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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 Sep 22. 2024

심신 안정이 필요할 때

눈동자에서 한 줄기 빛이 스쳤다. 아마도 당혹감. S는 생각해 보겠다는 짧은 대답을 했고 사흘이나 흘렀다.


    내가 내린 결론이 당연하지 않은 건가. 의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언젠가 S가 그랬다. "너는 참을성이 모자라. 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잠깐도 참기 힘들어하지." 솟아난 의심을 내리밟았다.


    퇴근 후 집안 풍경에는 작은 변화가 생겼다. 다용도실에 쌓여있던 분리수거가 없어졌고 욕실에 보송한 수건이 채워졌다. 식사시간에는 S가 침실 밖으로 나와서 요리를 했다. 계란말이나 시금치나물을 만들어서 아이들 밥그릇 앞에 놓아두고 침실로 들어갔다.


    도대체 이건 무슨 의미인가. S가 눈앞에 나타나면 꼴도 보기 싫다고 소리를 꽥 지르고 싶었다. 참았다가 아이들을 재우고 침실 방문을 열었다. S는 천하태평하게 게임 중이었다. "나는 너랑 못살아"


    "이유는?" 이토록 뻔한데 이유를 묻다니 어이가 없었다. 모래알만큼 남은 인내심을 싹싹 긁어모았다. "지난 반년 간 살림이랑 육아를 하면서 회사에 다녀보니까 혼자 할 수 있을 것 같아. 불편하게 공간을 공유하면서 지낼 필요는 없잖아."


    "나는 안 불편해." 게임 화면은 정신 사납게 빠른 속도로 바뀌고 있었다. S의 옆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며 '너는 안 불편했구나, 그럴 수도 있겠네'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느릿느릿 걸어갔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서 침실 문을 닫고 나왔다.


    뜨거운 물에 캐모마일 티백 하나를 담갔다. 마른 풀냄새와 약한 꽃향기가 퍼졌다. 캐모마일 차는 심신 안정 효과가 있다고 한다. 한 김 식기를 기다렸다. S는 침실에서 나와서 식탁을 사이에 두고 내 앞에 앉았다. "집안일은 결혼 생활 전체를 놓고 보면 내가 너보다 많이 했어. 고작 6개월 하지 않았다고 이혼 얘기를 꺼내는 건 공정하지 않아. 육아는 지금까지 네가 많이 한 거 인정해. 아이들이 잘 자라고 있는 건 네 덕분이야. 원한다면 당장 내일부터 거꾸로 반년을 살아도 돼. 자, 지금부터 살림과 육아를 빼고 우리 관계에 대해서 얘기해 보자. 나는 싸웠을 때 먼저 말을 거는 건 용기가 필요한 힘든 일이라고 생각해. 너랑 화해하고 싶은 마음에 두 번이나 말을 걸었는데 네 대답은 '말 걸지 마'와 '싫어'였어. 너는 우리 관계를 위해서 대체 뭘 했니?"


    S가 언제 말을 걸었더라.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봤다. 첫 번째는 소리 지르고 울고불고 싸운 다음 날 퇴근 무렵 <저녁에 삼계탕 끓일까?> 메시지 한 개가 있었다. 맥락 없이 부부싸움을 이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간 적은 없었다. 두 번째는 떼쓰는 아이를 달래 가며 양치를 시키고 있을 때 <있다가 얘기할래? 근데 나는 자존심 굽혀가며 말하지 않을 거야>였다. 칫솔이고 뭐고 집어던지고 집을 나가고 싶었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이혼하자고 말을 걸었으니 이것도 화해의 시도로 볼 수 있는 건가. 따지고 들기에는 소모적이다. 필요한 말만 하고 싶어서 머릿속 구석구석을 뒤져서 용건을 추렸다.


    "반년 간 육아와 집안일을 빼고 대화할 수는 없어. 나는 싸움의 잘잘못을 따져서 화해하는 것보다 중요한 걸 알게 됐거든.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계속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그게 싸움이든 뭐든. 근데 자기는 싸우면 남편과 아빠라는 역할을 제일 먼저 던져버리더라. 분명히 부부도 부모도 두 명인데, 혼자서 남겨진 일들을 해치우는 건 아주 끔찍했어."


    목이 타서 캐모마일 한 모금을 마셨다. 어느새 차게 식어있었다. "시간이 너무 늦었네. 먼저 자러 갈게." 평소 매듭짓지 않고는 못 견디는 S가 나를 순순히 보내주었다.


    곤히 자는 아이 옆에 눕자마자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니까 S는 나랑 화해하고 싶었구나. 내가 원하는 모양의 사과가 아니라고 무시했었네. 긴 냉전에 내 잘못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S와 공모자가 되어 버렸다. 뒤늦게 캐모마일 차가 효과를 발휘해서 금세 잠이 들었다.



*사진: UnsplashRaspopova Mar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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