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이다. 밝은 하늘 아래 짙푸른 바다가 보였다.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하얀색 반팔 롱 원피스가 흔들렸다. 아이들은 얇은 긴팔 티셔츠와 긴바지를 입었다. 선명한 수평선이 빛나고 파도는 하염없이 밀려온다. 새하얀 등대로 가는 길은 좁고 길었다. 강릉, 삼척, 속초. 강원도의 바다는 여러 번 다녀보았는데 대체 여기는 어느 동네일까. 바다 색깔은 익숙한데 주변은 낯설었다.
오른손에는 첫째 아이, 왼손에는 둘째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걸었다. 가까운 수면 아래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바다 색깔보다 진하고 매끈한 피부를 가진 돌고래 한 마리. 크기로 보아선 아기 돌고래다. 엄마와 떨어진 걸까. 수족관 바깥에서 돌고래를 만나다니 놀라워서 벌어진 입을 두 손으로 가렸다. 손을 놓은 틈에 첫째 아이는 돌고래를 만나러 가겠다며 바다로 뛰어들었다. 얼마 안 가 허우적거렸고 구해야 한다는 마음 하나로 나도 입수했다. 아이를 뭍으로 건져 놓고 보니 이번에는 둘째 아이가 돌고래를 만나러 간다며 풍덩. “이제 물에 들어가면 안 돼” 첫째 아이에게 다급하게 소리치고 둘째 아이를 구하러 갔다.
아이 둘을 땅 위로 올려 보내고 정작 나는 힘이 없어 올라오지 못하고 방파제 돌멩이를 힘껏 붙잡았다. 양팔의 근육이 약하게 떨렸다. 하얀 햇볕 아래에서 축축하게 젖은 아이들은 환한 미소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행이네, 입 밖으로 말이 되어 나오지는 못 했다.
지금 나를 도와줄 유일한 사람은 주차장 옆 카페에 앉아있다. S는 바닷가 주차장까지 함께 왔지만 유리창이 하나도 없는 어둑한 카페에 앉아서 아저씨들과 수다를 떨고 있다. 당연히 나를 볼 수 없다.
등골이 서늘하고 축축해서 눈을 떴다. 꿈이었다. 깨어난 후에도 자꾸만 한기가 들어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지나치게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솟구쳤다. 현실에서는 없는 게 낫다 싶은 S의 도움이 무의식에서는 간절했다. 수다 떠는 아저씨들에게 향한 시선이 내게 닿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꿈 때문에 잔 것 같지도 않았다. 어김없이 출근을 했고 보고서 표지만 모니터에 띄워놓은 채 오전 시간을 흘려보냈다. 점심 친구 울울이랑 돌솥밥집 <온기>에 갔다. "언니는 왜 이혼 안 하고 살아요?" 입사 동기이자 세 살 언니인 울울이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놀라지 않는다.
"나는 외로울 것 같아. 이번 주말 정말 외로웠거든. 남편은 태국으로 출장 갔고, 아이는 울산 할머니 집에 가서 없었어. 평소 같았으면 왜 이렇게 물 컵을 많이 쓰냐, 도대체 쓰레기는 언제 버릴 거냐며 남편이랑 서너 번은 다퉜을 텐데. 이번 주말에는 물 컵도 달랑 하나 나오고, 싸우기는커녕 말 한마디 나눌 사람이 없었어. 넷플릭스를 보면서 뒹구는 것도 반나절 하니까 더 이상 볼 게 없더라. 밥도 끼니를 때운다는 심정으로 컵라면에 삼각 김밥이나 햄버거 세트를 먹었어. 남편 오면 잘해주려고. 싸우더라도 TV가 아닌 사람 소리가 들리는 게 낫지. 조용한 집에 있으니 너무 허전했어."
S의 자리까지 메우려고 아이들과 밀착해서 지내고 있는 나는 울울이의 주말이 퍽 부러웠다. 한 박자 늦게 알아차렸다. 내가 그리워했던 건 살림이나 육아를 덜어줄 사람이 아니라 퇴근 후 시시한 일상을 나누는 대화 상대였다는 걸. 느닷없이 한기가 등을 파고들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누룽지를 나무 숟가락으로 크게 퍼먹었다.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울울이는 난감한 질문이나 어설픈 위로 대신 부모님 얘기를 보탰다.
"우리 부모님 얼마 전에 잠자는 방을 합치셨어. 30년 간 각방 생활하다가 이제는 새벽에 서로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불안하다면서 말이야. 엄마가 혼자 쓰던 침실에 아빠 침대를 옮겨서 방에 싱글 침대가 두 개 됐어. 나이가 들수록 누군가 더 필요한 것 같아. “
맞는 말이다. 죽을 때는 혼자일 수밖에 없지만 사는 동안은 누군가 필요하다. 인간은 혼자서 살지 못하는데 나는 어쩌자고 S에게 갈라서자고 했을까. 페달을 굴려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 집중하다가 정작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잊었던 건 아닐까. 질문을 뾰족하게 만들어본다.
이혼을 하면 귀찮고 괴로운 일들에서 해방이 될 수 있을까. 가령 날마다 쌓이는 빨랫감이나 다짜고짜 길바닥에 드러눕는 아이를 달래는 일 같은. 아닐 것이다. 다만 혼자 하는 억울함이 무거운 피로감으로 바뀔 뿐이리라. 내게는 책임지고 보살펴야 하는 아이가 아닌 동등한 존재가 필요하다. 함께할 상대로 S가 적당할까. 무의식이 지난밤 꿈에 그려놓은 지도를 다시 바라보았다.
*사진: Unsplash의Nate Neel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