인들의 희생에 대해 잊지 않고 있으며, 영원토록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일로 여기고 있다. 이 시기 영국인 ‘대부분’이 가슴에 양귀비꽃(poppy) 배지를 달고 조국에 목숨을 마친 호국영령들을 위해 추모한다.     


In flanders fields  플랑드르 들판에서

In flanders fields the poppies blow      플랑드르 들판에 양귀비 꽃피었네
Between the crosses, row on row,        줄줄이 서 있는 십자가들 사이
That marks our place; and in the sky   그 십자가는 우리가 누울 곳을 알려주네
The larks, still bravely singing, fly         종달새는 하늘로 힘차게 날아오르며 노래를 부르건만
Scarce heard amid the guns below.      요란한 종소리에 그 노래 들리지 않네.     

- 존 맥크레(1872~1918)


이 양귀비꽃을 설명하기 위해 시 한 편 소개했다. 영국인들이 종전기념일을 기념해 가슴에 붙이는 양귀비꽃 배지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캐나다군 의무관으로 참전한 존 맥크레 소령의 시 플랑드르 들판에서(In flanders fields)에서 유래했다. 시의 서사에서 알 수 있듯, 제1차 세계대전의 격전지 중 하나였던 플랑드르(프랑스 북부, 벨기에와 네덜란드 지역) 지역에서 수없이 목숨을 잃었던 영국 군인들의 시체와 흘린 피를 새빨간 양귀비꽃에 비유한 것이다.     

런던 제국 전쟁 박물관에 자리한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사진 @풋볼 보헤미안

실제로 이 지역제1차 세계대전 전장을 통틀어 가장 끔찍한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다. 특히 1916년 7월 1일부터 11월 18일까지 프랑스 솜에서 벌어진 두 차례의 참호 전투, 이른바 ‘솜 전투’는 최악의 악몽으로 기억된다.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총 한 자루 손에 쥐고 적의 기관총 세례를 뚫어야 했던 영국 군인들이 수없이 전사했다. 기록에 따르면 12㎞를 전진하는데 영국군만 42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기록상으로는 10미터를 전진하는데 35명이 죽었다는 계산이 나오니 숫제 지상에 강림한 지옥이었다는 표현도 모자라지 싶다. 영국인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추모하는 것도 일견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영국 축구계도 이에 동참한다. 매년 11월이 되면 영연방 4개국 대표팀은 당연하고,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를 비롯한 영국 내 각 프로축구 리그에 속한 클럽에 속한 선수들의 유니폼에 양귀비꽃 배지가 부착된다. 선수뿐만 아니라 감독도 상의에 이 배지를 붙여 영국을 지킨 이들을 추모한다. 전국민적인 추모 열기에 동참하는 듯한 모습인데, 단순히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니다. 그 끔찍한 참화는 축구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자발적인 입대를 촉구하는 영국군의 포스터 @풋볼 보헤미안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에는 수많은 축구 선수들도 함께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손흥민이 군대에 가느냐 마느냐를 놓고 흥미로운 시선을 던지는 영국인들이지만, 100년 전에는 영국인들의 사정이 그랬다. 셜록 홈즈의 저자 아서 도일 경은 “사지를 움직일 힘이 있으면 전쟁터에 봉사하라”라며 영국 남자들의 참전을 독려했고, 그 대상은 축구 선수도 마찬가지였다. 압박도 있었다. 조지 5세 당시 영국 국왕은 축구 선수들이 참전을 거부하면 FA(잉글랜드축구협회)에 하던 지원을 끊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결국 1915년 1월 영국 풀럼에서 축구 선수들이 중심이 된 부대가 구성됐다. 당시 잉글랜드 국가대표였던 프랭크 버클리가 ‘축구 선수 1호’ 참전 군인이 됐으며, 석 달 후 122명의 선수가 조국의 부름에 응해 영국 육군 예하 미들섹스 연대 제17대대에 편성됐다. 스코틀랜드에서도 마찬가지다.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를 연고로 한 하츠 오브 미들로시안에 속한 16명의 선수들이 한꺼번에 입대해 부대를 이뤄 미들섹스 연대 제17대대 예하 부대로 배속됐다. 제17대대가 구성되자 세 달 뒤에는 또 다른 축구 선수부대인 제24대대도 창설됐다.


