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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 Sep 21. 2024

침실 인간과 동거 중

지난 반년을 요약해 보자면 이렇다.


    눈을 뜨자마자 식빵 두 쪽을 토스트기에 넣는다. 손바닥만 한 주물팬을 달구고 계란 두 개를 탁탁 깨트려서 프라이한다. 제철 과일을 한입크기로 썰어서 접시에 담는다. 아이들 방 블라인드를 올리고 욕실로 들어간다. 재빠르게 샤워하고 헤어 드라이를 하고 나오면 아이들은 옷을 갈아입고 식사를 하고 있다. 첫째 아이가 먼저 등교하고 둘째 아이는 나랑 등원한다. 회사 2층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고 나는 5층으로 출근한다.


    오후 6시 정각에 퇴근을 해서 둘째 아이를 하원한다. 집에 오자마자 밥통을 열어보는 것으로 저녁 식사 준비를 시작한다. 밥 국 반찬을 식탁에 차려놓으면 나는 입맛이 하나도 없어서 아이들 먹는 것을 구경한다. 주말은 평일보다 끼니가 많아서 더 분주해진다. 이상.


    S는 침실 인간이 되었다. 침실에 딸린 욕실을 사용하고 침대 옆에 책상에서 일을 한다. 모두가 잠든 밤이 되어서야 침실 밖으로 나온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로 짐작건대 맥주와 봉지과자를 챙기는 모양이다. 끼니는 햇반과 3분 요리로 해결한다. 베란다에 햇반, 3분 짜장, 카레, 미트볼이 박스채 쌓여있다. 한 번은 S가 아이들과 내가 쓰는 욕실에서 마른 수건을 꺼내가는 모습을 봤는데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콧김이 뜨겁게 새어 나왔다.


    마른 수건 몇 장, 그게 뭐라고. 그건 시간에 쫓겨 간신히 지켜내고 있는 일상이었다. 버틴다는 표현이 알맞을까. 둘이 하던 살림과 육아를 혼자 하는 버거움은 육체적인 문제만은 아니었다. 좋은 엄마이고 싶은 자아와 평범한 직장인 자아를 보듬고 가는 것만으로도 허덕이는데, 침실인간을 증오하는 자아까지 끼어들어서 조각난 영혼은 자주 화가 나고 슬퍼졌다.


    "고민이 있는 사람은 친구들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 될 일이다. 문제가 있다고 해서 '누군가를 찾는다'는 것은 맨해튼에 사는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지"*라는 소설 속 한 문장이 떠올랐다. 주인공이 심리 상담을 농담거리 삼는 말이었다. 이야기 속 그도 결국 심리 상담사를 찾아가 도움을 받는다. 나도 심리 상담을 예약했다. 


    상담은 동네 카페에서 진행했다. 네모난 노트북 화면에 상담사가 나타났다. 은은한 조명 아래 단정한 단발머리의 중년 여성의 얼굴이 보였다. 옆벽과 뒷벽은 짙은 회색이었고 가구는 없었다. 자연스레 시선은 상담사 얼굴로 집중되었다.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목소리는 중저음이었다. 덕분에 긴장이 뱃속에서 천천히 녹았다.


    “힘들어요” 입 밖으로 꺼내자마자 굵은 눈물이 툭 떨어졌다. 첫 번째 상담은 그게 전부였다. 두 번째 상담 전에 청소서비스를 신청했다. 내가 먹고 자는 공간은 내 손으로 치워야 한다는 기준을 잠시 허물었다. 힘들다를 소리 내어 말한 뒤로 정말로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일상이 나를 짓눌러서 별 수 없었다. 침실 인간은 방 안에서 재택근무를 하고 청소 도우미는 침실 바깥만 청소를 했다. 상담사에게 소식을 전하자 지금은 누구의 도움이라도 필요하다며 좋은 선택이라고 했다.


    상담사는 S에 대해 몇 가지를 물었다. 질문에 의도를 파악하기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 50분 동안 아무런 방해 없이 떠들고 나면 보잘것없는 내 인생도 관심받을 자격이 있게 느껴졌다. 나는 오늘 생긴 불만부터 시간을 거슬러 결혼식 때까지 몽땅 털어냈다. 스스로가 치사하게 느껴졌지만 상담사는 “괜찮아요, 그럴 수 있어요”라며 다독였다. 이 목소리는 일상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차오를 때마다 메아리가 되어 나를 다독여주었다.


    8회 차 마지막 상담을 남겨놓고 결심했다. 이제 때가 되었다. 이혼을 해야겠다. 반년 간 말 한마디 나누지 않은 사이라면 당연한 결론이다.


    내 말을 들은 S의 눈은 동그래졌다.






* 알랭 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은행나무

** 사진: UnsplashTy Carl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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