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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다 Sep 24. 2024

부부상담을 소비했다

대낮에 고장 난 자판기를 만났다. 시원한 캔음료를 기대하고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는데 나오는 거라곤 내가 넣었던 동전뿐이었다. 한여름, 나트랑에서 길을 헤매고 있었다. 주변은 낯설고 정수리는 뜨거웠다.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세상이 펄펄 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S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떠오른 장면이다. 부부관계는 길을 잃었고 대화는 고장 났다. 내가 먼저 “지난 반년 간 힘들었어.”라고 말을 걸면 S는 “난 결혼생활 전부 고통이었어”라고 받아쳤다. S가 먼저 말을 걸어올 때는 하얀 A4용지 한 장과 볼펜 한 자루를 들고 왔다. 종이 맨 위에 <누가 먼저 화를 냈을까>를 적는다. 위에서 아래로 내가 한 잘못을 나열하는 방식이다. 마지막에는 싸움 과실비율을 정하는데 내가 8, S가 2로 정해졌다. 너 때문이야, 를 나름대로 객관적인 방식으로 증명하려고 애쓰는 S를 보고 있으면 몸에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S의 대화방식을 거부했다. 이성과 논리로 따지고 들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S는 좋은 대안을 제시하라고 요구했다. 내가 그걸 알면 우리는 진작에 화해를 했겠지.


    부부상담은 S가 먼저 제안했다. “부부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준대.” 직장 동료의 추천으로 S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원인, 사건, 결과를 정리하고 문제와 해결방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S와 심리상담은 맞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아무런 대안이 없는 나는 S가 예약한 심리상담소에 함께 갔다. 큰 빌딩 5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주차장에는 차가 많아서 주차하기 쉽지 않았고 엘리베이터는 세 번을 기다려서 탔다. 심리상담소는 반짝이는 복도 끝에 있었다. 입구에 다다르자 아이와 엄마가 문을 열고 나왔다. S는 접수를 하고 나는 대기실에서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책장에는 아동발달, 아동심리에 관한 두꺼운 책들이 꽂혀있었다.


    편안한 카페에서 네모난 노트북 화면으로 개인 상담을 했던 고박사님이 그리워졌다. 마지막 개인 상담에서 남편이 부부상담을 원한다며 상담사가 판사처럼 굴 것 같아서 두렵다는 말을 했었다. 고박사님은 그런 상담사는 없으니 걱정 말라고 나를 다독거리며 “괜찮아요.”라고 했다. 익숙한 목소리에 기대어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S가 종이 두 장을 원탁테이블에 놓았다. 이름과 나이, 학력과 직장 같은 정보를 적어야 했다. 소위 말하는 기본정보인 건가. 대체 이게 우리를 얼마나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싶어서 한숨도 웃음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냈다. 맞은편에 앉은 S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조금 긴장된다.” S에게 속삭였다. 테이블에 놓인 내 손 위로 S가 왼손을 포갰다. S의 손바닥 감촉과 온기가 느껴졌다. 손만 닿았을 뿐인데 경직된 어깨 긴장도 살짝 풀렸다. 슬그머니 손을 빼서 하얀 종이에 검은 글씨를 적었다.


    접수원은 한 명씩 상담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우리가 대화가 안 돼서 왔는데 한 명씩 상담사랑 얘기를 해야 한다고?’ 황당했지만 규칙은 이곳에 있으니 입을 다물었다. 먼저 들어간 S의 목소리가 상담실 밖으로 새어 나왔다. 얼핏 들어보니 자기는 가정을 위해 희생하고 있지만 아내가 하나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집에서는 내 잘못만 꼬집더니 상담실에서는 내게 바라는 점을 술술 털어놓았다. S는 할 말이 한참 남은 것 같았지만 밖으로 나와서 내 차례를 알렸다.


    네모난 책상 안쪽에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쓴 곱슬머리 40대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나는 아직 말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키보드를 타닥타닥 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인사는 내가 먼저 했다. 상담사는 눈 주위가 검었다. 아까 종이에 적은 이름과 나이, 학력과 직장을 확인했다. 부모님 형제자매에 대해서도 같은 정보를 물었다. 도대체 이런 게 왜 필요할까 싶었지만 짧게 대답했다. 남편과의 관계를 물었을 때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난감해서 “좋을 때는 좋지만 요즘은 안 좋아요. 말이 안 통해서요.”라고 답했다. 상담사는 더 묻지 않았고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다.


    상담사와 우리 부부가 마주 보고 앉았다. 상담사는 지켜야 할 두 가지를 말했다. 부부 상담을 진행하는 동안 단둘이 대화를 나누지 말 것, 기본적인 인사만 나눌 것. 상담을 하면서 가정에서 대화를 나누면 오히려 관계가 나빠질 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S는 한 명씩 따로 불러서 나눈 이야기를 정리해 달라고 요구했고 상담사는 “전형적인 의사소통 문제가 있는 부부입니다”라고 했다. “대화법을 배우면 이제 싸우지 않는 건가요? 그럼 대화법을 알려주세요.” S는 따지듯 물었다. 우리 부부에게 알맞은 대화법은 우리가 노력하는 만큼 배울 수 있다고 상담사는 모호하게 답했다. S는 확답하지 않는 상담사를 다그치며 커리큘럼이라도 제시해 주기를 원했다. 그래야 상담을 연장할지 말지 결정할 수 있다고. 상담사는 “부부갈등은 단시간에 해결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오늘은 상담시간을 초과했네요.”로 마무리했다.


    접수원은 다음 상담을 예약 일정을 물었고 S는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S는 시간과 돈만 날렸다고 구시렁거렸다. S는 싫어하겠지만 나는 사람 마음에 달린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정이란 거대한 바다에 이성이라는 조각배가 떠있다. 바다가 사나우면 조각배는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없다. 우리는 서로에게 풀리지 않은 감정이 남아있어서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기 바빴다.


    집에 가는 길에 마트에 들렀다. S는 저녁에 반계탕을 끓이겠다며 재료를 카트에 담았다. 주말에 먹을 카레 불고기 미역국 재료도 담았다. S가 내 밥도 해줄 모양이다. 이 와중에도 진지한 눈빛으로 당근을 고르는 S의 옆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S야 화났어?” “아니 그냥 답답해.” S와 심리 상담은 맞지 않을 거라는 내 예상은 맞았다. 내가 알던 S를 다시 만나게 된 것 같아 반가웠다. 잔잔한 감정바다가 이성 조각배를 S 쪽으로 스윽 밀어주었다.


    “아까 대기실에서 들으니까 내가 자기 고생한 걸 인정 안 해준다고 막 언성을 높이더라. 그거 아니야. 나는 자기가 원주로 이사 와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거랑 밥 해주는 거 고맙게 생각해 “


    S는 내가 고맙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는데, 말을 멈추었다. 과연 두툼한 입술 사이로 내가 기대하는 말이 나올 것인가. 계산을 마칠 때까지 S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진: UnsplashNathan Duml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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