축구 선수들을 비롯한 영국 남성들의 뜨거운 애국심 덕분에 영국군은 전쟁 기간 880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대신 축구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참전하는 분위기 때문에 갓 뿌리를 내리고 있던 잉글랜드 풋볼 리그(現 EPL)를 비롯한 영국 내 남자축구 리그의 정상 가동이 불가능했다. 이 때문에 1915년부터 1919년까지 4년간 공식 대회를 열지 못했다. 물론 볼멘소리를 낼 상황이 아니었다. 축구 선수는 당연하고 공장에도 남자들은 씨가 말라버렸고, 영국 여성들이 공장 노동 등 험한 일을 하며 군수물자를 대야 했던 사회 분위기였다. 무릇 남자라면 조국의 부름에 응해 전장으로 가야 했다.      

좌측은 도널드 심슨 벨, 우측은 월터 툴. 두 사람 모두 축구 선수 출신 전쟁 영웅이다. 맨체스터 축구 박물관에 특별히 전시되어 있다. @풋볼 보헤미안

몇몇 축구 선수들은 영웅적인 무용담을 남기기도 했다. 브래드퍼드 애비뉴라는 팀에서 뛰다 전쟁 발발 소식에 자발적으로 군에 입대한 도널드 심슨 벨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위관급 장교로 참전한 벨은 앞서 언급했던 솜 전투에서 용맹을 떨쳤다. 참호전을 치르다 전우가 위기에 처하자 빗발치는 적의 기관총 세례에도 불구하고 동료를 구해냈고, 이 소식이 영국에도 전해져 빅토리아 영웅 훈장까지 받았다.      


영국 최초의 유색 인종 프로축구 선수로 기록된 월터 툴도 마찬가지다. 노스햄프턴 타운의 하프백이었던 월터 툴은 전쟁 후 부사관이 되어 앞서 언급한 벨도 몸을 던졌던 솜 전투에 힘을 보태어 영국군의 승리를 이끌었다. 이 두 사람은 영국 축구계가 배출한 대표적 전쟁 영웅이다.     

영국 정부에서 전후 세계대전에 참전해 목숨을 건 축구 선수들을 위해 마련한 기념추모비. 맨체스터 축구 박물관이 전시하고 있다. @풋볼 보헤미안
We are the dead.                                                                 우리는 죽은 자들
Short days ago We lived, felt dawn, saw sunset glow 며칠 전만 해도 새벽을 느끼고 석양을 보았네
Loved, and were loved,                                                     사랑하고 사랑받기도 했건만
and now we lie in flanders fields.                                   지금 우리는 플랑드르 들판에 누워 있다네.
Take up our quarrel with the foe                                    우리의 싸움을 이어 받으라.
To you from failing hands we throw The torch            힘이 빠지는 손으로 집어던지는 횃불
Be yours to hold it high.                                                   이제 그대들의 것이니 높이 들라.
If ye break faith with us who die                                    우리의 신의를 저버린다면
We shall not sleep,                                                            우리는 영영 잠들지 못하리.
though poppies grow in flanders fields.                       플랑드르 들판에 양귀비 꽃필지라도.

- 존 맥크레(1872~1918)     

그러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축구 선수 출신 전쟁 영웅 벨과 툴도 마찬가지였다. 벨은 훈장을 받은 지 닷새 후 적의 총탄에 머리를 맞아 목숨을 잃었다. 툴은 솜 전투에서 승전한 후 영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프랑스 칼레로 이동하다 독일군의 습격에 목숨을 잃었다.


 아예 팀으로서 참전한 하츠 오브 미들로시안은 더 안타까운 일화를 남겼다. 풀백 던컨 커리를 비롯해 일곱 명이 전사했는데, 전쟁 전 스코틀랜드 신흥 강호로 부상하던 하츠 오브 미들로시안은 이 전쟁의 여파로 이전의 위상을 잃어버렸다. 어쩌면 제1차 세계대전이 없었더라면 하츠 오브 미들로시안이 지금의 셀틱 혹은 레인저스에 비견할 만한 클럽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밖에도 이름도 알 수 없는 수없이 많은 무명 축구 선수들이 덧없이 목숨을 잃었다.     


이런 사연 때문에 영국 축구계는 매년 11월이 되면 열리는 종전기념일 행사를 가볍게 여길 수 없다. 함께 팀을 이루거나 필드에서 실력을 겨뤘던 축구 선수들이 수없이 희생됐기 때문이다. 즉, 현지에서 느낀 영국 축구계의 자세는 전쟁의 비극은 그저 군인들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영국은 조국을 지킨 이들을 잊지 않는다. @풋볼 보헤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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